집이 멀어서 가지 못하고 병원에서 몇달째 사는 나를 위해 주말이면 가끔 아내가 병원 근처로 와서 데이트 비스무리한 것을 하고 저녁을 함께 먹곤한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연휴의 시작이기도 하여 조금 그럴싸한 계획을 잡아 보았다. 병원과 처갓집(아내가 아이들과 함께 얹혀 사는)의 중간쯤 되는 광화문 교보 문고에서 만나서 덕수궁 옆의 서울 시립 미술관을 들러볼 계획이었다. 미술관 관람후 미술관에서 멀지 않은 한식당 달개비에서 근사한 저녁을 먹는 코스. 내 처지에는 과분하지만 연말이니까 그 정도 사치는 부려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교보 문고에서 아내를 만나 간단한 눈요기를 하고 나오는 순간 내 계획은 다 헝클어졌다. 아내가 동대문 곱창이라고 불리는 돼지 곱창을 먹고 싶다고 비수와도 같은 한 마디를 날렸다. 아내는 젊은 시절에는 마음씨도 순하고 내가 하자는 대로 다 하던 토끼 같은 사람이었는데 나이가 들어서는 고집불통이 되고 내 주장은 거의 먹혀 들어가지 않게 변했다. 토끼가 호랑이가 되는 놀라운 변화를 아내에게서 보았다. ㅠㅠ. 내가 내 주장을 굽히지 않고 우기면 처음 계획한데로 미술관을 가고 근사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을 수도 있지만 아내의 바램을 거절하면 별로 뒤끝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내의 생각대로 하기로 했다.
아내가 안내한 곳은 종로 4가인가 5가쯤의 돼지 곱창집이었는데 40년 전통의 집이라고 한다. 주말 저녁이라서인지 앉을 자리가 별로 없이 북적거렸다. 반면 바로 옆의 곱창 집은 손님이 거의 없이 파리만 날리는 처지였다. 손님도 하나 없이 잘되는 옆집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주인 아주머니의 얼굴을 멀리서 보니 남의 일 같지 않게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그래도 손님이 없는 집은 잘 안 들어가게 되어 아내가 안내한 곱창집으로 들어 갔다. 나름 유명하다는 그 우리곱창이라는 곱창집은 아내가 전에 산 친구들과 함께 와서 먹었던 집이라고 한다. 맛이 있어 얼마전 혼자서 와서 한번 먹고 싶었는데 혼자서는 먹을 용기가 나지 않아 나를 끌고 가기로 한 것이었다. 나는 혼자서도 잘 하는데. ㅎㅎ. 곱창의 맛은 그저 그랬다. 역시 곱창은 소다. 돼지는 아무래도 소를 따라 갈 수가 없다.
저녁을 계획에도 없이 엉망으로 망친 것이 미안했는지 아내는 맛있는 커피를 사주겠다며 내 소매를 잡아 끌고 (실제로 그랬다는 것은 아니고 이를테면 그렇게 거의 반강제로) 안내했다. 을지로 3가쯤에 있는 커피집인데 종로 5가에서 을지로 3가까지 걸어서 갔다. 걷는 것을 싫어하는 나를 그 정도 거리까지 끌고 가는 것을 보니 대단한 자신감이 있는 모양이다. 마침 도달한 커피숍은 정말 예상 밖이었다. 커피숍으로 들어가는 길은 사람 한명이 간신히 지나갈 정도의 넓이이고 밖에서는 간판도 출입구도 보이지 않는다. 전에 다녀본 적이 있는 북한산의 숨은벽 능선과 같다고 해야 할까? 거의 숨어 있는 집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들어가는 길이 건물 사이의 자투리 공간이라고 생각하지 길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나도 아내가 이끌어서 그렇지 혼자 지나는 길이었다면 당연히 그냥 지나쳤을 만한 길이다. 그런 골목이라 부르기도 초라한 공간의 한 벽면에 가게 간판이 붙어 있다. 커피 한약방이라고 한다. 한약방이라는 이름 때문에 커피에 산삼 같은 한약이라도 섞었거나 아님 설탕 대신 감초라도 넣었나 싶었지만 한약과는 관계 없다고 안내문이 붙어 있다. 다만 그 장소가 동의보감을 지은 허준 선생님이 근무하던 혜민서 자리여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간판의 모습에서 이미 눈치를 챘지만 안은 정말 샹상 이상이었다. 좋은 말로 하면 고색이 창연했고 직설적으로 말을 내 뱉고 사람 마음 후비는데 재주가 있는 내 표현 방식대로 하자면 골물이 줄줄 흐르는 모습이었다. 골물이라면 모르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는데 돈 받고 가져가라도 가져 가지않을만한 꼬질꼬질한 골동품으로 안을 장식했고 천장은 시멘트가 떨어져 골조가 드러나 보이는 장면을 떠올리면 된다. 아마 그런 콘셉으로 일부러 그렇게 한 듯 싶다. 대략 한 50년은 넘었음직한 건물이었다. 커피의 맛에 대하여는 난 잘 모르는데 아내의 말로는 맛이 기막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커피를 마시면서 시간을 눙치는 동안 꽤 많은 사람, 특히 한가닥 유행을 안다 싶은 젊은 청년 숙녀분들이 다녀갔다. 개중에는 나처럼 멋이라곤 전혀 없는 중늙이 같은 사람도 있었다. 커피 한약방의 건너편에는 양과자를 파는 역시 고색창연한 빵집이 있다. 빵집의 2층이 쉬기 편하다는 아내의 조언에 따라 50년대 극장식 의자와 송대의 나무로 판들었다는 탁자도 있는 곳에서 차 한잔과 케익 한 조각을 먹었다. 나로서는 다시 가보고 싶은 집에 속한다고까지는 하기 어렵지만 모르는 사람에게는 한번쯤 소개하고 싶기는 하다. 아직도 이런 건물이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의미로, 그리고 이런 건물을 활용한 커피 집을 차린 아이디어의 기발함을 기리는 의미로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생긴 집인지 궁금한 분은 한번 들러 보시기 바란다. 아마도 상당히 특이한 인테리어 때문에 인터넷에는 꽤 많이 알려진 집일 듯 싶다. 아래는 거기서 찍은 사진 몇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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