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자화상
작가: 장 미셀 바스키아
소장: 스페인 바르셀로나 현대 미술관  

밤 11시.

해부학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해부학 교과서인 "그레이 아나토미" 책을 덮어 가방에 담는다. 동아리 선배에게 빌린 두개골이 가방을 꽉 채워 책이 들어갈 공간이 비좁아 간신히 욱여넣는다. 도서관에는 아직도 몇몇의 친구들이 남아 있다. 후문으로 난 길은 가로등이 몇 개 없는 데다가 오늘은 달이 없는 밤이라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꺼지기 직전의 촛불이 순간적으로 밝게 타오르듯 교정의 이곳저곳에 핀 라일락 나무는 오늘따라 향기가 더 진하다. 기다리는 버스는 오지 않고 검은 얼굴을 한 피곤이 저쪽에서 천천히 다가온다. 늦은 시간이라 다행히 버스에는 빈자리가 많다. 피곤과 조우한 몸을 의자에 깊숙이 묻는다. 가장 안전하다는 운전기사 뒤 2번째 자리다. 집까지 가려면 앞으로 50여분. 낮에 분류한 핵심 정리 노트를 꺼내어 다만 몇 개라도 뼈 구멍을 외워두어야겠다. 두개골에  걸려 노트가  잘 나오지 않는다. 힘을 주어 잡아 빼려는 찰나 버스가 갑자기 정류장에서 서면서 가방이 엎어졌다. 간신히 버티던 두개골은 갇혀 있던 고양이가 문틈으로 도망치듯 뛰쳐나와 바닥에 떨어진다. 허리를 굽혀 급히 주으려는데 버스가 출발하면서 뒤로 굴러가 버리고 말았다. 단단해서 부서질 염려야 없지만 뒤쪽에 타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두개골 쪽으로 쏠렸다. 인체를 학교 밖으로 가지고 나가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지만 그보다 사람들이 놀랄 것이 걱정이다. 급히 일어나 허겁지겁 쫓아가니 맨 뒤 자리에 앉으신 중년의 아저씨가 두개골을 바닥에서 집어서 나에게 건네어 주신다. "아주 진짜 같이 잘 만들었네."  "감사합니다."  다행히 모조품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진짜 두개골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아마 이런 훈훈한 풍경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얼른 자리로 돌아와 먼지를 닦고 두개골을 조심해서 가방에 담는다. 버스는 이제 막 동대문을 지나고 있다.  이 이야기는 내 이야기인지 다른 친구의 이야기인지 밝히진 않겠다. 어쩌면 소설일 수도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처음 겪는 것들이 많다. 첫 등교, 첫사랑, 첫 경험, 첫 임신 등등. 그리고 기억도 못하지만 처음 일어서던 날도 있을 것이고 처음 걷던 날, 처음 울던 날도 있고 처음 웃던 날도 있다. 내게도 그런 첫 경험들이 있다. 그런 첫 경험 중에 잊지 못하는 하나는 30년 전 의과대학을 들어가서 처음 맞이한 해부학 실습이다. 처음으로 사람의 죽은 몸을 보았고 만져 보았다.  해부학은 인체의 골격 구조, 근육의 시작과 끝, 정맥과 동맥 등 혈관, 신경의 경로 등 우리 몸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도 기본인 특징들을 배우는 학문이다.  사람의 몸에 200개도 넘도록 많은 뼈가 있고 또 그만큼이나 많은 각종 크기의 구멍들이 있다는 것도 그때 배운다.  끔찍하게도 많은 뼈와 구멍 모두에 거의 전부 이름이 붙어 있다. 이름이 붙어 있다는 의미는 외우고 기억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 많은 것들을 외우느라 시험 며칠 전부터는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공부해야 하는 것이 의과대학생들의 현실이다.  그렇게 많은 이름들을 굳이 외워야 하는 이유는 지금도 모르겠다. 저 하늘에 숱하게 많은 별들이 있고 각각 이름이 있지만 그 이름 모두를 우리가 알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물론 천문학자들은 좀 더 많은 이름을 알기는 하겠지만 아마 그들도 몇십 개 정도의 이름만 기억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내 추측이다.  나는 특히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그 이름들을 외우는 것이 정말 힘들었다. 그런 머리를 물려준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기억력이 나쁘면 외모라도 멋지게 낳아주던가. 그래도 끈덕진 지구력 하나 제대로 물려받아서 의사가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해부학은  많은 뼈와 구멍, 근육과 혈관들로도 우리를 힘들게 했지만 또 다른 것 때문에 학생들을 힘들게 했다. 바로 실제 사람의 시신을 놓고 하는 실습이 그것이다. 나도 그때 처음 사람의 시신을 봤지만 아마 다른 친구들도 비슷했을 것이다. 시신을 처음 본 느낌이 어땠는지는 너무 오래되어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공포감이나 두려움은 아니었다. 밝은 실습실에 나를 포함한 많은 학생들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실습을 잘 마무리하고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아마도 섬세한 감정을 무디게 했을지 모른다.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방부제인 포르말린의 지독한 냄새는 덤이다. 포르말린은 머리를 지끈거리게 하고 눈도 따갑게 했는데 그것도 감정을 메마르게 하는데 일조했을 것이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허망하다는 생각, 인생무상 같은 느낌이었던 것 같다. 벌거벗은 몸에 반쯤은 흰 포가 덮인 채 차가운 스테인리스 해부대 위에 누워 있는 시신이 얼마 전까지 피가 돌고 숨을 쉬던 사람이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의사로서의 사명감 혹은 좋은 의사가 되어야겠다는 다짐 같은 것이라도 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는 못했다. 해부학 강의와 실습은 쉽지 않았고  우리들 중 일부는 그 감정들을 극복하고 넘어서지 못해서 내가 입학하던 해에 160명의 입학생 중 10% 정도 되는 학생들이 이 실습을 기점으로 중퇴를 하거나 전과를 했다.  그래서 이렇게 해부 실습 과정을 끝내지 못하고 중도 탈락하는 현상을  라일락이 피는 시기인 점을 감안해  라일락 신드롬이라고 불렀다.

전에 자화상을 그린 화가들에 대한 글을 몇 편 써서 홈페이지에 올린 적이 있다. 그때 글을 쓰면서 자화상을 그린 화가들의 특징에 대하여 조금은 알게 되었다. 화가들이 자화상을 그린다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다.  우선 자화상은 다른 정물화나 풍경화와는 다른 점이 몇 가지 있다.

언제든 그릴 수 있다.
똑같이 못 그려도 항의할 사람이 없다
모델료가 들지 않고 물감과 화구만 있으면 되니 경제적이다.
세상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대상에 대한 그림이다.

특히 마지막 이유가 화가들이 자화상을 남기는 주된 이유가 아닐까 추측한다. 자화상을 그린다는 것은 작가 들이나 철학자들이 고백록을 쓰는 것과 비슷하다. 살아온 인생의 흔적이 깃든 얼굴을 포함하여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보다 강렬한 표현 방법은 없다. 자화상을 가장 많이 남긴 화가는 렘브란트이고 물감을 아주 살짝 발라서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가장 비싼 자화상을 남긴 화가는 고흐다. 그리고  검은 피카소라고 불리는 바스키아도 자화상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자신의 모습을 담은 그림 혹은 낙서를 많이 남겼다.  자화상을 그리려면 우선 가장 먼저 자신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봐야 한다. 당연한 것이지만 외모에 관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거울을 보는 시간이 많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뚜렷이 들여다보는 것은 어느 정도 자신에 대한 긍지 혹은 자기애가 있지 않으면 하기 어려운 일이다. 나는 취미 활동인 데다가 그림을 그린 기간이 오래지 않아 많은 그림을 그려 보지 못했다. 매우 제한된 주제만 그려 보았는데 주로 정물이나 풍경화였다. 그리기 어려워서 인물화는 거의 그려 보지 못했고 자화상은 단 한 번도 그려 보지 못했다. 내 얼굴을 똑바로 오래도록 보는 것이 그리 편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남의 얼굴을 보는 것이 불편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진료받는 산모들의 눈도 똑바로 마주치지 않는 무뚝뚝한 의사로 평가받은 지는 오래다. 내가 얼굴을 보는 것은 아침에 면도를 하고 흉터를 가리는 파운데이션을 바르기 위해서 볼 때뿐이다. 아멜리 노통브가 물에 빠진 나이와 같은 세 살 때 밥솥에 엎어져서 데인 흉터는 학창 시절에 일부 성형 수술을 해서 조금은 나아졌다. 물론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아서 지금도 상당히 진한 파운데이션을 해서 감추려고 한다. 내가 무채색의 옷들을 좋아하고 쾌활한 성격이 못된 것은 어릴 때의 사고의 영향이 크다. 어쩌면 의사가 된 것도 그런 사고와 그 이후의 성형 수술의 기억이 작용했을 것이다.

바스키아는 여덟 살 때 거리에서 공을 가지고 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팔도 부러지고 크게 다친다.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동안 심심해할 아들을 위해 그의 어머니는 해부학 책인 그레이 아나토미 책을 사다 준다. 그는  나중에 조직한 밴드의 이름도 그레이였다고 할 정도로 그 책을 아주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그의 그림에 해골이나 뼈 등의 이미지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그때의 영향이라고 평론가들은 생각한다. 그는 부모가 이혼하면서 가출을 일삼고 거리를 떠돌며 부랑아처럼 생활했다. 도발적인 낙서 느낌의 그림을 뉴욕의 담벼락 구석구석에 남겼다. 그의 그림은 죽음을 담은 폭력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어둡고 반항적인 내용이 많다. 진한 선을 써서 그린 것이 많기 때문에  그의  그림은 흑백으로 보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사진가들 중에는 지금도 흑백 필름만 고집하는 사람이 있다. 내가 쓰는 휴대폰 중 하나는 화면이 흑백이다. 흑백의 휴대폰으로 그림이나 영상을 보면  화려한 색감의 휴대폰으로 볼 때와는 상당히 다른 느낌을 준다. 물론 대부분의 그림들은 흑백보다 색채가 있을 경우 더 감동을 준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바스키아의 작품을 색채가 있는 것보다 흑백으로 볼 때 더 낫다.  

내게 첫 해부학 실습은 두려움도 있었지만 무언지 모를 기대도 있었다. 처음으로 사람의 시신을 본다는 점이 두렵기도 했지만 의사로서 다른 사람은 쉬이 볼 수 없는 것을 본다는 모종의 긍지 같은 것도 있었다. 여성에게 첫 출산도 아마 그런 기분이지 않을까 싶다. 나는 첫 생리는 여성으로의 출발이라고 생각한다. 그전까지는 그저 사람이었다면 이제는 여자 사람이다. 여성만이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오는 시작이다. 출산은 여자 사람에서 어머니가 되는 순간이다.  어머니만이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생명까지 대신 줄 수 있는 마음은 다른 경우들에서는 결코 가져 볼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어머니만이 가질 수 있는 마음이다. 물론 어머니들이 꼭 자식들을 위해서 희생하기만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희생을 해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 희생만큼 얻는 것도 크다고 생각한다.  모파상의 소설 중에 "어느 인생" (우리나라에서는 여자의 일생으로 번역되어 나옴)은 잠시의 낭만 뒤에 나머지 평생을 고단하게 살다 간 어느 여인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인생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즐겁기만 한 것도, 그렇다고 그렇게 불행하기만 한 것도 아닌가 봐요."
나는 모파상이 그 소설을 쓰면서 찍은 방점은 뒤에 쓴 문장 "그렇게 불행한 것도 아니다."에 있다고 생각한다. 어릴 때 내가 겪은 사고는 물론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외모에 관심이 많은 학창 시절에 흉이 있는 얼굴은 너무도 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므로 인해 내가 잃은 것도 있지만 얻은 것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오래전처럼 흉터 때문에 죽을 만큼 괴롭지는 않다. 그저 아침에 화장할 때 조금 신경이 쓰이는 정도다. 출산은 흉터를 남긴 사고와는 전혀 다르다. 다만 충격의 강도로는 임신 출산도 어지간한 사고와 맞먹는 강도의 스트레스를 준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출산에 대하여도 나는 희생보다는 희망에,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는 새 생명을 만난다는 두근거림에 방점을 찍으라고 말하고 싶다. 오랜 기간 출산을 돕는 의사로 지내왔지만 임신 출산은 너무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내가 있기까지 어머니와 그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를 포함해서 만 세대의 어머니께서 무사히 잘해 내 오신 일이다. 더군다나 한 손에는 경험을 다른 손에는 지식으로 무장한 가이드가 초록색 가운이라는 갑옷을 입고 옆에서 돕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자신이 할 일은 힘을 내어 건강한 아기를 이 세상으로 데리고 오는 일이다. 피도 조금 날 것이고 통증도 조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피는 나와서는 안 되는 위험한 피가 아니며 일정량까지는 나오는 것이 정상인 피다.  너무 많으면 위험하지만 400cc 정도 안팎의 출혈은 출산 중에 당연히 따르는 출혈이며 위험이 없는 수준이다. 출산 직후 출혈과 생리. 이 두 가지 상황 외에는 어떤 피도 우리 몸에서 나와서는 안된다.  출산 시 겪는 통증도 사람에 따라 달라서 어떤 사람은 크게 어떤 사람은 적게 느끼지만 거의 대부분 문제가 없는 통증이다. 산통으로 인한 통증이 있다고 해서 통증 쇼크가 오거나 하지는 않는다. 누구나 이겨낼 수 있는 통증이라는 의미다.

오래전 해부학 실습 시절에 맡았던 라일락 향기는 요즘도 종종 길을 걸으면서 만나고 그때 맡았던 포르말린 냄새는 조직 검사 시 나오는 검체를 담는 병뚜껑을 열면서 맡고 있다. 그러나 괴로운 기억은 아니다. 내가 산부인과 의사 생활 동안 만났던 많은 임신부들 거의 대부분이 임신과 출산을 고통이자 괴로움으로 기억하기보다 즐거움이자 행복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첫 임신과 첫 출산을 앞두고 있다면 당신도 아마 곧 그렇게 될 것이다.  

글 내용의 첨부 파일을 볼 권한이 없음.

로그인하셔야 첨부파일을 볼 수 있습니다. 아이디가 없으면 회원 가입

x

이 글에 좋아요를 표시한 회원

griets [2020-06-06 23:07]  daphne [2020-04-12 07:10]  

스마트폰 모드|진오비 산부인과

© 2005-2024 gynob clinic

빠른 답글 맨위로 목록으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