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8일.
전자 챠트를 열어 외래 대기 환자를 보니 임신 22주 되신 산모께서 제게 접수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최안나 원장님께 산전 진료를 받으시던 분이셨는데 제게 접수가 되어서 무슨 특별한 점이 있으신가 했습니다.
원래 최원장님께서 보시던 산모분들은 김종석 원장님께서 이어서 보시기로 했는데 그 이유는 제가 워낙 무뚝뚝 하다보니 최원장님의 따스하고 살가운 대응에 익숙하시던 분들이 불편을 느끼시게 될까봐 최원장님께서 보시던 산모분들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최원장님과 진료 스타일이 비슷한 김원장님께서 산전 진료와 분만을 맡기로 내부적으로 정해두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를 물어 보지는 않았고 지금도 모르는데 어쩌면 접수 담당자가 별 생각없이 제게 접수해서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산모께서 제게 접수가 되서 상담을 하게 되면 진료와 관계된 것이 아니라도 사시는 곳, 하시는 일, 남편의 직업 등도 캐물어 진료 챠트에 적어 두고는 합니다.
진료와 관계된 이야기만 하다보면 별달리 길게 할 말이 없기도 하고 또 그런 사적 정보도 알아두면 상호간 소통에 도움이 되고 어색함을 줄이는 것에도 조금 도움이 될까 해서 진오비 산부인과로 재오픈하고부터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산모와 남편분께서는 이대 근처에서 미용실을 하고 계시다고 하더군요.
홈피 글에 보시면 방문기도 올려 놓았는데 아무래도 미용실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상대해 보아서인지 성격도 적극적이고 사교적인 편인 것 같았습니다.
저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아기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조금은 긴장을 하게 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선선히 말도 잘 하시고 해서 성격이 무던하구나 싶었는데 나중에 보니 제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활달한 성격이시더군요.
다만 조금 걱정이 되었던 것은 드물기는 하지만 가끔 원인 모르게 기절할 때가 있다는 점이었는데 만일 출산 진통 중 기절하면 태아가 위험할 수 있어 큰 병원에서의 진찰도 고려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말씀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결국 아시다시피 주욱 진찰을 잘 받으시고 아무탈없이 순산하시게 되서 다행이지만....
진료하는 중간 중간의 이야기는 특별한 것이 없어서 생략하고 단 하나 특기할만한 것이 있다면 예정일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진료 받는 동안 약속했던 대로 운영하시는 이대 헤어커커 점에서 머리를 자르고 왔던 일입니다.
제가 산모나 환자의 매장을 가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조금 뻘쭘하기는 했지만 그동안 홈피에서 글도 자주 남기고 하여 홈피 활성화에 지대한 공헌을 해 주시어 큰 맘 먹고 갔습니다.
반갑게 맞아 주시고 머리도 깔끔하게 잘라 주시어 6개월간 지저분하게 얹고 다녔던 머리가 많이 단출해졌는데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나서 4일인가 뒤에 진통이 있다고 하는 글을 홈페이지에 올리신 것을 보고 연락을 드려 오시라고 했는데 진찰을 해 보니 이미 자궁문이 많이 부드러워지고 40% 가량 열려서 입원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더니 바로 입원하지 않으시고 시간을 뭉기적 거려 너무 태평한 것 아닌가 걱정했는데 그 이유는 산모께서 올린 후기에 잘 나와 있습니다.
사실 분만과 관련해서는 산모나 가족이 너무 걱정하는 것도 해롭지만 너무 태평한 것도 담당 의사로서는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출산은 병이 아니지만 갑자기 돌발적인 상황도 종종 생겨서 위험하기도 해서입니다.
더군다나 종종 기절하신다고 해서 나름대로 속으로 걱정을 많이하고 있던 산모였으니까요.
어찌어찌해서 입원을 하시게 되었는데 입원하시고 나서도 40% 정도 분만이 진행된 산모치고는 너무 팔팔해 보이고 아픈 것도 그리 심해 보이지 않아서 저녁에 입원하셨지만 내일이나 낳게 될 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말씀도 그렇게 드렸는데 밤 11시 30분 쯤인가 배가 많이 아프시다고 하여 내진을 해 보았더니 왠걸 벌써 자궁 문이 거의 다 열린 상태였습니다.
부랴부랴 분만실로 안내해드리고 혈관을 확보하기 위하여 링겔도 연결하고 분만을 준비하면서 초긴장 상태로 진통을 체크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산모는 생글거리면서 분만이 임박한 산모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산부인과 의사로 분만을 도운 것이 이미 20년이 넘었는데 이런 경우는 흔히 보던 경우가 아니라 참 분만하는 산모의 양상은 다양하구나 하는 것을 다시금 느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12시쯤 자궁문이 다 열리고 힘을 주어야 하는 단계가 왔습니다.
잘 참던 산모도 진통 후기의 통증은 심했는지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기가 골반 내로 진입을 하는 것이 확인되고 나서 본격적으로 힘을 주기 시작해서 20여분 지났을까 아기 머리가 질내로 진입하여 이제 출산이 임박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산모가 통증을 못견뎌하면서 소리도 지르고 아기를 빨리 낳게 해 달라고 하면서 더 못참겠다고 하더군요.
어디서 들었는지 (아마 제가 협박용으로 꺼냈던 말이겠지만) 흡입기로 빨리 아기를 빼내달라고 하더군요.
아기가 무슨 물건인가요? 빼내게..ㅋㅋ
그러나 아마도 그만큼 통증이 고통스러워 이것저것 생각하고 따지고 할 경황이 없어서 이겠지요.
많은 산모들을 보면서 진통이란 그렇게 평소의 참을성, 교육의 수준 등등과 아무 관계없이 모든 산모들에게 있어 견디기 쉽지 않은 통증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통증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조금만 참으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힘주지 말랄 때까지 힘을 주시라고 했는데 아마 모르기는 몰라도 제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듯 싶습니다.
그리고 계속 흡입기를 빨리 써달라고 졸라서 제가 옆에 있는 수진씨인가 길주씨인가에게 흡입기를 가져 오라고 시켰습니다.
산모께도 원하는 대로 흡입기를 쓸테니까 함께 힘을 잘 주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흡입 분만은 아기에게 뇌성마비를 초래할 위험, 실패시 바로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점 때문에 꼭 필요한 경우로만 제한하는데 산모께서는 흡입기가 굳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서 쓴다고 말하고 기계도 풀어서 쓰는 척 했지만 사실 쓰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산모도 흡입기를 안 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중에 제게 사기를 당했다고 하시던데 그 며칠 전 진통이 심해 제왕절개 수술을 해 달라고 하던 산모가 있었는데 마취과 선생님을 부르지도 않았으면서 마취과 선생님을 불렀으니 오시는 동안 힘 잘 주어서 낳자고 하면서 결국 자연분만을 했었는데 그 산모께도 같은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기 당했다고..ㅋㅋ
물론 감사의 표시이고 그 말의 진심을 저는 잘 압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기(??)를 쳐 놓고 결국 진통만 오래하다 수술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때는 참 죄송하기도 하고 또 실제로 비난도 심하게 받게 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저로서는 제가 배우고 해야 한다고 들은 데로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렇게라도 순산해 주시는 분들께 제가 오히려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이 어찌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5월 9일 오전 0:23분.
또 한명의 새생명이 태어났습니다.
3.6kg의 건강한 남자 아기였습니다.
산모는 탈진된 모습이기는 했지만 다행히 기절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출산 직후 태반이 떨어져 나오고 나서 출혈이 일반 산모의 두배 이상 많았습니다. ㅠㅠ
옆에서 보던 남편분도 선홍색 피가 태반 그릇에 가득 차는 것을 보고 잔뜩 겁을 먹고 긴장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출산 후 파열된 회음부를 꿰메는 동안 "괜찮아요?" "수혈해야 하는 것 아니예요?" "빨리 큰 병원 가야 하는 것 아니예요?" 하고 걱정이 태산 같아 보였습니다.
물론 출혈이 좀 많았고 산모도 좀 어지러워 했지만 수축제 투여나 자궁 마사지로 조절될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에 너무 걱정하실 것은 없다고 말씀드렸지만 평소 기절의 병력과 빈맥이 있는 산모였기 때문에 저도 아주 걱정이 안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걱정하는 남편을 옆에서 보면서 세상의 모든 남편들이 사랑하는 아내가 자신들의 소중한 아기를 낳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하고 잠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제 개인적 경험으로도 몇년전 그런 사고도 있었기 때문에 어떤 기분일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분만의 순간이 의사로서는 항상 긴장되는 순간이고 다른 분야 같으면 10년만 해도 달인 소리를 듣는데 20년이 넘도록 같은 일을 하면서 아직 달인은 고사하고 수련하면서 처음 분만을 도울 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동안 겪은 여러 상황들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쳐지나가기 때문에 지금도 분만에 임할 때마다 가슴은 떨리고 등에서는 식은 땀이 납니다.
이삼십분 간의 자궁 마사지와 수축제 투여로 다행히 출혈도 조절이 되고 산모도 점점 안정을 찾아 갔습니다.
분만실에 들어가서 츨혈도 조절되고 회음부 봉합이 끝나기까지 대략 1시간 정도의 시간이 다른 때의 1시간보다는 훨씬 길게 느껴졌다는 말씀은 남겨 둡니다.
산모께서 지른 소리나 흡입기를 써달라고 하면서 몸부림친 모습은 잊기로 약속을 해서가 아니라 대개 얼마 지나지 않아 잊어 버립니다.
그러나 아마 두가지는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출산 직후 다량의 출혈이 쏫아져 나오던 순간의 극도의 긴장감과 항상 밝게 웃던 산모의 모습을 보고 기분 좋았던 느낌.
결국 인생은 그 양극단의 감정 사이에 있는 것 같습니다.
산부인과 의사로서의 보람과 시련도 그 사이 어디쯤 있겠지요.
여하튼 순산해 주시고 잘 회복하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온라인 공간의 홈피와 오프라인 공간의 병원 모두를 밝고 명랑한 곳으로 해 주신 점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항상 밝고 맑게 그렇게 세가족이 내내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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