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안개 바다의 방랑자
작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소장: 독일 함부르크 미술관

“이 책에 있는 몇 편의 글을 읽었다고 해서 낙태 문제에 대하여 진실을 깨닫고 많은 사람이 혹은 정부 당국자가 쉽게 생각을 바꾸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기가 책으로서는 마지막 페이지이지만 사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불가능해 보였지만 가능하게 된 모든 것은 그것이 가능하게 되기 직전까지는 불가능한 것에 대한 무모한 도전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의 열정이 물을 끓일 정도의 섭씨 100도까지는 안 돼도 계속 노력한다면 결국 ‘따뜻한 물’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동안 낙태를 근절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피와 땀을 흘려가면서 걸어온 길은 짧지 않다. 그러나 연간 낙태 34만 건이 우리가 가는 길의 끝일 수도 없고 끝이어서도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
스캇펙 박사가 가치 있는 인생을 위해 쓴 『아직도 가야 할 길』의 한 구절을 옮기면서 내 짧은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고 긴 발걸음을 시작한다.

<고통을 이겨내고 성장하는 데 필요한 4가지 기술은 즐거움을 나중에 갖도록 자제하는 것, 책임을 자신이 지는 것, 진실에 헌신하는 것, 그리고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위 글은 내가 2011년도에 낸 책 "낙태와 낙태"의 마지막 페이지에 "아직도 가야 할 길"이라는 소제목으로 실은 글이다.
가야 할 길을 생각하면서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른 그림은 안개 낀 먼산을 내다보는 남자의 뒷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오래전에 보고 잊었던 그림인데 "산모와 나"라는 글 시리즈의 마지막 글을 쓰면서 불현듯 그 그림이 생각났다. 그 그림은 프리드리히라는 독일 화가가 그린 그림으로 나름 꽤 유명해서 그림을 소재로 한 여러 책들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자세히 보니 남자의 뒷머리의 숱이 적어 보이는 것이 속알 머리가 점점 없어지고 있는 내 뒷머리와도 닮은 듯 하다. 거기에 내가 좋아하는 색인 검은색의 외투까지 입고 있다니.....
프리드리히의  그림에는 사람이 잘 등장하지 않는다. 사람이 등장하더라도 동양화에서 보듯 아주 작게 그려져 있거나 아니면  이렇게 뒷모습이 대부분이다. 후대의 사람들은 프리드리히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이 뒷모습만을 보여주는 것은  자기 성찰을 하는 낭만주의 경향 때문이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가 사람들의 앞모습을 그리지 않은 것은 사람을 그리는 데 서툴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그는 나무나 풀을 묘사하는 것보다 사람을 그리는 것이 훨씬 힘든 일로 여겨진다고 고백한 바가 있다.
죽음이나 허무함과 연관된 풍경을 자주 그리는 것에 대해 프리드리히 자신은 역설적이게도 영원한 삶을 위해라고 답한다. 그는 삶을  사랑하기 위해선 이따금 죽음을 생각하라고 한다. 이런 그의 생각은 대인 기피증에도 연결된다.  다음은 그가 쓴 시다.

사람들은 나를 인간 혐오자라고 부른다네.
내가 사회를 피한다는 이유로
하지만 사람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지.
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네.
하지만 인간을 증오하지 않기 위해
사람들과 교제를 단념하지 않을 수가 없다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은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면서 다 이루었도다 하는 말은 신의 경지에나 다다른 이가 할 수 있는 말이며 인간으로서는 거의 누구도 하기 어려운 말이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이루지 못한 일을 아쉬워하고 후회하면서 눈을 감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후회할 일을 만들지 말고 지금 하고 싶은 일을 최선을 다하라고 조언을 하는 이가 많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 중에 박인희 씨가 부른 끝이 없는 길이라는 노래가 있다. 몇 년 전 71세의 나이로 컴백 무대를 가지면서 그 노래를 하는 것을 보니 젊었을 때의 그녀가 불렀던 같은 노래와는 사뭇 다르게 들렸다. 과거의 노래가 화려하기는 하지만 공허한 것처럼 들렸다면 나이가 들어 부른 그녀의 노래는 상당히 묵직하게 들렸다. 나이가 들어 목소리가 가라앉은 탓일지도 모르지만 긴 세월의 무게가 더해진 탓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이 드는 게 좋다. 이상하게 젊을 때부터 빨리 늙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저 그땐 막연히 나이가 들면 희로애락에서 벗어나고 여유가 있어지지 않을까 싶었고. 지금 이 나이(71세)가 편안하고 좋다. 세월이 지난 후의 더 초췌해진 모습도 전혀 두렵지 않다. 미국 생활은 자연스럽게 나이 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새치가 넘치고 화장도 하지 않는다. 이번 컴백 기자회견도 메이크업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 주최 측이 야단을 쳐서 머리만 조금 염색했다. 나이 들어 잡티나 주름살이 생기는 것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 헤르만 헤세가 그랬듯이 나무가 나이테가 생기듯이 자연스러운 내 모습이 좋다.”
위 글은 박인희 씨가 2016년도 국내에 들어와서 컴백 무대를 갖고 나서 중앙 선데이와  인터뷰 한 내용 중 일부다.

박인희 씨가 그 노래를 불렀을 때 인생이라는 것이 끝이 없는 길이 아니라 언젠가는 끝나는 길이라는 것을 몰라서 그런 제목의 노래를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산부인과 의사로서의 삶이든 낙태 근절에 대한 관심과 노력이든 내가 아직도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하는 길도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누구도 영원히 살 수 없고 끝이 없는 길도 없다.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는 육아도 언젠가는 끝나고 끝이 없을 것 같은 진통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끝난다. 그렇게 끝난다는 사실이 어떤 경우에는 위로가 되고 어떤 경우에는 아쉬움이 될 것이다. 한때 없으면 죽을 듯이 사랑했던 연인을  세월이 많이 흘러 거리에서 만나게 돼도 알아보지 못할 수 있다. 그것이 인생이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모든 염색체의 끝에는 텔로미어라고 하는 부분이 있다.  텔로미어는 유전 정보가 없어 별다른 기능은 없지만 유전 정보를 가진 나머지 염색체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며 노화 유전자로 알려져 있다. 텔로미어는 염색체가 한번 복제할 때마다 그 길이가 조금씩 짧아지다가 일정 회수의 복제가 끝나면 더 이상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인간의 경우 보통 60번 정도가 복제 한계라고 한다. 텔로미어가 다 없어지면 해당 염색체는 보호막이 없어진 탓에 손상을 입고  사멸하게 된다. 이를테면 자동차 바퀴의 타이어와 같은 역할이다. 타이어가 다 닳으면 자동차는 더 이상 달릴 수 없고 휠로만 달린다면 결국 정상적인 주행을 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텔로미어가 정상적으로 줄어들어 세포가 죽는 것이 자연의 섭리임에도 불구하고 텔로미어가 줄어들지 않아서 끝없이 복제가 가능한 세포가 있다. 바로 암세포다. 암세포는 무한히 증식해서 정상적으로 기능을 하는 주변의 세포들을 잠식해 버린다. 암으로 인해 건강과 생명을 잃게 되는 것은 이렇게 정상 세포가 쫓겨나고 암세포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런 암세포 중에 최초로 실험실에서 증식에 성공한 세포가 있는데 헬라 세포 (HeLa cell)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헨리에타 랙스(Henrietta Lacks)라는 31살의 여성이 자궁경부암으로 사망하고 나서 조지 가이라는 박사가 그녀의 자궁 경부암세포를  채취하여 증식을 시켰다. 그녀의 이름의 앞글자를 따서 지은  이 헬라 세포는 의료계에서는 아주 유명한 세포로 이 세포를 이용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고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다. 암 연구와 치료 방법의 개발에 많은 기여를 한 헬라 세포는 1951년에 채취하여 증식에 성공하였으니 현재 나이가 70살이 넘었다.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앞으로도 계속 증식을 해 나갈 것이다.

영원히 사랑할 것만 같은 연인들에게는 사랑이 끝나는 때가 온다는 것은 믿고 싶지 않은 일일 것이다. 아직 삶을 충분히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젊은 말기암 환자도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아 곧 끝날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의학이 발달하여  모든 질병에 대하여 치료법이 개발되고 인간이 불멸의 존재가 되는 시대가 되었을 때 과연 그것이 유토피아 일지 디스토피아 일지는 모르겠다.  사람은 누구나 사는 날까지 아프지 않고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아프면서 오래 사는 것도, 아프지 않으면서 잠깐 사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파란 알약을 먹으면 질병으로부터 벗어나서 영원히 살 수 있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도 없다. 죽음이 없는 세상이다. 빨간 알약을 먹으면  질병이나 사고로 혹은 노화로 인하여 100년 이하의 삶을 살다 죽게 되며 자신의 선택에 따라 자살할 수도 있다. 죽음이 있는 세상이다. 위와 같은 가상의 약이 정말 개발이 된다면 과연 사람들은 어떤 약을 먹고 싶어 할까?

끝이 있다는 것.
그것이 신 혹은 자연이 생명체에게 준 선물인지 아니면 벌인지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듯하다. 내 생각으로는 선물에 가까워 보인다. 햇빛이나 공기나 물 등 자연으로부터 인간이 받은 대부분의 것들이 선물이라는 점을 보았을 때 하루의 끝인 잠도, 인생의 끝인 죽음도 선물일 것이다.  출산하고 난 산후 맘분들께 진통을 겪는 동안 내가 해 준 말 중에 가장 힘이 되었던 말이 무엇인가 물어본 적이 있다. 그랬더니 조금만 참으면 이 고생이 끝나고 통증은 거짓말처럼 사라진다는 말이었다고 한다.  언제 끝날지 끝나기는 하는 것인지 모르는 진통이 분명히 얼마  후에는 다 끝난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되었다고 한다.

신화에는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벌이 나오는데 그중 하나는 프로메테우스의 지는 고통이고 다른 하나는 시시포스가 감당해야 하는 고통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준 죄로 죽을 때까지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벌을 받은 신이고 시시포스는 뾰족한 정상에 무거운 돌을 굴려 올리는 순간 다시 아래쪽으로 굴러 떨어져서 다시금 같은 수고를 반복하는 벌을 받은 신이다.  참고로 프로메테우스는 미리 생각하는 자 즉 선지자라는 의미이고 그의 동생 에피메테우스는 행동하고 나중에 생각하는 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인간이 겪는 고통의 종류도 적지 않다. 내가 보기에 그중에서 견디기 쉽지 않은 고통 2가지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는 의미 없이 겪는 고통이고 다른 하나는 끝이 없는 고통이다. 즉 어떤 수고나 고통의 대가로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면 즉 아무 의미 없이 감수해야 하는 고통이라면 견디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끝이 없는 고통은 흔히 지옥불의 고통이라고 불리는데 절망감을 동반한 고통이라서 견디기 쉽지 않을 것이다. 프로메테우스나 시지프스나 끝이 없는 고통이라는 점에서는 똑같지만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주는 대가로 겪는 고통이니 신들의 일에 간섭했다는 이유로 벌을 받는 시지프스보다는 견디기에 쉽지 않을까 생각한다. 출산 시 겪는 고통은 끝이 있는 고통인 점은 확실하다.  다만 그것이  의미 있는 고통일지 의미 없는 고통일지는 산모 자신에게 달려있다. 의사로서도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 모든 일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다. 생명의 시작은 어느 누구도 스스로 하지 못했지만 그때로부터 죽는 순간까지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 임신과 출산이라는 인생의 중요한 사건은 그것을 깨닫게 만들어 주는 기회의 순간이기도 하다. 더불어 소중한 한 생명이 자신들에게로 오는 순간이기도 하다. 출산은 임신 동안의 고통의 끝이며 육아라는 새로운 고통의 시작이지만 또한 행복의 시작이기도 하다.
모든 시작은 끝이 있으며 모든 끝은 새로운 시작이다.
그래서 평소에는 잘 안 쓰는 단어이지만 이 글에는 특별히 써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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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ㅠ ㅠ  등록시간 2020-10-10 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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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이 [2022-06-15 07:17]  googyya [2021-03-28 20:28]  daphne [2020-10-15 05:11]  griets [2020-10-10 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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