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생선 장수
작가: 베르나르 뷔페
소장: 일본 시즈오카 뷔페 미술관
"의사는 왜 그렇게 항상 차갑나요?"
책을 내기로 결정한 후, 출판사 편집자 분이 던진 질문에 저는 명치를 걷어 차인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차갑다고요? 언제나 정중하게 응대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요. 그렇게 생각하면서 한밤중에 혼자 병원 책상 앞에 앉아 돌이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자 환자가 차갑다고 여길만한 말을 하는 저의 모습, 태도가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신음이 저절로 나오더군요.
이 책을 읽는 여러분도 유감스럽지만 의사의 태도가 차갑다고 느낀 적이 있겠지요. 저도 가끔 다른 의사가 환자와 얘기하는 모습을 보고 저건 좀 너무 하네 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환자에게 쌀쌀맞게 대하는 의사가 젊은 후배일 때는 주의를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선배 의사일 때는 특히 상하 관계가 엄격한 외과 의사 세계에서는 선배의 태도를 지적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책을 빌어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환자에게 차갑게 대해야 겠다고 생각하는 의사는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위 글은 내 이야기가 아니다. 나카야마 유지로라는 일본의 외과 의사가 쓴 "의사의 속마음"이라는 책에 있는 글이다.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라고 한다. 의사의 속마음이 어떨까 궁금한 것은 전 세계 사람들 모두 마찬가지일 것이다. 책에는 이외에도 "의사 선생님들은 왜 그렇게 빨리 말하고 어렵게 말하는지" 등 의사에 대한 환자들의 불편함에 대하여 의사로서의 솔직한 고백을 담고 있다. 책의 저자는 의사가 그렇게 차갑게 느껴지게 된 원인으로 2가지를 꼽았다.
첫째 이유는 의사의 근무 시간이 매우 빠듯한 스케줄로 되어 있어서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둘째 이유는 외래 진료로 너무 많은 환자를 본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을 상대하다 보면 시간에도 쫓기고 지치게 마련이다. 일본이나 다른 외국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사정이 더 좋지 않다. 흔히 외국에서 진료를 받아 본 분들은 외국과 우리나라랑 너무 다르다고 말한다. 외국의 경우 한 명의 환자를 보는데 20분 내지 30 분 정도쯤 쓰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미국의 경우 의사 한 명이 하루에 보는 인원은 20명 정도이고 한 명의 환자당 15분에서 20분 정도 걸린다고 한다. 그러므로 환자 한 명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할 수 있다. 물론 그만큼 긴 시간의 상담에는 많은 비용이 따른다. 심지어는 미국의 경우 전화를 통한 의료 상담에조차 시간별 비용이 청구된다. 사회 보험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의료 이용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대신 의사와 한번 만나기가 어렵다고 들었다. 영국에서 산전 진료를 받다 출산을 위해 우리 병원으로 온 어떤 산모는 임신 3개월이 되어서야 처음 산부인과 전문의를 만났다고 한다. 호주에서 살다 오신 어떤 분은 아예 임신 전 기간과 출산 때 산부인과 의사를 만나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알기는 어렵다. 그 점에서는 의사의 속마음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책으로 펴내어 속마음을 알려줌으로써 어느 정도 서로 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책이나 다른 매체를 이용한 속마음의 전달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서로 간의 오해에 의해 생기는 편견도 일정 부분은 이해하고 감수하는 수밖에 없다. 한 이불을 덮고 사는 부부 간에도 오해나 갈등이 적지 않은 터에 어쩌다 가끔 만나는 의사야 오죽하겠는가? 오해나 편견은 어쩔 수 없지만 좋은 쪽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나의 속마음이다.
[뭔가 답례를 하고 싶어서 작은 과자를 드리려고 하니 "이런 것은 필요 없어요. 제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라고 하네요.
"그래도 직원들과 함께 드세요" 하고 내미니 "아, 그럼." 라며 조금 웃으며 받아 주었다.
오오! 웃고 있었어!
아~ 이 기분.
홍대에 위치한 산부인과 추천합니다.]
내 인터넷 상의 별명은 무뚝뚝 대마왕이다. 위 글은 전에 어떤 산모께서 올리신 출산 후기의 내용 중 일부이다. 얼마나 웃지 않는 사람이면 작은 미소에 그렇게 반응할 정도인지 스스로 놀라울 따름이다. 무뚝뚝하다는 것이 자랑은 아니지만 트레이드 마크처럼 되고 보니 이제는 그저 덤덤하고 별 생각이 들지도 않는다. 진오비 산부인과라는 이름으로 재개원하고 첫 출산한 산모의 후기 글에도 그런 내용이 있었던 기억이 떠올라 오래전 썼던 홈페이지의 글을 찾아보았다.
[내가 이곳 동교동에서 개원한 것은 2005년으로 벌써 15년이나 지났지만 중간에 잠깐 분만을 안 하다가 2012년 11월 7일에 진오비 산부인과라는 이름으로 다시 출산 산모를 돕기 시작했으니 벌써 8년 가까이 된다. 진오비 산부인과 분만실을 오픈해서 불과 1주일밖에 지나지 않아 어수선한 가운데 일본 국적인 우 OO 님께서 진오비 산부인과 첫 출산의 테이프를 끊었다. 원래는 예정일이 더 빠른 다른 산모께서 첫 출산이 될 것이라 다들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분은 아쉽게 일등을 놓치고 우 OO 님이 첫 출산을 하게 되었다. 별달리 까탈스럽지 않은 순한 산모라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아무래도 일본인이다 보니 말이 잘 통하지 않아 대화를 많이 나누지는 못했다. 원래 내가 무뚝뚝하고 살갑지 못한 탓이 더 크지만.
그분이 출산하고 몇 달이 지나서 직원이 알려 주어서 그분의 출산 후기를 보았다. 일본말로 된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것이라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궁금해서 구글 언어 번역기로 돌렸더니 어설프지만 한국말로 번역이 되어 내용은 대충 알 수 있었다. 전반적으로 좋게 보아주시고 주변에도 추천까지 해 주시는 내용이라 감사한 마음이었지만 그 마음을 전달할 방법은 없었다. 올리신 출산 후기 글을 보면서 일본도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을 느꼈다. 일본에서는 산모들이 출산 후에 와카메 스프라고 부르는 미역국은 먹지 않는 모양인지 병원에서 나오는 미역국은 억지로 먹었다고 적혀 있었다. 그런 점에서는 산후 산모의 회복이나 아기에게 필요한 성분이 많은 미역국의 효능을 아는 우리 선조가 더 지혜로운 듯싶다. 그리고 글 중간에 병원에서 준 산모 가방과 담요, 기저귀에 감사하면서 "꽃다발과 축하 케이크는 아무래도 그 무뚝뚝한 선생님이 제안한 것 같다."라는 문장이 눈에 띄었다. 그렇게 내가 무뚝뚝한 것은 일본에까지도 소문이 날 듯 싶다. 그때 낳은 아기는 이미 훌쩍 커서 이젠 초등학교 들어갈 나이가 되었을 텐데 엄마처럼 순한 아이가 되었지 않았을까 싶다.]
화가들마다 그림의 소재로 삼는 대상이 다르다. 좋아하는 색도 다르다. 그림이 주는 분위기나 스타일도 천차만별이다. 그중에 베르나르 뷔페가 그린 그림들은 상당히 냉소적인 분위를 풍기는 것이 많다. 검은색의 강렬한 선, 예리하고 각이 진 모습의 사람들, 파랑이나 차가운 계열의 색조 등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나타난 효과일 것이다. 특히 여기 올린 생선 장수라는 그림은 전쟁 직후의 암울하던 시절에 그려서인지 거의 흑백으로만 이루어졌다. 죽은 생선은 말할 것도 없고 살아 있는 생선 장수에게도 어떠한 생기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뷔페의 작품은 보면 볼수록 우울한 느낌이 들고 삭막한 기분이 된다.
“예술은 가볍지 않다. 즐기고 싶으면 루브르가 아니라 서커스를 보러 가라”는 그의 말에서 보다시피 뷔페는 다른 사람이 그의 작품을 보면서 즐겁고 행복한 마음을 느끼는지 어떤지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뷔페는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 전쟁의 참상 등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까지 어둡고 불우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8000 점이나 되는 많은 작품을 남겨 다작 화가 중의 한 명에 속한다. 때로는 그렇게 살아 남아 많은 작품을 남기면서 활동하는 자체가 삶에 지친 이들에게 위로가 되기도 한다.
얼마 전 세계 과자 전문점에 들어갔더니 정말 여러 가지 종류의 과자가 많았다. 딱히 살만한 것이 없어 돌아 나오려는 데 갑자기 눈에 확 띄는 과자가 있었다. "무뚝뚝 감자칩"이라는 이름의 과자였다. 반가운 마음에 한 봉지 사 가지고 와서 먹어 보았는데 밍밍하니 맛이 없었다. 역시 무뚝뚝은 의사든 과자든 별로다. 내로남불로 욕먹겠지만 나는 사람은 상냥한 것이 좋고 과자는 달콤한 것이 낫다. 그러나 내 얼굴은 흐뭇하지 않고 말투는 살갑지 못하고 미소는 없다. 그래서 나는 무뚝뚝 대마왕이다.
뷔페는 1997년 파킨슨병을 진단받고 나서 더 이상 작품 활동이 어려워지자 2년 후인 1999년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내게 거만하다 할지 모르지만 이 캔버스를 한번 보세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해 보지 않고는 모르는 거예요."
뷔페가 남긴 말에서 보듯 그는 그림뿐 아니라 인생의 마감에 대하여도 철저히 자기중심적이었다.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삶이란 그에겐 무의미한 시간 낭비였을 것이다. 그런 점 때문에 아마도 뷔페도 사람들에게 무뚝뚝 마왕 정도의 소리는 듣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그로서는 그것이 자신의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의 삶 속에 직접 들어가 보기 전에는 그의 속마음을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의 속마음도 알 수 없다.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이 해 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산모는 의사의 속마음을 정확히 알 수 없다. 의사도 산모의 속마음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알 수 없어도 믿을 수는 있다는 점이다.
"이 길은 위험하니까 저쪽 길로 돌아가십시오."라고 누군가 나에게 메시지를 보낸다면 그 말이 사실인지 증명할 방법이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둘 중 하나다. 그 문자를 믿고 돌아가거나 그 문자를 무시하고 그 길로 그대로 가는 것이다.
종교 철학자 중에는 신의 존재에 대하여 "알기 위해서 나는 믿는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믿기 위해서 먼저 알아야 한다."라고 주장한 사람이 있다. 둘 중 누구의 말이 맞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만 가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