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연인들 2
작가: 르네 마그리트
소장: 미국 뉴욕 현대 미술관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고, 우리는 늘 우리가 보는 것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궁금해한다.” – 르네 마그리트
르네 마그리트의 "연인들 2"라는 작품에 나오는 두 인물은 천으로 얼굴을 가렸다. 얼굴을 가린 모습의 그림을 그리게 된 연유에 대하여 어떤 이는 르네 마그리트가 어릴 때 강에서 투신자살을 한 어머니의 모습에서 받은 충격적 이미지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의 어머니는 발견되었을 때 입고 있던 흰 잠옷이 얼굴을 덮고 있었다. 그러나 르네 마그리트는 그런 고정된 해석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림을 보는 사람은 각자 살아온 경험과 생각이 다르다. 그러므로 그림을 보고 느끼는 것도 달라야 한다는 것이 마그리트의 목적이었을 것이다. 마그리트는 그림을 보는 모든 사람이 "정말 똑같이 잘 그렸네"하는 식의 동일한 감동을 느끼는 것을 원하지 않은 화가로 보인다. 얼굴을 가렸기 때문에 키스를 하는 두 연인의 표정이 어떤지 우리는 결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런 그림을 그린 마그리트의 마음도 알 수가 없다. 물론 나의 감상과 다른 사람의 감상도 다르다. 그림에서 주목할 것은 가렸다는 사실 외에 손이나 발등 신체의 다른 부분이 아닌 얼굴을 가렸다는 점이다. 그의 다른 작품인 "금지된 재현"도 모델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거울 앞에 앉은 남자나 거울에 비친 남자나 모두 뒷모습이다. 얼굴이 가진 의미를 마그리트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물론 그런 의미는 그만이 아니라 우리 누구나 알고 있다. 사람에게 있어 얼굴은 이름과 더불어 한 인간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얼굴에서 특히 가장 중요한 것은 눈이다. 비싼 돈을 들여하는 성형 수술도 쌍꺼풀 수술 등 눈과 관련된 것이 제일 많다. 범죄자의 사진을 공개할 일이 있을 때도 눈을 가린 사진을 쓴다. 눈은 사물을 보는 기능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눈이 가진 또 다른 기능 때문에도 중요하다. 눈은 검은 동공과 흰자위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람의 눈동자는 모든 동물 중에서 흰자위 부분이 제일 많다. 흰자위가 많기 때문에 검은 눈동자의 움직임을 정확히 볼 수 있다. 눈동자의 움직임을 보면 상대의 감정 (나에게 적대적인지 호의적인지, 마음이 안정적인 상태인지 불안한 상태인지 등등)을 어느 정도 알아챌 수 있다. 눈동자로 판단하든 얼굴 표정이나 목소리로 판단하든 내 편과 적을 잘 구분해 낼 수 있다는 것은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눈을 포함하여 얼굴 일체 볼 수 없게 가린다는 것은 자신에게도 답답한 일이지만 나를 보는 상대에게도 답답하고 불안한 일이다. 사람의 안구를 추적하는 실험의 결과를 보면 사람이 처음 어떤 사람을 볼 때 얼굴 부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연예인들이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거나 짙은 선팅을 한 차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숨기는 것은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감추려고 해서 일 것이다. 눈이나 얼굴이 노출된다는 것은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는 것인 동시에 자신에 관한 많은 것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래서 초상권을 보호해 주는 법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슬람 문화권에는 여성들이 니캅이나 부르카라고 해서 얼굴의 일부나 전부를 가린 옷들을 입는 문화가 있다. 과거 우리나라도 장옷이라고 해서 여성들은 포를 뒤집어써서 얼굴을 거의 가리고 다녔다. 이런 문화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취급받기도 하고 여성의 인권을 억압하는 것이라 하여 거부하는 운동도 있어서 지금은 많이 없어졌다. 남성이 아닌 여성의 얼굴만 가리는 점에서 보면 아마도 그런 측면도 상당히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현대에 와서도 그런 경우들이 있다. 이발소에서 누워서 머리를 감을 때는 천을 덮어 얼굴을 가리는 경우가 많다. 치과에서 치료를 받을 때도 얼굴을 가린다. 그리고 내가 진료하는 산부인과에서도 얼굴만 가리는 것은 아니지만 내진 시에는 의사와 환자의 얼굴이 마주치지 않도록 중간에 장막을 쳐서 가리는 경우가 많다. 르네 마그리트는 그림에서 연인들의 얼굴을 가렸지만 현실에서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 스킨십을 하면서 얼굴을 가리지는 않을 것이다. 친밀하지 않은 상대를 위해서 가까운 거리에서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불편한 일이다. 흔히 말하는 사회적 거리가 유지되기 어려운 경우에는 천으로 얼굴을 가림으로써 그런 불편함을 줄이는 것이다.
나는 무뚝뚝 대마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그런 별명이 생긴 이유 중에는 산모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는 것이 큰 몫을 차지한다.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고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무성의하거나 관심이 없다고 오해받을 수 있는 행동이다. 물론 나로서는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얼굴을 마주 보는 것은 친밀감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불편함을 넘어 공격적인 행위로 느끼는 경우도 있다. 특히 안 좋은 관계에서 그렇다. "어딜 꼬나봐"라는 시빗 조의 말도 그래서 나온 것이다. 부부 싸움을 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도 상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일이다. 어떤 사람의 얼굴을 마주 본다는 것은 그런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물론 산부인과에서 여성의 외음부를 관찰하는 진찰인 내진을 할 때 얼굴을 가리는 것은 그것과는 좀 다른 의미가 있다. 사냥꾼에게 쫓긴 꿩이 머리는 덤불에 가려 숨겼지만 몸은 드러난 채로 있는 것을 말하는 장두노미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꿩이 대가리를 덤불에 묻고 외면함으로써 두려움을 더는 것처럼 내진 시에는 얼굴을 가림으로써 부끄러움을 덜 수 있다. 그러나 출산할 때는 사회적 거리가 허물어질 정도로 가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가리는 장막을 중간에 두지 않는다. 출산 순간만큼은 산모에게 의사는 남편에 버금갈 정도로 친밀하고 믿고 의지하는 대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의사도 마찬가지다. 결과에 따라 나의 멱살을 잡을 수도 있는 잠재적인 고소인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힘든 상황에서 나만이 유일하게 직접적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임하게 된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하지만 의료에서는 서로 간의 믿음이 제일이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기독교 계통의 학교였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 성경 강의를 들어야 했고 한 달에 한번 강당에서 간증 설교를 들어야 했다. 그때 들었던 간증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서울대 농과대학을 나와 덴마크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얼굴과 전신에 심한 화상을 입은 분의 설교였다. 그분은 화상으로 머리와 귀가 타서 귓바퀴는 거의 없어졌고 손가락도 다 상해서 수저를 집는 것조차 불가능했다고 한다. 음식점에 들어가서 음식을 시켜 먹으려고 하면 주인이 거지에게 하듯 당시 돈으로 500원쯤의 동전을 주면서 내보내는 탓에 외식을 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때는 얼굴 이식 기술이 없어서 그분은 평생 상당한 불편함을 감수한 채로 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때 그분의 간증 주제는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이었다. 그분은 손가락은 타고 없어졌지만 다행히 발가락은 화상을 입지 않아서 엄지발가락을 떼어서 엄지손 자리에 이식하였다. 귓바퀴가 타버려 흉했지만 머리칼이 일부 남아서 없어진 귀를 가릴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지금 건강하게 이렇게 설교도 다닐 수 있으니 감사한 일이 아니냐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아침에 화장실에서 변을 보면서 변이 아래로 떨어져 풍덩 빠지는 소리를 들으면 감사한 마음에 눈물을 흘린다고 했다. 참고로 당시는 수세식 변소가 거의 없고 거의 푸세식 변소라 변이 떨어지면 소리가 들렸다.
어느 날 아내가 달라졌다. 아내의 얼굴에 쌍꺼풀이 생겼다. 10년 전 아내가 말이 좋아 안검 하수 수술이지 소위 말하는 쌍꺼풀 수술을 할 때는 그나마 내게 사전에 통보라도 해 주더니 얼마 전 눈썹 문신 시술은 나한테는 말도 안 하고 떡하니 하고 나타났다. 내가 보기에는 눈꺼풀이고 눈썹이고 원래의 모습이 더 나았는데.... 난 쌍꺼풀도 없고 눈썹도 갈매기가 아닌 여자와 결혼했는데 왜 바꾸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제 자기 얼굴을 주로 봐주는 사람은 내가 아니고 친구 거나 동창이거나 하다 못해 거리를 걷는 이름 모르는 사람 이어서일까? 의학기술이 더 발달해서 영화에 나오듯 쉽게 페이스오프가 되는 세상이 올까 봐 겁난다. 실제로 2016년 미국에 있는 뉴욕 대학교 랭건 의료 센터에서 얼굴 이식 수술이 행해졌다. 자전거 사고 후 뇌사 판정을 받은 28세 남자의 얼굴을 다른 사람에게 이식하는 수술이 있었다. 이식받은 사람은 소방관 임무 수행 중 심한 화상으로 얼굴 전체가 심한 손상을 입어 15년 동안 고통 속에 살아온 42세의 남자였다. 그는 눈꺼풀, 귀, 두피를 포함하여 얼굴 전체를 이식하였는데 얼굴 전체에 대한 이식 수술로는 최초의 수술이었다고 한다. 다행히 수술은 거부 반응이 없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그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런 경우는 치료 목적이기는 하고 아직 시험적 단계지만 의료 기술이 발달하면 지금 쌍꺼풀 수술하듯 얼굴 이식 수술을 하는 날이 오지 않는다고 장담하기도 어렵다. 그런 날이 오게 되어서 어느 날 갑자기 목소리는 익숙하지만 처음 보는 얼굴의 중년 여자가 찾아와 여보 하고 부르면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걱정이다.
"누구세요?"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자기 얼굴 좋아졌네."라고 칭찬해 주어야 할지......
세상에는 바꾸어서 좋은 것들도 있고 바꾸든 안 바꾸든 별 차이 없는 것도 있고 바꾸지 않아야 좋은 것들이 있다. 그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기는 하겠지만 오래전 걷던 길도 그대로였으면 좋겠고, 아내의 얼굴도 자연이 주는 서서한 변화 말고는 그대로였으면 좋겠다. 내 얼굴이 아니니 내 마음대로 이래라저래라 못하고 내가 독점하는 길이 아니니 그리운 골목길들을 없애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주장하지도 못한다. 마음에 안 드는 변화들이 오지 않도록 막을 수 있는 것은 어떤 능력으로 되는 것인지 궁금하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고 살고 싶어 돈을 번다는 사람처럼 그것도 돈이 있으면 해결이 되는 일일까?
[토막 정보]
공적 거리 (3.6m 이상)
전혀 모르는 사람 혹은 공적인 모임에서 유지하는 거리, 예: 공연시 가수와 관객
사회적 거리 (1.2m~3.6m)
별다른 친분이 없는 사람과 대면하는 경우 유지하는 거리, 예: 학교 선생님과 학생
개인적 거리 (0.5m~1.2m)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친한 사람 사이에서 유지하는 거리, 예: 친구
친밀 거리 (0.5m이하)
아주 친밀한 관계에서 유지하는 거리, 예: 연인이나 배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