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종일 지내다 보니 저녁에는 딱히 할 일이 없어 일주일에 두어 번은 근처 서점에 들러 시간을 때운다. 서점에 자주 가는 편인데도 매번 갈 때마다 항상 처음 보는 새 책이 있다. 한해 출간되는 책이 엄청나게 많다는 뜻이다. 물론  한해에 몇 권의 책이 출간되는지 소설책은 몇 권이나 팔리고 인문 서적은 몇 권이나 팔리는지 모른다. 우리나라는 책과 관련된 각종 통계가 아주 미비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저 각 서점 별로 많이 팔린 책이 무엇인지 정도만 알 수 있다. 숱하게 많은 책들 중 대부분의 책들은 대중의 시선을 받아 보지 못하고 사라진다. 사람은 사라질 때 장례식이라는 것을 거치면서 사라지는 것을 광고(라고 하면 좀 그렇지만 여하튼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니 광고와 다를 것은 없다.) 하지만 책은 그렇지 못하다. 그런 책이 있었는지조차 없이 있다가 없어졌는지조차 모르게 없어지는 책이 대다수다.
새로 나온 책은 깨끗한 표지로 대형 서점의 서가에 얼마간 꽂히는 호사를 누린다. 얼마쯤 시간이 흐르면 호사의 시간은 가고 무관심의 시간이 온다.  중고 서점에 떨이로 넘겨졌다가 중고 서점에서도 주인을 만나지 못하면 이제는 책이라는 이름을 뺏긴다. 검은 잉크가 묻은 흰 종이일 뿐이다.  이제 책이 아닌 종이는 다른 것들과 섞여 짓이겨져 재생지가 되기도 하고 다른 물건을 싸는 포장지가 되기도 한다. 종이의 사명을 다하고 연료로 사용되기도 한다. 책으로 살면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것이 행복이고 종이가 되어 어느 산골 오두막의 온돌을 덥히는 땔감으로 사는 건 불행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책은 책이기도 하지만 종이의 속성이 있기 때문에 다급할 때는 휴지가 되기도 하고 때로 냄비받침이기도 하고 잠잘 때의 베개가 되기도 하다. 어떤 물건의 목적을 정하는 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달린 일이다. 물론 책을 책으로 사용하는 것이 그것에서 가장 많은 것을 끌어내는 방법인 것은 분명하다.

오늘도 한 아기가 한  여자와 한 남자의 기쁨의 눈물 속에 태어났다. 아이가 부여 받은 삶이 수많은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주는 것일지 자신 외에는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쓸쓸한 것이 될지는 지금은 알 수 없다. 어떤 삶을 살게 되던 다 가치가 있는 일이다. 굳이 이름을 떨치고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쥐어야 가치 있는 삶이 아니다. 산골짝에 다람쥐라는 노래도 있지만 산골짝에 다람쥐처럼 혼자 살다 갔다 해도 불행한 삶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삶이란 한 인간이 이루어낸 결과물에 관계없이 치열하게 한 인생 살아 냈다는 것만으로도 평가해 줄 만한 가치가 있다.  자신이 낳을 아이가 자라서 무엇을 해야만 하기 때문에 임신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통령이 될 아이를 낳기 위해서 혹은 뛰어난 과학자가 될 아기를 낳기 위해서 임신을
하지는 않는다. 무엇을 하던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행복하게 자기 삶을 살 수 있으면 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의 엄마 아빠의 마음이다. 동물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듯이 사람도 그렇게 동물이 태어나는 것과 다른 것은 없다.  다만 모두 다 가치 있는 삶이지만 이왕이면 자신의 삶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하고자 노력하고, 나름대로 세운 사명을 완수하고 이루어 내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책이 책으로써 기능하는 것과 같이 사람이 가장 사람답게 사는 모습이기는 할 듯 싶다.

책은 누군가에게 읽히기 위해 태어나서 많은 이들의 눈길을 받다가 누군가에게는 교훈을 주고 누군가에게는 즐거움을 주고 또 누군가에게는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 주기도 한다. 그렇게 가장 화려한 시기를 보내고 찢기고 접히고 펜으로 더럽혀지다가 결국에는 버려진다. 책은 종이로 만들어졌지만 종이 자체는 아니다. 사람은 동물이지만 동물이기만한 것이 아닌 것과 같다. 담고 있는 내용에 의해 책의 가치가 바뀌는 점은 사람과 흡사하다. 아무리 좋은 책도 읽어주는 이가 없으면 아무런 글씨가 없는 빈 종이와 다를 것이 없다. 종이로 바뀐 책의 운명은 결국은 땔감이다. 이젠 누군가의 마음을 데우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의 몸을 데우는데 쓰인다.  위에 썼다시피 그것도 물론 가치 있는 일이다.


책이 아무리 좋은 내용이고 많은 사람이 앞다투어 찾아도 새 책은 그리 비싼 가격은 아니다. 오히려 오래전에 출간되었다가 절판되어 구하기 어려운 초판이 비싼 가격에 거래된다. 1994년에 마이크로소프트의 빌게이츠 회장이 크리스티 경매에서 구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업 노트는 72쪽에 불과했지만 가격이 3100만 달러 현재 우리나라 돈으로  330억원 정도의 가격이었다. 다빈치의 노트는 당시 연필이나 볼펜은 개발되기 전이고 잉크를 찍어 쓰는 딥펜은 휴대가 어려워서 그리 좋지 않은 종이에 철필로 긁어서 쓴 책이니 책의 종이로서의 가치 때문에 비싸게 팔린 것은 아닐 것이다. 다빈치가 다른 사람이 못 보게 하기 위해  글자를 거꾸로 썼다고 하니 당시로서는 상당한 가치가 있는 내용이기는 했겠지만 지금은 내용이 다 알려져서 누구나 인터넷을 통해 쉽게 볼 수 있으니 내용의 가치 때문도 아닐 것이다. 아마도  다빈치라는 걸출한 천재의 수적 (발자취를 족적이라고 하니 손으로 쓴 것은 수적이라고 하면 될 듯. 전적으로 내가 만든 조어다)을 소유한다는 의미가 그런 큰 비용을 치루게 했을 것이다. 사람의 경우 가격을 따로 매길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고가 나거나 사망 시 보험료를 지급하는 기준으로 보면 그 사람이 현재 얼마나 돈을 많이 버는 지에 따라 가치가 정해진다. 그 점은 책과 사람이 크게 다른 부분이다.  어떤 책이 사람에게 많은 돈을 벌어다 준다고 해서 비싼 책이 아니지만 사람의 경우는 돈을 많이 벌면 귀하게 대우를 받는 게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는 사람은 책보다 못한 듯 싶다.  

나는 윤회를 믿지는 않지만 만일 다시 태어나게 된다면 사람이라면 서점 주인이나 출판사 사장이 되고 싶고 사람이 아니라면 책으로 태어나고 싶다. 글자보다 빈 공간이 더 많은 책, 굳이 내용이 꽉 차 있지 않아도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에게 위로와 편안함을 줄 수 있는 책으로 태어났으면 좋겠다. 지금 현재의 나는 숱하게 쏟아 내는 말과 행동으로도 편안함과 위안을 주는 것이 아닌 삶을 살고 있는 탓에 아마 보상심리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처럼 책을 사서 옆에 두기만 하고 제대로 읽지 않는 사람도 죄책감보다는 위로를 받고 힘이 되는 책이면 좋겠다. 현재 그런 책에 가장 근접한 책은 종교 서적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꼭 종교의 힘이 아니라도 그런 위안을 줄 수 있는 책이 있을 수 있다고 믿고 싶다. 내 식견이 짧은 탓이겠지만 아직까지는 그런 책을 만나지는 못했다. 언젠가는 그런 책을 만날 수 있을까?

함께 감상할 음악은 Frank Pourcel의  Merci Cheri

merci_cherie.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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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loe [2018-05-01 16:32]  tpflslek [2018-04-30 21:29]  hanalakoo [2018-04-30 15:46]  podragon [2018-04-28 02:15]  dkfkasla [2018-04-27 15:09]  satieeun [2018-04-27 13:25]  
#2 dyoon 등록시간 2018-04-28 11:02 |이 글쓴이 글만 보기
분만실에서 ‘이제 다 되었어요~!’라는 심장님 소리는 제게 큰 위안이 되었답니다 (물론 순간적으로 다 된게 맞는건가 하는 의심이 살짝 들긴했지만^^), 차분하지만 강력하게 다 되었다고 하는말씀은 확실히 위로와 위안이 됩니다요. 그리고 아기가 나옴 평안해지니, 심장님도 누군가에게 평안과 위로를 준다고 생각하셔도 될듯..어쨌거나 저쨌거나 내 자신이 젤로 행복하고 평안해야하는데 심장님도 그러시길 바래봅니다

댓글

그 말이 힘이 되나 보군요. 여하튼 별로 편안한 의사가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등록시간 2018-05-02 02:03
#3 이연경 등록시간 2018-04-30 15:06 |이 글쓴이 글만 보기
글보다 공간이 많은책이라면 그림책 혹은 메모지로... 태어나시..... 아. 여기까지만 할께요.. 암튼 원장님은 많은분들께 이미 따듯함이랍니다

댓글

위안과 평안이 중요한 조건입니다. 그림책 까지는 모르겠는데 메모지는 위안을 주는 것은 아니잖나요? 여하튼 감사합니다.  등록시간 2018-05-02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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