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닭과 게
작가: 이중섭
소장: 제주도 이중섭 미술관

한국 고용정보원에서는 매년 각 직업별 연봉  순위를 발표한다. 2020년에 발표한 자료를 보면  연봉 상위는 기업 고위 임원이 1억 5367만 원으로 1위, 국회의원은 1억 4052만으로 2위,  외과 의사는 1억 2307만 원으로 3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외과라는 이름이 붙은 진료과목은 일반외과, 정형외과, 신경외과, 성형외과, 흉부외과가 있다. 같은 외과라도 흉부외과나 일반외과는 수입도 적고 일도 힘들어 인기가 없다. 외과 의사가 연봉 순위 3위를 차지한 것은 아마도 성형외과 의사의 수입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공부를 월등히 잘하는 한두 명의 우수 학생으로 인해 반 평균이 높아진 것과 비슷한 이치다.
반대로 연봉이 낮은 순으로는 자연 / 문화 해설사가 1078만 원으로 1위, 작년까지 1 위이던 시인이 1209만 원으로 2위,  소설가가 1283만 원으로 3위였다.  화가는 따로 직업으로 분류되지 않은 탓인지 통계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아마도  소설가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소설가나 화가의 수입은 일반 직업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겠지만 그것은 극소수의 사례일 뿐이다.

가난한 화가 하면 외국에서는 평생 그림을 한점 밖에 팔지 못한 화가 고흐가, 국내에서는 종이 살 돈이 없어 담배 은박지에 많은 그림을 남긴 화가 이중섭이 꼽힌다. 이중섭은 아는 시인의 시집 출판 기념회에 가서  방명록에 그림으로 대신 축하금을 냈다고 한다. 축의금을 낼 돈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재능 기부와 같은 것이다. 그렇게 돈 대신 자신이 가진 기술로 대신할 수 있는 건 장점 중 하나다.  산부인과 의사는 돈이 없다고 돈 대신 "출산하는 거 도와드리겠습니다"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질에 이상이 없는지 내진 한번 그냥 해 드겠습니다"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여하튼 그때 이중섭 화가가 방명록에 남긴 그림은 "닭과 게"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게를 그린 이유는 배고프던 시절 게를 많이 잡아먹어서 미안해서 그랬다고 한다. 이중섭의 그림이 대체로 그렇듯 닭과 게도 어린아이들이 그린 것처럼 소박한 필치일 뿐 아니라 화풍도 순박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이중섭은 20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 수업을 받았다.  태평양 전쟁 때  아내와 아들들과 함께 귀국하였다가 6.25 전쟁이 일어나자 가족을 모두 일본으로 보냈다. 그 후 혼자 국내에 머물면서 소와 같은 향토적인 주제나 가족과의 사랑과 이별을 주제로 한 작품을 주로 남겼다. 경제적으로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 혼자 고독 속에 살다가 가족과는 만나서 함께 살지 못하고 41세의 나이에 간질환과 정신병으로 적십자 병원에서 혼자 생을 마감했다.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죽기 1년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전시회를 열었지만 대중의 관심을 얻지는 못했다고 한다.  죽기 전까지 그를 괴롭힌 것은 가난과 고독이었다.

나는 가난한 의사다.
가난한 의사라니? 의사라면 다 외제차 타고 좋은 집에 살고 휴일이면 골프 치러 가거나 해외여행을 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가난한 의사란  둥글둥글한 네모나 차갑지 않은 얼음처럼 허황된 말장난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연봉 상위 직업군에 성형외과 의사나 피부과 의사 등이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대체로 의사라는 직업과 가난은 그리 어울리지는 않는다.  어떤 말이 서로 맞지 않을 때 형용 모순이라고 한다. 형용 모순은 영어로 oxymoron이라고 하는데 고대 그리스어에서  oxy는  예리한(keen)을 의미하며 moron은 저능아(fool)를 의미한다고 한다. 결국 ‘똑똑한 바보’라는 뜻이다.
2019.05 한국 표준 과학연구원의 극한연구팀은 초고압 환경을 구현해 상온에서도 얼음을 만드는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고 한다. 고압으로 물을 짓누르게 되면 저온 상태에서처럼  물분자의 진동을 줄여  얼음이 만들어진다는 논문을 과학 잡지에 발표했다. 물론 이때 필요한 압력은  대기압의 1만 배인 1기가 파스칼의 초고압이라고 하니 쉬운 것은 아니다. 상용화까지 가려면 아직 많은 연구가 뒤따라야 한다고 하지만  온도에 구애받지 않고  얼음의 크기나 모양을 마음대로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결국 차갑지 않은 얼음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가난한 의사라고 이상할 것이 없다.

내가 가난한 의사가 되기까지 무슨 주식 투자를 하거나 망한 사업을 벌이는 등 뭐 대단히 잘못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의과 대학에 들어갈 때는 경제적인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나 보나 기대했는데  어쩌다 보니 가난한 의사가 되고 말았다.  특별히 게으르게 살지는 않았고 나름대로 산부인과 의사로서 최선을 다하면서 살았는데 모아 놓은 돈은 없고 대신 수억 원의 빚만 쌓였다. 의료 분쟁으로 배상해 준 비용, 병원을 옮기면서 인테리어에 든 비용, 동업을 했다 헤어지면서 들어간 비용, 분만이 적어서 생긴 경영 손실 등 여러 이유로 빚이 생겼다.  죽기 전까지 빚을 다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갚는데 짧은 시간 내에 갚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가난하다고 해서 마음까지 가난해지고 싶지는 않아서 자존심을 지키면서 살려고 한다. 그런 자존심 중에 하나가 밤에 응급으로 와서 잠깐 진찰을 받고 가는 산모의 경우 진찰비를 받지 않는 일이다. 나는 특별히 입원한 산모의 입원비를 할인해 주거나 분만 비용을 안 받는 일은 없다. 그러나 야간 응급 진료 시의 진찰 비용은 받지 않는다. 이 점은 개업하고 나서 얼만 안된 시점부터 지금까지 거의 30년째 유지하고 있는 방침이다. 그런 행동에 대하여 직원들은 밤에는 오히려 응급 진료를 하니 비용을 더 받아야 하는데 왜 받지 않고 그냥 가시도록 하는지 불만이 많다. 내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개업하고 나서 일 년인가 이년인가 되었을 때 겪었던 일 때문이다.

어느 날 예정일이 다된 산모가 밤 12시가 조금 넘어서 진통으로 병원을 방문하였다. 진찰을 하여 보니 너무 늦게 와서 아기 머리가 거의 산도 아래까지 내려온 상황이었다. 허겁지겁 준비를 하여 다행히 아기와 산모 모두 별 탈 없이 출산을 할 수 있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진통이 있었던 시간은 꽤 되었는데  밤 12시 전에 입원하면 하루치 입원료가 더 들어갈 것도 같고 혹시 병원에 갔다가 아직 입원할 때가 안되어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 상황이 될까 봐 진통을  참았다가 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돈을 아끼려고 그랬다는 것이다. 그 산모를 보면서 돈이 없어서 위험한 지경에 빠지는 경우 모두를 내가 구할 수 없고 그럴 능력도 없지만 최소한 한밤중에 응급으로 우리 병원을 오는 산모가 돈 때문에 급한 진료도 못 받는 일은 없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밤에 응급으로 오는 진찰 산모는 돈을 받지 않으니 필요하면 언제든 올 수 있도록 하는 취지로 그렇게 해 오고 있다. 물론 이런 내용을 직원들에게는 언제 한번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 산모들은 잘 모른다. 요즘은 그런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경우는 많지 않기도 하고 설명하는 것도 번거로워서 하지 않는다. 그저 오래전 내가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니 지키고 싶은 것뿐이라 계속해 오는 것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입원비가 싸거나 그렇지는 않다. 나는 우리나라의 현재 출산 관련 비용이 산모들이 감당하기에 너무 부담스럽게 높은 수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출산 관련하여 드는 비용은 미국에 비하여는 1/ 10, 이웃 일본에 비하여는 1/ 3 정도 수준이다.  산부인과를 지원하는 의사가 적은 것은 일의 고됨도 고됨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이유 때문이다. 수입이 적어서 산부인과 의사가 점점 줄어드는 상황은 빨리 벗어났으면 좋겠다. 이삼십 년 전에 비하여 지금은  야간 진찰 비용이 비싸서 밤에 병원을 마음 놓고 가지 못할 정도로 경제 형편이 어려운 산모도 많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굳이 야간 진찰비를 받지 않는 것은 큰 효과는 없겠지만 나 자신과의 약속, 초심을 잃지 말자는 의미로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의사든 산모든 환자든 그 외 어떤 사람이든 가난하다는 것은 죄는 아니다. 따라서 벌을 받을 일도 아니다. 그러나 가난하다는 것은  불편한 상황이며 종종 가족에게 미안한 일이다. 십수 년 전 병원 경영이 어려워 유치원 다니는 막내딸의 피아노 학원을 끊었을 때 딸이 "아빠, 나중에 아빠 돈 벌면 나 피아노 학원 다시 다닐 수 있는 거지?" 하는 말은 잊히지 않는다.  병원을 이전 개원할 때는 인테리어와 장비 값을 아끼기 위해 살림집 거실에 있던 큰 TV를 병원 로비에 가져다 두기로 했다. 그때 TV를 내주지 않으려고 붙들고 울던 아이의 눈물도 아직 잊지 못했다. 가난은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부모의 자식으로서 참으로 미안한 일이다.
어떤 분은 자신이 돈을 벌어 큰  건물을 짓게 되면  한 칸은 내게 무상으로 임대해 주겠다고 한다. 또 어떤 분들은 우리 병원에서 낳은 산모들끼리 마을 이루고  함께 살게 되면 마을 가운데에는 내가 진료를 할 수 있도록 병원을 만들어 주겠다는 말도 한다. 모두 실현 가능성은 희박한 일이지만 정말 감사한 일이다. 그분들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  가난하지 않고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의 여유를 가질 정도의 돈을 벌었으면 좋겠다. 내가 출산을 도운 아기들이 모두 건강하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과 같은 마음으로 기원을 한다.

중학교 때 프랑스 소설가 모파상의 단편소설 "목걸이"를 읽었다. 그때 읽을 때는 별로 재미없게 읽었던 소설인데 요즘에 와서야 소설 속 주인공의 마음이 전해져서 가슴이 아려올 때가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도 잊었고 줄거리도 오래되어 가물가물하지만  큰 줄기는 잊지 않았다. 소설의 주인공인 아내는 어느 날  부자들이 모이는 무도회에 초대받아 가게 된다. 초라한 행색으로 가는 것이 싫어 친구에게 비싼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빌려 걸고 참석을 했다. 그러나 어쩌다가 목걸이를 잃어버리고 나서 주인공은 할 수 없이 집을 팔고 빚을 내서 똑같은 목걸이를 사서 친구에게 돌려준다. 물론 잃어버리고 다시 산 것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주인공 부부는 온갖 힘든 일을 하면서 10년 만에 빚을 갚는다. 주인공은 예전에 목걸이를 빌려준 친구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그때 자신이 빌렸던 목걸이는 값싼 모조품 다아아몬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결국 가짜 목걸이로 인해 진 빚을 갚느라  자신의 소중한 인생 10년을 허망하게 잃어버렸다는 이야기다.

사람이 살도록 하는 동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물론 아무런 삶의 목적이 없이 그저 죽지 못해 하루하루 산다는 사람도 있다. 그런 무기력한 인생을 사는 사람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삶을 살아가는 목적이 있다.  모파상 소설의 주인공은 그것이 목걸이로 인한 빚을 갚는 일이었고 영화 미션에 나오는 신부는 미개한 사람들을 전도하는 일이다.  임신부들은 건강한 아기를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목적이다. 나에게서 삶을 이끄는 동인은 과연 무엇일까?  그 동인이 무엇이든 가난이 삶의 목표와 철학을 바꾸게 하지 않기를 소망하면서 오늘도 산다. 산모들이 임신 전기 간 동안의 여러  불편함과 출산 당시의 심한 진통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아기를 출산하고자 하는 목적을 바꾸지 않고 그 모든 것을 견디고 극복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그래서 내게는 산모들이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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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다시한번 감사합니다!!  등록시간 2022-09-18 00:54
감사해요. 원장님. 14년 6월 어느밤 가진통으로 찾아가서 진료받던날. 원장님께서 역시 진료비를 받지않고 어서가시라고 했던 그날밤.. 왜 그러신지 전혀 이유를 알지 못했는데..ㅎㅎ 그냥 감사하기만 했는데.  등록시간 2022-09-18 00:54
감사해요. 원장님. 14년 6월 어느밤 가진통으로 찾아가서 진료받던날. 원장님께서 역시 진료비를 받지않고 어서가시라고 했던 그날밤.. 왜 그러신지 전혀 이유를 알지 못했는데..ㅎㅎ 그냥 감사하기만 했는데.  등록시간 2022-09-18 00:54
글까지 감사해요 원장님~~  등록시간 2020-11-09 16:59
바쁜 일상 중 원장님 글 몇줄 읽다 돌아가곤 하는데 티비랑 피아노학원이야기는 처음 눈에 들어왔어요 ㅠ 가난이 목표를 바꾸지 않도록 하는것. 삶에 치여 본래마음이 바래지않는것...출산전후나 지금도 여전히 좋은  등록시간 2020-11-09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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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희 [2022-09-18 00:52]  googyya [2021-03-14 07:43]  한유림 [2021-03-12 19:19]  참된딸 [2021-03-05 15:39]  pikachu [2020-12-18 10:32]  happybud19 [2020-11-09 16:55]  daphne [2020-10-15 05:05]  Lily [2020-10-12 15:49]  griets [2020-10-10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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