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가 수유 패턴이 조금 생겨나서 짬을 내어 밀린 일을 하겠다고 컴퓨터를 켰다가,
버릇처럼 마음의 고향 같은 진오비 페이지에 들어왔습니다.
다른 산모님들 글도 읽고, 최근에 태어난 아기들도 보고 하다보니
어쩐지 감격스러운 마음이 되어서 우리 아기 만나던 날을 떠올려봅니다.

아기에게 늘 아기의 속도를 존중할테니 아기가 나오겠다고 마음먹은 그 때 만나자고 말해두었었는데
예정일을 훌쩍 넘기고도 아무런 출산징후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느긋하고 속편한 아기라고 놀렸는데 41주 검진에서
'엄마 몸이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기에게 너무 미안하더라구요.

활동량이 임신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걷는 양도 적지 않고
적어도 이틀에 한 번 요가도 꾸준히 하고, 이층집이라 계단도 자주 오르내려서
제가 준비되지 않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막달에 좀 더 의지적으로 열심히 운동하지 않은 게 문제일까 싶었습니다.

1-2일 내로, 자연분만 성공 확률이 적은 유도분만을 시도할 지
42주까지 자연진통이 오기를 기다려볼 지 결정하라고 하셔서
내 몸이 준비되기까지 좀 더 노력하지 않고 유도를 결정하기는 아쉬워서 한 주 미루고
아침 저녁으로 여기저기 어엄청 돌아다녔습니다.
덕분에 출산 전 적당히 선선하고 좋은 날씨에,
덕수궁, 미술관, 식물원 다니면서 좋은 구경 많이 했네요, :)

41주5일이 되던 날 저녁, 비가 내리는 날 식물원에 다녀와서 피로가 좀 쌓였어요.
저녁을 먹고 살짝 잠이 들었다가 9시에 일어났는데 처음으로 이슬을 보았습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대체로는 이슬이 비치고 며칠 후에 출산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서
조급하지는 않고 그저 반가운 마음이었는데, 한 시간 후부터 조금씩 진통이 느껴지더라구요.
어쩌면 병원에 가는 게 오늘이 될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밥솥도 씻고, 집 정리도 하고, 고양이 물통과 밥그릇을 꽉 채워두고,
출산가방을 현관 앞에 가져다두고, 샤워를 하고
프리미어 리그를 보면서 짐볼을 탔습니다.

축구가 끝나고 진통이 어느정도 주기를 갖는 것 같았습니다.
초산이라 진통에 대한 감이 없어서 우선 병원에 전화를 했더니 와보라고 하셔서
결의에 찬 마음으로 집과 고양이에게 인사를 하고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에 갔는데
정작 갔더니 자궁이 1cm 밖에 열리지 않았다고 다시 집에 갔다가 오전 10시에 오라고 하셨어요.
웃고 떠들고 놀 수 있으면은 그것은 진정한 진통이 아니라는 걸 이제보니 알겠네요 ㅎㅎ

토요일 새벽이어서 홍대에서 다시 집에 가는 택시를 잡기가 좀 어려웠고,

그동안 진통이 조금 더 세졌습니다.
집에 가서 푹 단잠을 자고 에너지를 충전해서 오전에 병원에 가야지 했는데,
견딜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는 아니어서 밤을 꼬박 새고
혹시라도 진통이 더 세지면 병원에 가는 택시에 민폐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조금 일찍 가도 되느냐고 병원에 전화를 하고 9시에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진통이 주기가 있다는 건 움직임을 계획할 수 있어서 참말로 신통합니다 ㅋㅋ
사그라드는 순간에 샤샤샥 움질일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러나 여전히 자궁은 충분히 열리지 않았다고 하고 점점 통증은 세지고
강좌를 통해 책을 통해 배웠던 감통 방법과 자세들을 떠올려봤지만
당시에는 딱히 다른 무엇을 시도하지 못할 것 같은 정도의 고통이어서 기다림이 좀 막막했습니다.

많은 것들을 남편과 의료진과 상의하면서 결정해야지 마음먹었던 것과 달리
간간이 들어오셔서 아기가 출생 이후 받을 검진도 설명해주시고 하는데
그 대화에 끼어 들 여력이 없어 남편에게 맡겼습니다 ㅎㅎ
의미있는 날의 순간 순간을 잊지 않고 잘 기록해두고 싶었는데 그럴만한 정신도 없었어요.
그저 남편에게 시간을 물을 때마다 기분으로는 한 오백년은 흐른 것 같은데
몇 십 분 지나지 않았을 때의 당황스러웠던 마음이 생각납니다.

진통을 겪는 과정 중 어느 시점에는 진통제와 촉진제도 투여해주셨습니다.
출산을 준비하면서는 촉진제는 최대한 늦게,
다만 의료적 입장에서 필요하다고 여겨질 때 사용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계획서에도 그렇게 적어두었는데 이 때가 필요한 그 때인가보다고 생각했습니다.

아픈 와중에도 미리 물어주지 않는 것에 대해 의아함이 있었지만,
미리 저와 남편의 의사를 묻는다고 한들 원장님을 신뢰하기에 그저 따를 뿐
스스로 어떤 판단을 할 수 있는 기준이 있는 것도, 그럴만한 상태도 아니었어서 최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생각하면은 더 그래요.
진통이 길어지면 아마 기력이 없어서 아기를 만나는 과정이 좀 더 어려웠겠다고요.

촉진제를 투여한 이후부터는 주기 같은 건 없어지고 연속적인 진통만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11시쯤 분만실로 이동했는데,

기억에 당시에 땀투성이었는데 층을 이동하느라 복도로 나왔더니 시원한 기운에 통증이 잦아들더라구요.
그 와중에도 '바람이 있어서 훨씬훨씬 좋으네요' 라고 했던 게 생각이 납니다.

분만실에서 원장님과 간호사선생님께서
차분하게 재차 내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고 어떻게, 어디에 힘을 주어야 하는 지 설명해주시는데
마음만큼 따라주지 않는 몸과 내가, 마치 나머지 공부를 하는 학생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이제부터 1시간 내로 낳지 않으면은 수술을 해야 할수도 있다, 아기가 힘들 수도 있다,

여러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아기가 염려되고 미안하고 슬프면서도,
본능적으로 스스로는 내가 힘든 게 우선처럼 여겨져서
그 와중에 모성이란 무엇인가, 나는 과연 엄마로서 준비되었는가 ㅋㅋㅋ 를 생각하면서 울적했어요.

결국 흡입기의 도움을 받아 아기를 만났습니다.
아래쪽이 따뜻해지는 느낌과, 원장님과 간호사선생님의 신속한 움직임.
그 후에 아기의 울음소리가 났는데 그 때까지도 얼떨떨 했어요.
가슴에 올려진 아기를 보고서야 태어났구나를 조금 실감했는데,
그 때의 장면도 선명하지가 않아서 아쉽습니다.
다만 예정일을 훌쩍 넘기고 나온 만큼 머리가 많이 자라 있었고
태변을 눈 상태여서 까만 머리 사이로 똥딱지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붙어있던 게 생각이 납니다.

아기를 만나는 날을 기다리면서
평생을 함께 살아갈 누군가가 생기는 것에 대한 설렘과 무거움은 있을지언정

출산 자체 대한 두려움은 별로 없었습니다.
경험해봐야 아는 성향 탓이겠지만,
어쩐지 나는 진통도 잘 견디고 힘주기도 잘해서 수월하게 아기와 만날 수 있을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는데
돌아보면 참 그 자신감이라는 게 막연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ㅎㅎ

강좌를 들어가며 호흡법을 배우고 진통중에도 연습한대로 최선을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산소호흡기도 사용했고
막달 요가 영상을 보면서 힘주기 연습도 했는데 결국 제대로 힘을 주지 못해서 흡입기도 쓰고 얼굴과 눈에 핏줄도 터졌네요.
출산 후에 과정을 떠올리는데, 잘 할거라고 자신했던 과거의 내가 어이없어서 웃음이 나더라고요.
근거없는 호기로움이 창피했습니다. 세상에 ㅎㅎ

아기를 만날 때 들려주고 싶어서 선곡한 노래를 오류가 있어 틀지 못하게 되었는데
그마저도 아쉬운 마음은 하나도 없고, 건강하게 만난 것만으로 충분하다 싶고
다정하고 차분하게 환영의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아기를 낳은 감각조차 흐릿해서 감격은 느낄 새도 없었어요.
처음 가슴 위에 올려진 아기에게 젖을 물려주고 싶다던 것도
너무 작아서 손을 대는 것 조차 조심스러워서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돌아보면은 참말로 엉망진창이었네요 ㅋㅋㅋ

그래도 출산 후 입원실로 돌아와서
충분히 인사도 하고, 노래도 들려주고, 감격스러워하고, 젖도 물렸으니
시점이 어느때인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

모자동실은 정말로 훌륭합니다.
아기와 단기간에 보다 가까운 사이가 되는 것은 물론,

도움을 청할 때 언제든 한걸음에 와주시고
친절하게 하나하나 알려주시는 분들이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었는 지 모릅니다.

제 몸과 아기를 돌보는 것에 대한 팁을 많이 얻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섬세함과 진심이 느껴져서 더욱 감사했습니다.
너무 늦은 시간에는 간호사실에 전화드리는 것도 조심스러웠는데
방에서 계속 아기 울음소리가 나면은 먼저 물어주시기도 하고..

그건 다정함이기도 했지만 엄청난 전문성으로 느껴지기도 했어요.
병원의 모든 분들 감사하고 존경합니다.

아 출산후기에 포함시기키에 적절한 지 모르겠지만
병원에서의 경험이니 몇 자 더 적어보면은,
병실에서 남편의 밥도 함께 요청해 먹었는데
식사를 준비해주시는 선생님께서 다음 날 식사를 넣어주시면서
'어제 보니 야채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서 오뎅을 넣어봤다'고 하시더라구요 ㅜㅡ
퇴원하는 날 퇴실 시간이 애매한데다가 당일 입원실 산모가 저 뿐이라 식사 준비가 성가실 것 같아서
점심은 준비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씀드려두었는데
병원을 나서다가 마주친 선생님이 제가 점심을 먹지 않고 가는 걸 저보다 더 안타까워 해 주셔서
어쩐지 더 죄송하고 뭉클한 마음이었습니다.

아기를 품고 검진받던 때 부터 만나고 퇴원하던 순간까지
진오비에서는 온통 따뜻한 기억 뿐이네요. 고맙습니다.


아기를 만난 지 벌써 한 달이 되었고 그 사이에 아기는 이수인이라는 이름도 갖게 되었어요.
양가 어른분들 의견에 따라 획수를 따져가며 짓느라 원하는 의미를 충분히 담지는 못했지만
무엇보다 마음을 지키면서 살았으면 좋겠는 마음으로 '지킬 수'를 썼습니다.

육아는 생각보다 힘겹지만 아기도 생각보다 더 사랑스러워요.
남편도 저도, 아기를 이렇게 빨리 깊게 사랑하게 될 줄 몰랐습니다.
매일이 새롭게 사랑스러워서 하루하루가 가는 게 아쉬운 마음입니다.
적당히 무던하고 성질도 부릴 줄 아는 아기를 만나서 기뻐요.

많은 걸 쉽게 확신하지는 않는 편인데, 요즘 이수인을 보면서,
꽤 오래 이 아기가 우리 부부에게 기쁨이고 신비로움일 거라는 걸
장담할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하게 만날 수 있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려고 애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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