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무제 (완벽한 연인들)
작가: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
소장:

동묘 근처에 있던 숭신 초등학교를 다닐 때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만물 시장이 있었다. 황학동 고물 시장이라고도 불렸고 벼룩시장이라고도  불렸다.  지금은 서울 동대문 풍물 시장이라고 부른다. 이 시장은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특히 연세가 드신 분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지금은 너무 흔한 것들이라 신기할 것도 없지만 카메라며 카세트, 라디오, 시계 같은 당시로서는 쉽게 보기 어려운 것들도 많아서 하교하는 길에 들르면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얼마 전에  초등학교 시절이 생각나 찾아가 보니 내가 다니던 학교는 없어지고 대신 그 자리는 다솜 직업학교인가 하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바뀐 것은 학교뿐이 아니었다.  학교 옆 고물 시장에서 어릴 때 눈이 휘둥그레져 가면서 보았던 신기하고 가슴 설레던 것들은 없고 아무 쓸모없어 보이는 낡은 고물들만이 있었다. 그리고 어릴 때 보았을 때는 멋지게 두루마기를 걸친 나이 든 어르신들이 있었던 거리였던 것 같은데 이제는 나와 별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 주름 깊은 노인들이 있었다.  고가의 시계들은 명성에 걸맞지 않게 초라하기만 했다. 보물과 고물은 그리 많이 다르지 않다. 어릴 때는 보물이던 것이 나이가 들어서 보면 고물인 것도 있고 어릴 때는 고물처럼 보이던 것이 나이가 드니 보물인 것도 있다. 물건이나 대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나 사건을 보는 시각이 바뀌어서 그럴 것이다.

아래는 미국의 시인 시어도어 로스케의 "어둠의 시간에"라는 시다.

어두운 시간에 눈이 보이기 시작하고
나는 그늘이 짙어지면서 내 그림자를 만난다.
나는 나무에 울려 퍼지는
자연의 지배자인 나무에서 내 메아리를 듣는다.
나는 왜가리와 굴뚝새 사이,
언덕의 야수와 굴의 뱀 사이에 산다.

참고로 여기서 왜가리는 현명하고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새를 의미하고 굴뚝새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수수하고 어두운 갈색 깃털을 가진 새를 의미한다. 언덕의 야수는 높은 곳에 있지만 잔인한 동물이라는 의미이고 굴의 뱀은 악한 존재이다.
나는  시에 대하여도 잘 모르기 때문에 이 시가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는 모른다. 다만 어두워지면 눈이 보인다라는 말이나 그림자 속의 그림자 등의 시어는 아마도 영혼의 눈을 뜨고 보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는 정도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또한 왜가리와 굴뚝새 사이처럼 산다는 것은 비범함과 평범함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의사의 삶도 비슷하다. 많은 돈을 벌어 큰 병원 건물을 올렸지만 주변의 환자들로부터 도둑놈 소리를 듣는 의사도 있고 전세방에 살면서 슈바이처 같이 환자를 위한 봉사의 삶을 사는 의사도 있다. 나는 그 둘 사이 어디쯤엔가 산다. 얼마 전 KBS 다큐 공감이라는 방송에 "어느 분만 의사의 1년"이라는 제목으로 내가 사는 모습이 나간 적이 있다. 좀 궁상맞은 내용이었는데 그때 마침 차고 있던 시계가 롤렉스 잠수부용 시계였다. 그것을 본 시청자 중에서 명품 시계를 찬 것을 보니 궁상떠는 모습은 쇼가 아니냐고  댓글을 단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 시계는 내 동생이 중국 근무를 마치고 국내로 들어오면서 사온 롤렉스 짝퉁 시계였다. A급이라 10만 원 정도 주고 샀다고 들었다. 짝퉁이기는 했지만 외관은 감쪽같이 똑같아 보였다. 그런데  어느 날 시계를 차고 세수를 했더니 습기가 차서 유리가 뿌옇게 되었다.  사실 동생이 짝퉁이라고는 했지만 진품이라고 하면 비싸다고 내가 거절할까 봐 혹시 진품을 짝퉁이라고 말한 것은 아닐까 하고 혼자 생각했었다. 그러나 생활 방수도 안 되는 잠수부용 시계가 진품 일리는 없어서 그때 확실히 가짜라는 것을 알았다.

위 시를 쓴 시어도어 로스케는 "나이가 드는 것은 납으로 된 옷을 입는 것과 같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정말 그런 말을 했는지는 원전은 찾을 수 없어 알 수가 없다. 누가 했건 나이가 드는 것은 피할 수 없으면서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나도 이제는 얼굴의 주름이 깊고 밤이면 한 번은 깨서 소변을 누러 화장실을 가야 한다. 가난이 그런 것처럼 나이가 드는 것도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만 불편한 일이다. 나이 드는 것 못지않게 임신으로 인한 불편함도 상당히 크다. 얼마 전 임신부 체험 차원의 일환으로 임부 체험복을 입고 활동하는 것을 유튜브로 찍어서 올린 적이 있다. 그때 입었던 옷은 불과 6kg 밖에 되지 않아 정상 체질량의 임신부일 경우 임신 전 기간 동안 늘어나는 12kg에서 16kg의 체중 증가량의 1/ 2에서 1 /3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상당히 불편했다. 잠시 몇 시간 동안 입는 것만으로도 그 불편함이 느껴졌을 정도다. 그러니 임신 10개월간 그런 무거운 무게를 감당해야 하고 더군다나 넘어지면  다치는 아기가 들어있다는 생각까지 더하면 임신부들이 느끼는 부담감은 어머어마할 것이다.

출산을 도우면서 방금 태어난 아기를 산모의 가슴에 안겨 드리면 많은 산모들이 묻는 말은 보통 두 가지 정도다. 손가락 발가락이 다 있느냐 하는 것과 몇 시에 낳았느냐 하는 것이다.  시간이 우리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지금은 휴대폰이 시계의 기능을 떠맡은 탓에 시계는 시간을 보기 위한 목적이기보다는 신분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혹은 장식품의 목적으로 더 많이 쓰인다.  시계가 개인의 물품이 되기 전에는 나라에서 시간을 알려주었다. 조선 시대에는 한 시간마다 종각에서 종을 쳤고 영국에는 빅벤이라고 해서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는 커다란 시계가 있다.  일 년을 365일로 나누고 하루를 24시간으로 쪼개면서 사람들은 좀 더 효율적으로 시간을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산 날이 얼마인지 남은 날이 얼마쯤 일지, 하루 중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고 얼마가 지나면 밤이 오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시간과 우리의 삶은 이제 떼어 놓을 수가 없게 되었다.  산부인과는 사실 시간과의 싸움이다. 어떤 조치가 너무 늦어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성급하게 대처하는 것도 위험하다. 아직 아기가 나오려면 시간이 걸리고 자궁 경부도 숙화 되지 않았는데 서둘러 진통을 유도하면 거의 실패하기 십상이다. 유도분만을 하자고 하면  그저 제왕절개를 하기 전의 통과 의례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유도분만을 하기에 적당치 않음에도 유도 분만을 하기 때문이다. 사실 너무 늦게 조치를 해서 위험한 것은 출혈과 관련된 것이지만 출산과 관련해서는 산모든 의사든 조급 해지는 마음이 생기는 것을 조절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은  어떤 이에게는 나이가 들어 불편해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어떤 이에게는 새로운 생명을 품에 안게 되는 기쁨을 맛보는 일이다.  시간이 흘러가면  어떤 건 고물이 되고 어떤 건 보물이 된다.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는 쿠바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한 미술가다. 그는 길거리의 옥외광고판에 자신의 침실 사진을 보여주거나, 전시공간에 사탕을 쌓아놓는 등 매우 파격적인 전시를 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작품의 제목들에 무제라는 이름을 붙이고 부제를 설정함으로써  열린 결말과 같이 열린 해석을 할 수 있도록 작품 제목을 정한 것이 많다.  곤잘레스의 대표작인  "무제--완벽한 연인들"은  똑같은 모형의 시계에 동시에 건전지를 넣고 함께 전시한 작품이다. 똑같이 맞춰진 시계는 시간이 흐르다가 건전지가 다하면 어느 순간 한쪽의 시계는 멈춘다. 각각 다른 시각에 죽음을 맞이하는 연인들의 상황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 작품은  토레스가 연인이었던 로스가 죽고 나서 그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한다. 멈춘 시계는 다음 전시에  건전지를 갈아 넣으면 똑같이 다시 움직인다. 처음 상태 그대로 영원히 존재한다는 의미다. 그는 순간의 시간과 영원의 시간, 정지와 흐름, 죽음과 삶. 그 모든 것은 사실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다 연결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한 것이 아닐까. 참고로  곤잘레스 토레스는 동성애자이며 그와 그의 연인인 로스 레이콕은 모두 후천성 면역결핍증(AIDS)으로 사망했다. 다음은 곤잘레스가 투병을 하는 로스에게 보냈다고 하는 시다.

시계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요.
그게 우리의 시간이고,
언제나 시간은 우리에게 너그러웠죠.
우리는 승리의 달콤한 맛을 시간에 아로새겨왔습니다.
우리는 특정 공간과 특정 시간에 만나 운명을 정복했어요.
우리는 그 시간의 산물이기에,
때가 되면 마땅히 되갚아야 합니다.
우리는 시간을 함께하도록 맞춰졌답니다.
지금 그리고 또 영원히.
당신을 사랑해요.

몇 년 전 낙태 근절 운동을 했다. 그때 여러 자료들과 사례들을 많이 보았는데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과 비슷하게 미혼모에 대한 차별이 컸다는 통계 자료를 본 적이 있다. 그 운동 전과 그 운동하는 기간 동안 약 10여 년간 미혼모의 진료와 출산을 도왔다. 그들이 출산까지 하게 된 사정은 다양했지만 돈이 없어서 수술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출산한 산모들이 많았다. 프랑스는 저출산에 대한 정책에서 우리나라와는 상당히 다른 길을 걸었다. 프랑스는 동성애나 혹은 법적인 혼인 관계가 아닌 사이에 출산한 아이들에 대하여도 법적 사회적 차별이 거의 없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다. 그럼에도 출산할 수밖에 없었던 미혼모들은 어찌 보면 딱하기도 했고 어찌 보면 무모하기도 했고 어찌 보면 대단한 용기를 가진 사람으로 보였다. 한 여성이 아기를 출산한다는 것, 더군다나 경제적 기반도 충분하지 않고 사회적인 편견도 심한 상태에서 남자 친구의 배려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출산한다는 것. 어쩌면 자신이 키우지도 못해 입양을 보내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출산까지 결심한다는 것은  꼭 바람직한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출산이란 마음이든 몸이든 경제력이든 혹은 원만한 가정이든 여러 준비가 갖추어진 다음에 하는 것이 좋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도 내가 출산을 도운 어떤 미혼 산모가 출산 다음날 내게 한 말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아기를  자신이 직접 키우지도 못하는데 낳게 되어서 마음도 많이 힘들 것 같다는 내 위로에 그녀가 한 대답이었다.
"그래도 나는 낳았잖아요. 비록 엄마인 내가 직접 키워주지 못해 아기에게 많이 미안하지만, 그래도 나는 아기에게 살아볼 기회를 주었으니까 아기한테 조금은 덜 미안해요."
아기를 출산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값진 선물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끔찍한 벌이다. 우리는 모두 열정과 냉정 사이에서 산다. 비록 고난이 있을지라도 삶이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선물인지, 아니면 살아봐야 아무 의미 없는 벌인 세상인지는 오직 자신만이 결정할 수 있다. 어른이든 아이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장애가 있든 없든 마찬가지다.
이 세상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부모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며 자식이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정치가가  결정하는 것도 아니며 종교인이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자기 자신 뿐이다.
모두 자기의 시계가 있다.  나에게는 나의 시간이 흐르는 시계가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의 시간이 흐르는 시계가 있다. 토레스와 로스의 시계는 멈추었지만 나와 당신의 시계는 지금도 재깍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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