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화가의 신혼
작가: 프레데릭 레이턴
소장: 미국 보스턴 미술관

중학교 때 미술 선생님의 조언을 진지하게 들었다면 어쩌면 지금 의사가 아니라 화가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내와 나 사이에 아이는 셋을 두었다. 셋 중 둘은 미대에 입학했다. 여동생의 두 딸도 모두 미대를 나왔다. 남동생의 두 딸은 미대가 희망 사항 중의 하나였으나 다른 분야로 갔다. 그러고 보면 우리 집안의 유전자에 미술가의 피가 흐르는지도 모를 일이다. 조선 후기의 화가 심사정이 직계 조상인가 생각한 적도 있다.

물론 나야 재능도 별로 없었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감수해야 하는 편이라고 들어서 미대 쪽은 감히 선택하지 못했고 편한 길을 가고 싶은 소시민적 욕심으로 의사가 되고 말았다. 의과 대학 때는 잠시 미술 동아리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때 그린 그림은 지금은 어디 있는지 찾을 길이 없고 아마추어로서 그린 작은 그림 두 개가 병원 한쪽 벽에 걸려 있다. 미술에 대하여는 못 이룬 첫사랑처럼 아련한 아쉬움이 남아서 지금도 서점에 가면 미술 서적 코너는 반드시 들르는 편이다.

음악과는 다르게 미술은 진품을 직접 보거나 진품에 가까운 작품을 감상하는 기회가 거의 없다.  미술관 나들이를 갈만한 정성도 없어서 그저 책에 실린 그림을 감상하고 그림과 얽힌 이야기를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산다. 얼마 전 레스카페라는 분이 쓰신 글을 재미있게 읽었다. 찾아보니 책도 내셨다고 해서 오래된 책이라 중고 서점에 가서 구입했다. 책 이름은 "처음 만나는 그림"이었다. 내가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은 화가의 신혼이라는 그림에 대한 설명이었다. 프레데릭 레이턴이라는 화가였는데 내가 미술에 조예가 깊지 않아 처음 듣는 화가였다. 그런데 책의 첫 부분에서 그 화가를 다루고 있었다. 화가의 신혼이라는 작품의 설명도 거의 첫 부분에 올라 있었다. 대다수의 그림 소개 관련 책들은 고흐든 렘브란트든 유명 작가를 책의 첫머리에 두는 경우가 많은 것에 비하면 의외였다. 사람도 첫인상이 중요하듯 책도 보통 첫 부분에 시선이 많이 가기 때문에  저자라면 특히 첫 부분에 신경을 많이 쓴다. 그렇게 해서 본 화가의 신혼이라는 그림은 왼손으로는 사랑하는 아내의 손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모습을 담았다. 화가로서 그림을 그리는 순간은 무엇보다 소중한 순간일 텐데도 그 순간조차 사랑하는 아내의 손을 놓기 싫은 마음이 그림에 담긴 따사로운 햇살과 함께 내게도 전해졌다. 설명을 보니 화가 자신을 모델로 한 그림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프레데릭 레이턴은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고 한다. 혼자 살면서 외로운 마음을 아내와 함께 행복한 순간을 보내는 상상의 그림으로 달래려 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게 신혼 시절은 한 사람의 인생에서 아마도 가장 달콤한 시절일 것이다.

그러나 허니문 베이비와 허니문 방광염은 신혼 기간에 종종 보는 현상이지만 달콤하기만 하지는 않다.  신혼여행에서 첫 성관계를 가지면서 질의 균이 방광에 들어가서 방광염이 생기는 것이 허니문 방광염이다. 방광염은 약으로 쉽게 치료되는 것이니 그다지 고민이 아니겠지만 허니문 베이비는 계획한 것이 아니라면 당황스럽게 마련이다. 인생에서 가장 달콤한 신혼을 임신으로 바로 치환해 버리게 되는 꼴이니 말이다. 그래서 피임을 위해서 혹은  생리 주기를 조정하기 위해서 신혼여행 때 피임약을 먹는 경우가 많다. 내 개인적인 견해를 묻는다면 너무 노산인 경우만 아니라면 최소 몇 달간의 신혼 기간을 즐기는 것을 권하고 싶다.  임신은 임신대로 설레고 기대하는 것들이 있지만 새로운 사람을 배우자로 만나서 함께 사는 신혼 기간도 나중의 추억을 위해서나 두 사람의 정서적 교감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나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주말 부부야 그렇지 않지만 일반적인 부부의 경우라면 결혼 후 1년의 기간 이내에 임신할 확률은 85%다. 정상적인 부부 생활을 하는 사람이 피임을 하지 않을 경우 임신될 확률은 1개월 이내가 25%, 6개월 이내가 70%, 그리고 1년 내가 85% 정도다. 1년 내에 임신이 되지 않는 경우를 난임이라고 한다. 임신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나서 사는 신혼과는 또 다른 세계다. 세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이니 당연히 같을 수가 없다. 10달 후에는 출산을 통해 두 사람의 유전자를 정확히 반반씩 물려받은 아기가 태어난다. 아기의 아빠가 더 힘이 세다고 더 많은 유전자를 받거나 엄마가 더 아름답다고 엄마의 유전자가 더 많은 것이 아니고 세상 사람 모두 정확히 반반씩이다.  

임신과 관련한 언급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성경의 창세기 3장 16절이다.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라는 문장이다.  이어진 17절은 남편인 아담에 대한 것이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라는 문장이다.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의 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는 바람에  아담은 평생 노동의 수고를, 이브는 출산의 고통을 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노동이나 출산이 무언가의 벌이라고 하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노동이 없는 삶이나 출산이 없는 삶이 반드시 행복한 삶이 아니라는 것은 그리 짧지 않은 동안의 삶의 경험으로 이미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에는 땀이라는 수고가 따르지만 건강과 함께 먹을거리를 준다. 임신은 불편하고 출산은 두렵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 순간을 이겨내고 건너온 사람에게는 소중한 한 생명이 남는다. 그 과정을 통해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관계가 사랑과 동지애로 더욱 공고해지기도 한다. 임신 출산의 순간을 함께 보내면서 신혼 때의 뜨거운 열기와는 다른 종류의 뜨거운 무엇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임신 출산은 두려움과 불편도 있지만 동시에 기쁨이고 행복이다. 임신과 출산이 신이 인간에게 준 벌이 아니라 선물이라는 사실을 산부인과를 택하게 되어 많은 산모를 보면서 깨닫는다. 그러나 노동은 지금은 남녀 구분 없이 할 수 있지만 임신과 출산은 여성만이 겪는다는 점에서 특별한 점이 있다. 또한 여성은 임신과 더불어 육아의 대부분을 혼자서 감당해야 하니 쉽지 않은 일이다. 행복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힘든 순간이기도 하다. 따라서 기쁜 것은 더해서 늘리고 힘든 것은 함께 해서 나눈다는 철학이 부부간에 이때만큼 필요한 적이 없다.

신혼의 부부에게 누가 먼저 고백했냐고, 혹은 누가 더 사랑하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자기가 먼저 고백했다고 말하고 자기가 더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결혼한 지 10년 이상된 부부에게 누가 먼저 고백을 하였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부부가 상대방이 먼저 고백을 해서 자기가 마지못해 구원해 주었다고 말한다. 이상한 현상이다. 신혼일 때 비하여 과연 뭐가 달라지기에 이렇게 기억도  달라지는 것일까? 흔히 사랑의 호르몬이 부리는 마법 같은 효과는 3년이 유효 기간이라고 한다. 그 약효가 떨어지면서 콩깍지와 함께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의 마음도 사라져 버리는 것일까? 상대방이 자신을 좋아하고 쫓아다녀서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말을 하도 여러 사람이 말해서 이제는 밑지고 판다는 장사꾼 이야기처럼  다들 그러려니 하면서 산다. 기억은 견고한 것이 아니라 세월이 지나면서 재편되기도 하니 진실은 어차피  알 수가 없다. 어떤 것이 진실이든 사랑해서 결혼한 신혼 시절과 막 임신해서 첫아기를 낳을 무렵과 한 10년 또는 20년 이상 산 부부의 애정의 밀도가 똑같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런 점 때문에 스캇 펙 박사는 "가지 않은 길"이라는 책에서 부부가 오래 해로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이렇게 안내하였다.
"젊을 때의 뜨거운 열정과 사랑이 시간이 흘러 사그라져 갈 때 그대로 사그라져 없어지도록 두지 않고 그것이 따스하고 잔잔한 애착 관계로 연결되도록 두 사람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라고 말이다.

나의 경우는 거짓말을 보태지 않고 정말 아내가 나를 더 좋아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내는 나와 생각이 다를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내를 처음 만났던 것은 의과대학 4학년에 다닐 때였다.  내 친구의 여자 친구의 친구가 지금의 아내다.  우리 둘이 처음 만났을 때 둘 다 아마 비호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첫눈에 반해서 빠졌다고 할 상태도 아니었다. 며칠이 지난 후 내 친구가 하는 말이 얼마 전 만난 여자가 나를 한번 더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다시 한번 4명이 만남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보고 싶어 한다고 해서 만나러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의 친구와 아내의 친구의 농간에 의해 속아서 만남이 이어지고 결국 어쩌다 보니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우리 부부에게 누가 더 적극적으로 대시하고 고백해서 결혼하게 된 것이냐고 하면 나는 아내가 적극적으로 만나고 싶다고 해서 그리 되었다고 하고 아내는 그 반대로 말하곤 한다. 그러면 이쯤에서 나올만한 질문.

"그렇게 속아서 결혼했으니 지금은 후회하니 아니면 잘했다고 생각하니?"
"글쎄. 아내는 다시 태어나면 나랑 안 산다는데 잘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고....."
"그럼 후회한다는 것이니?"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솔직하게 말해봐."
"아내가 혹시 이 글을 볼 지도 모르는데....."
"괜찮아. 네 부인은 네 글은 재미가 없어서 절대 안 본다며."
"뭐 그렇긴 하지."
"그러니까."
"결혼을 안 하고 살았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간혹 한 적이 있어."
"그러니까 결혼한 것을 후회하는 거네."
"그런데  결혼을 했다면 지금 아내가 그나마 나에게는 최선이었다고 생각해. 마음씨가 착해."
"그래? 이쁜 건 아니고 마음씨가 착하다?"
"이쁜 거야 젊을 때는 누구다 다 이쁘지. 안 이쁜 사람이 어디 있겠어?"
"맞아. 마음씨가 착한 게 중요하지."
"그래서  내가 아내와 사귀던 무렵 어머니께서 그 아가씨 어디가 좋디? 하고 물어보셨을 때 내가 한 대답이 그거였어. 마음씨가 착한 것 같다고."  

이 글들은 원래 임신부들에게 임신 출산 관련한 유용한 정보도 주고 그동안 진료하면서 겪은 재미난 에피소드도 곁들여 볼 생각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쓰다 보니 정보라고는 그저 다 알려진 것들이라 인터넷을 조금만 뒤지면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인터넷으로는 알기 어려운 정보들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내가 전해 줄 수 있는 것은 정말 하찮은 양이다. 남자 의사인 나로서는 직접 겪어보지도 못한 임신과 출산이라고 하는 것은 바다처럼 무한히 넓은 미지의 세계다. 그 속에서 내가 전해 준 지식과 경험이라고 해 봐야 좁쌀 한 톨에 불과하다. 그 좁쌀 한 톨이라도 전해 주는 것이 아예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쓰면서 몰랐던 것도 알게 되고 잊고 있던 옛일이 생각나서 실소를 짓기도 하였다. 앞으로 내가 얼마나 더 출산을 돕는 의사로 살지는 모르겠다. 지금까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30여 년쯤 되는 기간을 산부인과 의사로 살았다. 산부인과 의사로 아니 의사로서 내가 적당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자책은 지금도 항상 하고 있다.  산부인과를 평생의 직업으로 택한 것을 후회하는 날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옷장을 열어 본다. 옷을 입으려고 해서가 아니라 옷장의 안쪽에 글씨가 수 놓인 천을 보기 위해서다.  신영복 님이 쓰신 "처음처럼"이라는 글이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다시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부부가 신혼의 마음을 떠올리는 것처럼  의과 대학에 들어갔을 때의 그 처음 마음을 조금이라도 떠올려 볼까 해서 아침에 로션을 바를 때마다 본다. 물론 처음의 그 순수하고 열정적인 것을 되살려 오지는 못한다. 그래도 보다 보면 내가 하고 싶어 했던 것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후회의 마음은 조금 줄여 주고 감사의 마음은  조금 늘려 준다.

고통스러우면서 행복한 일. 두려우면서 즐거운 일.
여성에게 임신과 출산이 그렇듯이 산부인과 의사로 사는 내 삶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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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보아야 예쁘다. 자세히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등록시간 2021-03-28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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