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중에 특이하지 않은 화가는 한명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이 화가도 이름 만큼이나 특별한 인상을 주는 화가입니다.
고흐처럼 정신 병원의 신세를 지기도 했고 어린 시절에 어머니와 누이가 결핵으로 사망하는 등 불우하게 보냈지만 그 정도야 뭐 특이하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일테고 그의 그림이 풍기는 당혹감 때문에 보통은 뭉크를 기이하고 괴짜인 화가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이 주는 당혹은 피카소처럼 쉽게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워서 오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 그의 그림에 공통으로 흐르는 어떤 호소 같은 것이 있는 데 그 호소가 언뜻 보면 우리에게 그리 친숙한 종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관심있게 그의 그림을 살펴 보면 그가 주로 검은색과 빨간색을 즐겨 사용하였다는 점, 인물화 그중에서도 특히 인물의 표정을 강조하여 그렸다는 사실, 그리고 그의 그림 자체가 다소 비정상적인 구도를 가졌다는 세가지 점 때문에 그러한 호소력을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그림에는 유난히 검은 색과 채도가 높지 않아서 칙칙한 빨간 색의 사용을 통한 대비를 강조한 부분이 많은데  검은 색이 죽음을 의미하고 빨간 색이 피 또는 생명을 의미한다고 하는 일반적 관념에 비추어 볼 때 그림을 통하여 그가 어린 시절부터 주시해 온 것은 삶의 일부로서의 죽음 또는 그 반대로 죽음을 잉태하고 있는 삶이라고 하는 주제일 것입니다.
이것은 "병실에서의 죽음"이라든지 또는 "병든 아이"나 "마라의 죽음" 아니면 "생의 춤", "죽음의 방"," 죽은 어머니" 같은 그의 작품의 제목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검은색과 빨간색은 죽음과 삶이라는 주제 이외에 더불어 또 다른 느낌을 전해 주는 데 특히 빨간 색이 던져 주는 그것은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그리고 그런 느낌은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의 표정에서 다시 한번 확인이 되는 데 그의 그림에서 인물들은 드물게 미소 짓는 얼굴 표정이 없지 않지만 하나같이 일그러진 표정이거나 놀라는 표정이고 괜찮은 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그나마 무뚝뚝한 표정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가 그린 거의 대부분의 그림이 인물화이거나  인물화가 아니더라도 인물이 주이고 배경은 그림의 분위기를 살리거나 무언가 부연 설명을 하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으로 매우 간략화 되어 있거나 형체를 잘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그의 그림에서는 사람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거나 여러 사람일 경우 한쪽으로 몰려 있거나 배경의 선이 사람의 목을 지나지 않게 찍는다라는 사진가에게는 기본적인 기준 사항 중의 하나 조차도 지켜지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그가 구도에 있어서 그러한 단순한 기본 원리를 몰라서는 아닐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아마도 구도의 헝클어짐을 통하여 막연한 불안과 또는 일종의 부조화를 부각시키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프랑스의 소설가 스땅달이 군인과 사제의 복장 색깔인 적색과 흑색을 암시하는 제목을 붙인 "적과 흑"이라는 소설에서 신분 상승을 꿈꾸는 젊은이의 모습을 통하여 당시 사회와 정치의 모순과 부조리를 고발하고 싶어 했듯이 뭉크는 적과 흑의 대비를 통하여, 또 두려움에 휩싸인 인물의 표정을 통하여 그리고 구도의 불균형을 통하여 죽음을 안에 끌어 안고 있는 삶이라는 것의 모순과 불합리에 대하여 말하고 싶어 했을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말하고 싶어한 진짜 속마음은 죽음과 불안이나 두려움이기 보다 아마 희망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표현한 대상의 모습은 두려워 하는 얼굴이고 질투라는 고통에 찬 모습이고 병든 자의 모습이고 죽은 자의 모습이지만 우리가 공포를 얻기 위해 공포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포로부터 벗어 나기 위해 공포 영화를 보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그도 유년 시절부터 괴롭힌 불안과 두려움을 정통으로 마주 보고 극복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두려움이나 극심한 불안의 순간에 터져 나오는 비명으로 하여 사람들은 어느 정도 공포에 대비하고 적응하는 것처럼 그의 대표작인 "절규"에서 처럼 그런 호소로 인하여 두려움은 극복할 수 있는 대상이 되거나 최소한 마주 대면할 수 있는 만만한 것으로 내려 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일관되게 죽음이라든가 병이나 불안과 같은 주제를 끌어 안고 있었던 것은  궁극적으로 삶이란 죽음을 안에 품은 불안하고 두려운 것이지만 또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희망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이야기해 주기 위한 것 같습니다.

그의 그림을 한참 들여다 보면 그저 기괴하고 공포스럽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딘지 따스한 느낌, 부드러운 느낌이 함께 묻어 나오게 되는 것은 그 안에 희망이라는 따스한 봄볕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뭉크는 절망과 두려움에만 쌓여 지낸 자로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수명인 81 세 까지 살았습니다.

아래에 보는 그림은 그가 남긴 몇 점의 자화상들인데 바로 아래의 것이  그의 그림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고 맨 아래의 것이 실제 모습에 가장 근접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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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hero8 [2013-10-23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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