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드 카진스키는 17살에 하버드 대학에 입학해 조기 졸업한 천재였다고 합니다.
잘 나가던 대학교수 자리를 집어 던지고 은둔자로 살면서 17년간 대학과 항공사에 폭탄 테러를 가해 인명을 살상해서 유나바머(Unabomber)로 볼렸습니다.
이 별칭은 FBI가 18년 동안 찾아 헤맨 폭탄 테러범의 수사용 암호명으로 대학(university)과 항공사(airline)에 우편물 폭탄을 보낸다고(bomber)하여 붙인 별칭이라고 하는군요.
FBI의 추적망이 좁혀오자 그는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등의 유력 신문사에 편지를 써서 자신이 쓴 3만5천자 분량의 '산업사회와 그 미래'라는 글을 게재하면 테러를 중단하겠다고 밝혔고 FBI와 신문사의 협력으로 그의 글은 게재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테러를 중단했으며  아래는 그가 기고한 "산업사회와 그 미래"라는 글의 번역본입니다.

서 문
인류에게 있어 산업 혁명과 그 결과는 재앙이었다. 산업 혁명 덕분에 '선진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평균 수명이 대폭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는 불안정해졌고, 삶은 무의미해졌으며, 인간은 비천한 존재로 전락했다. 심리적 고통은 광범위하게 확산되었으며(제3세계의 경우에는 육체적 고통과 함께), 자연은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었다. 앞으로 테크놀로지가 계속 발전할 때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아예 사라져 버릴 것이고, 자연은 더욱 극심하게 파괴될 것이다. 또한 추측컨대 사회적 혼란과 심리적 고통도 훨씬 더 극심해질 것이며, '선진국'에서도 역시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이 크게 늘어날 것이다.
이 산업-테크놀로지 사회 체제는 살아남을 수도 있고 붕괴될 수도 있다. 이 체제가 살아남을 경우, 어쩌면 마침내 육체적, 심리적 고통을 낮은 수준으로 줄일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길고 몹시 고통스러운 적응기를 거친 후의 일일 것이며, 그 과정에서 인류와 수많은 생물들은 기계적 생산 제품 또는 사회라는 기계의 톱니바퀴에 불과한 존재로 격하되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만일 이 체제가 살아남는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체제를 개혁 또는 수정할 수 있는 방법은 없으며, 따라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율성이 박탈당하는 것을 막을 수도 없다.
이 체제가 붕괴될 경우에도 그 결과는 여전히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다. 체제가 거대해질수록 그 붕괴로 인한 결과도 더욱 참혹해진다. 그러니 이 체제가 어차피 붕괴될 것이라면, 그 시기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산업체제에 항거하는 혁명을 주장한다. 이 혁명에선 폭력을 사용할 수도 있고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혁명은 어느날 갑자기 일어날 수도 있고, 수십 년에 걸체 점진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다. 우리가 예견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우리는 산업 체제를 증오하는이들이 체제에 항거하는 혁명의 길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수단들을 아주 개략적인 수준에서 제시할 수는 있다. 이 혁명은 결코 정치적 혁명이 되어서는 안 된다. 혁명의 목표는 정부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 사회의 경제적, 테크놀로지적 토대를 제거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 글에서 우리는 산업기술사회에서 발생되어나온 부정적인 발전들에 대해서만 관심을 둘 것이다. 다른 발전들은 간단히 언급만 하거나 아니면 몽땅 무시한다. 이것은 우리가 그런 발전들을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다. 실용적인 이유때문에 우리는 논의의 범위를 공공의 관심을 충분히 받지못한 부분이나 아니면 새로이 논의되어지는 부분으로 한정시켜야한다. 예를 들면, 잘 발달된 환경과 황무지 개척들 때문에 우리는 지금까지 환경의 저하나 자연의 파괴에 대해서 글을 쓰지 않았다. 심지어 그것들이 매우 중요하다고 여기면서도 그러지 않았다.

현대 좌파주의 심리
우리가 심각한 문제를 지닌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데 대해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우리 세계가 안고 있는 광기 중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드러난 광기가 바로 좌파주의(leftism)다. 좌파주의의 심리를 먼저 검토하는 것은, 현대 사회가 지닌 문제를 개괄하는 데 그것이 길잡이 역할을 해 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대체 좌파주의란 무엇인가? 20세기 전반의 반세기 동안 좌파주의는 사회주의와 동의어로 쓰였다. 오늘날 좌파 운동은 수많은 갈래로 분열되었으며, 과연 누구를 좌파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지도 분명치 않다. 이 선언문에서 우리가 좌파라고 할 때는 주로 사회주의자, 집단주의자, '정치적으로 옳은 부류(politically correct types)', 페미니스트, 게이 운동가, 장애자 운동가, 동물 보호 운동가를 말한다. 하지만 이들 운동 중의 어느 하나와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해서 모두 좌파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좌파주의는 어떤 어떤 운동이나 하나의 심리적 유형으로서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수많은 관련된 운동과 이데올로기들을 모두 포함한 것이다. 우리가 좌파주의를 어떤 뜻으로 사용하는지는 앞으로의 좌파의 심리를 이야기할 때 보다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문단 227~230을 참조하라.)
그래도 여전히 좌파주의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아주 모호한 상태로 남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어떤 해결책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우리가 여기서 시도할 수 있는 일은, 현대 좌파주의를 이끌어 가는 중심적 추진력이라고 생각되는 두 가지 심리적 경향을 대강이나마 밝혀 내는 정도의 일이다. 물론 우리가 좌파의 심리에 대해 모든 진실을 밝혀 낼 수는 없다. 또한 우리의 논의는 오로지 현대 좌파주의에만 국한된다. 19세기와 20세기 초기의 좌파에 까지 우리의 논의가 적용될 수 있을지는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현대 좌파주의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두가지 심리적 경향을 우리는 '열등감'과 '지나친 사회화'라고 부르겠다. 열등감이 현대 좌파주의 전체에서 발견되는 특성인 데 반해, 지나친 사회화는 현대 좌파주의의 어느 한 분파에서만 발견되는 특성이다. 하지만 그 분파는 대단히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열등감
우리가 '열등감'이라고 할 때 그것은 말그대로의 열등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비하, 무력감, 비관적 성향, 패배주의, 죄의식, 자기 혐오 등과 같이 열등감과 관계 있는 모든 속성을 포괄적으로 뜻하는 것이다. 우리가 볼 때 현대의 좌파들은(억압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런 감정들을 지니고 있으며, 그런 감정들이 현대 좌파주의의 방향을 결정한다.
어떤 사람이 자신(혹은 자신을 동일화하는 집단)에 대해 남들이 무슨 말을 하든 그 대부분을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할 경우, 그 사람은 열등감 또는 자기 비하에 빠져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같은 성향은 소수 집단의 권리 운동가들이 해당 소수 집단에 속해 있느냐의 여부는 별 상관이 없다. 그들은 소수 집단을가리키는 단어들과 소수 집단에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해 과민 반응을 보인다. 아프리카인을 '검둥이(negro)'로, 아시아인을 '동양인(oriental)', 장애인을 '불구(handcapped)', 여자를 '계집(chick)'으로 부르는 것에는 원래 아무런 모욕적인 의미가 담겨 있지 않다. '년(broad)'이나 '계집'은 남자들을 '놈(guy)', '자식(dude)', '녀석(fellow)'으로 부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들 단어들에 부정적인 의미를 불어넣은 것은 바로 운동가들 자신이었다. 일단의 동물 보호 운동가들은 심지어 '애완동물(pet)'이라는 단어를 거부하면서 '동물 동반자(animal companion)'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좌파 인류학자들은 더 나아가 원시인과 관련된 용어들 중에서 무엇이든 부정적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지닌 것은 아예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그들은 이제 '원시인'이라는 단어를 '비문자인'으로 바꾸고 싶어한다. 그들은 원시 문화를 우리의 문화보다 열등한 것으로 비치게 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 거의 공포에 가까운 반응을 보인다. (원시 문화가 우리 문화에 대해 '열등하다'라고 암시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좌파 인류학자들의 과민 반응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옳지 않다'라는 용어에 대해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도시 빈민가의 보통 흑인이나 아시아계 이민, 학대받는 여성, 장애인이 아니라 소수의 운동가들이다. 그들 중 다수는 '억압당하는' 집단에 속해 있지도 않거니와, 오히려 사회의 특권 계층 출신들이다. '정치적으로 옳은' 운동은 안정된 봉급의 직장을 갖고 있는 대학 교수 사이에서 든든한 지지를 얻고 있으며, 그들 대부분은 중상 계층 이상의 가정 출신인 백인 이성애주의자들이다.
많은 좌파는 약함(여성), 패배(아메리카 인디언), 역겨움(동성애자)등의 열등한 이미지를 지닌 집단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동일화한다. 좌파들 자신은 이들 집단을 열등하다고 느끼고 있다. 좌파는 결코 자신들이 그렇게 느끼도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집단의 문제와 자신을 동일화하는 것은 그들이 이들 집단을 열등한 집단으로 보고 있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여성이나 인디언 등이 열등한 집단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좌파의 심리를 지적하려는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힘과 능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입증하려 절망적으로 발버둥치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그들이 여성은 남성만큼 강하지도, 능력을 갖추고 있지도 않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좌파들은 강한 것, 좋은 것, 성공한 것의 이미지를 지닌 것이라면 무엇이든 증오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들은 미국을 증오하고, 서구 문명을 증오하고, 백인 남성을 증오하고, 합리성을 증오한다. 좌파들이 서구를 비롯해 그런 것들을 증오하는 이유와 그들의 진짜 동기는 서로 다르다. 그들은 말한다. 자신들이 서구를 증오하는 이유는 서구가 호전적이며 제국주의적이고 성차별적이며 자민족 중심적이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똑같은 결함들이 사회주의 국가나 원시 문화권에서 나타날 경우, 좌파는 그들을 위한 변명거리를 찾아내고, 아니면 기껏해야 그런 결함이 존재한다는 것을 울며 겨자 먹기로 인정할 뿐이다. 서구 문명에서 그런 결함이 일어날 때는 몸과 마음을 다 바쳐 꼬집어 내면서(때로는 엄청나게 과장까지 해 가면서) 말이다. 그러니 좌파가 미국과 서구를 증오하는 진짜 동기는 그 같은 결함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좌파가 미국과 서구를 증오하는 이유는 바로 미국과 서구가 강하고 성공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감' '자존심' '선도적' '진취적' '낙관주의' 등의 단어들은 진보주의자와 좌파의 사전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좌파는 반() 개인주의적인 친() 집단주의자다. 좌파는 사회가 모든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모든 사람의 욕구를 채워 주고, 모든 사람을 보살펴 주기를 바란다. 그는 자신의 문제를 자신이 해결할 수 있으며 자신의 욕구를 자신이 채울 수 있다는, 내면적 자신감을 갖지 못한 종류의 인간이다. 좌파가 경쟁이라는 개념을 거부하는 것은 그가 마음 속 깊이 스스로를 패배자라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좌파 지식인 사이에서 호응을 얻고 있는 예술 작품들은 흔히 더러움, 패배, 절망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합리적 계산에 의해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으며, 그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순간적인 감각에 자신을 던져버리는 것뿐이라는 식으로 이성적 통제의 가능성을 아예 포기하고 온통 미친 짓거리로 가득 찬 난장판만을 보여줄 뿐이다.
현대의 좌파 철학자들은 이성, 과학, 객관적 현실을 포기하고 모든 것의 문화적 상대성을 주장한다. 물론 누구나 과학적 지식의 토대에 대해, 그리고 도대체 객관적 현실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정의할 것이냐에 대해 심각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좌파 철학자들이 지식의 토대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고자 하는 냉철한 논리학자들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진리와 현실을 공격할 때 그들은 감정적으로 심한 흥분 상태에 빠져 있다. 그들이 이들 개념을 공격하는 것은 자신들의 심리적 욕구 때문이다. 그들의 공격은 그들이 지닌 적대감의 배출구이며, 공격이 성공할 때 그들의 권력 욕망도 충족된다. 더욱이 좌파들은 과학과 합리성을 증오한다. 과학과 합리성에 의해 참된 신념들(즉 성공한 것, 우월한 것)과 거짓 신념(즉 실패한 것, 열등한 것)이 구분되기 때문이다. 좌파의 열등감은 점점 깊어져 어떤 것을 성공한 것이나 우월한 것으로, 그리고 나머지를 실패한 것이나 열등한 것으로 구분하는 것조차도 참을 수 없게 된다. 많은 좌파들이 정신 질환이라는 개념을 거부하고 IQ측정의 유용성을 거부하는 겟에도 역시 그 같은 심리가 저변에 깔려 있다. 좌파들은 인가느이 능력이나 행동을 유전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그런 설명이 어떤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에 비해 우월하게 또는 열등하게 보이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좌파들은 개인의 능력이나 무능력을 사회의 탓으로 돌리는 설명을 선호한다. 따라서 만약 어떤 개인이 '열등'하다면,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의 잘못이다. 사회가 그를 올바르게 양육하지 않은 것이다.
좌파는 열등감 때문에 허풍선이, 이기주의자, 건달 두목, 자화자찬파, 무자비한 경쟁자가 되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 아니다. 그런 유형의 사람은 자신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않는다. 자신에게 별로 힘이 없음을 알고 자부심도 약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에게 강한 자가 될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스스로를 강한 자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그런 불쾌한 행동이 나오는 거이다. 하지만 좌파는 거기에서 한참을 더 나간다. 그의 열등감은 워낙 깊숙이 뿌리박혀 그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강하고 가치 있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여기서 좌파의 집단주의가 생겨난다. 그는 자신을 동일화시킬 수 있는 거대 조직, 또는 대규모 사회 운동의 일원이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이 강하다고 느낄 수 있다.
좌파의 전략이 지닌 마조히즘적 성향에 주목하라. 좌파들은 자동차 앞에 드러누움으로써 저항하는가 하면, 자신들을 학대하도록 경찰이나 인종 차별주의자를 일부러 자극한다. 그런 전략이 때로는 효과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좌파는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그저 그것이 '좋아서' 그런 마조히즘적 전략을 사용한다. 자기 증오는 좌파의 속성 중 하나일 뿐이다.
좌파들은 자신들의 운동이 동정심 또는 윤리적 원칙이라는 동기에 의해 촉발되었다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나치게 사회화된 자퐈의 운동에서 윤리적 원칙이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동정심과 윤리적 원칙은 결코 좌파 운동의 중심 동기가 아니다. 좌파의 행동에서는 호전성이 너무나 뚜렷이 드러난다. 권력 욕망 역시 그렇다. 더 나아가 좌파의 행동에서 상당 부분은, 좌파들이 도우려 한다는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합리적으로 계산된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흑인들의 차별 해소(affirmative) 운동이 흑인을 위해 좋은 것이라고 믿는다면, 호전적이고 교조적인 용어들을 사용하면서 운동을 선동하는 것은 무슨 자가당착인가? 차별 해소 운동이 성과를 거두려면, 그 운동이 자신들을 역차별하고 있다고 느끼는 백인들로부터 그저 빈말로라도, 또 상징적으로나마 양보를 얻어낼 수 있도록 좀더 외교적이고 타협적인 접근 방법을 취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좌파 운동가들은 그런 접근 방법을 취하지 않는다. 그런 접근 방법으로는 자신들의 감정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진정한 목표는 흑인을 돕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인종 문제는 좌파가 자신들의 적대감과 좌절된 권력 욕구를 표출하기 위한 좋은 핑계거리를 제공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좌파는 실제로는 오히려 흑인들에게 피해를 입힌다. 운동가들이 다수 백인에 대해 보이는 적대적 태도로 인해 인종간의 증오가 증폭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 사회에 문제가 전혀 없다면, 좌파들은 분쟁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핑계거리를 얻기 위해 문제들을 발명해 낼 것이다.
강조하지만, 앞에서 한 설명이 좌파로 간주될 수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결코 아니다. 다만 좌파주의의 일반적 성향이 그렇다는 것을 개괄적으로 지적한 것일 뿐이다.

지나친 사회화
심리학자들이 '사회화'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그것은 어린이들로 하여금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훈련시키는 과정을 뜻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속한 사회으 윤리 체계를 신뢰하고 거기에 복종하면서 사회의 기능적인 부분으로서 잘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그 사람이 제대로 사회화되었다고 말한다. 흔히 사람들은 좌파를 반항아라고 인식한다. 그런데 많은 좌파들이 지나치게 사회화되었다니,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고 할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얼마든지 입증할 수 있는 사실이다. 많은 좌파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반항아들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윤리 체계는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며, 그에 따라 완벽하게 윤리적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아무도 증오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거의 모든 사람이, 스스로 인정하건 않건 간에, 때때로 누군가를 증오한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 심하게 사회화된 나머지, 자신들에게 지워진 무거운 윤리라는 짐더미에 허덕이면서 윤리적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죄책감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끝없이 자신의 진짜 동기에 대해 스스로를 속여야하며, 실제로는 비윤리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감정과 행동을 윤리적으로 설명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지나치게 사회화된'이라는 말은 그런 사람들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다.
지나친 사회화는 자기 비하, 무력감, 패배주의, 죄의식 등을 유발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어린이를 사회화할 때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어린이가 사회의 기대에 맞지 않는 언어나 행동을 보일 때 창피를 주는 것이다. 이것이 도를 지나칠 경우, 또는 어떤 어린이가 특별히 수치심에 예민한 성격을 지니고 있을 경우, 그 어린이는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하게 되어 버린다. 게다가 지나치게 사회화된 사람은 항상 사회의 기대를 의식하기 때문에, 생각하고 행동하는 데 있어서 가볍게 사회화된 사람들보다 훨씬 심한 제약을 받는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못된 행동을 밥먹듯이 저지른다. 거짓말, 좀도둑질, 교통 법규 위반, 직장에서의 태만, 타인에 대한 증오, 악담, 남을 앞지르기위한 교묘한 속임수... 지나치게 사회화된 사람은 그런 행동을 할 수가 없다. 설령 어쩌다 그런 행동을 저지른다 해도, 이번엔 스스로 만들어 낸 수치심과 자기 증오에 빠지게 된다. 지나치게 사회화된 사람은 기존의 윤리에 어긋나는 것을 현실에서가 아니라 단지 생각과 감정으로 경험하는 경우에조차 죄책감에 빠진다. 그는 '더러운'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윤리가 사회화의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비윤리적인 갖가지 행동들에 대해서도 순응하도록 사회화된다. 결국 지나치게 사회화된 사람은 끝까지 윤리라는 심리적 쇠사슬을 벗어날 수 없으며, 사회가 그에게 제시한 윤리적 삶을 따라 살면서 평생을 보낸다. 지나치게 사회화된 사람들 대부분은 그 결과, 구속감과 무력감이라는 심각한 고통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우리는 지나친 사회화야 말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가한 그 어떤 잔혹 행위보다 더 무서운 잔혹 행위라고 생각한다.
현대 좌파 중에서 대단히 중요하고 큰 영향력을 지닌 한 분파가 지나치게 사회화되어 있으며, 그들의 지나친 사회화에 의해 현대 좌파주의의 방향이 결정된다고 우리는 주장한다. 지나치게 사회화된 좌파들은 흔히 지식인이거나 아니면 중상 계층 출신들이다. 대학 지식인들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고도로 사회화된 분파를 구성함과 아울러 대부분의 좌익세력을 이루고 있음을 주목하라.
지나치게 사회화된 좌파는 자신의 심리적 구속감을 벗어 던지려 애쓰며, 저항을 통해 자신의 자율성을 내세우려 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그는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에 저항할만한 힘을 갖고 있지 않다. 간단히 말해, 현대 좌파의 목표는 기존 윤리와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다. 오히려 좌파는 기존의 윤리적 원칙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수용한 다음, 주류 사회가 그 원칙을 위반한다고 비난한다. 인종 평등, 성 평등,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것,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 비폭력 운동, 언론 자유, 동물에 대한 사랑 등이 그런 윤리적 원칙들이다. 보다 근본적인 원칙으로는 사회에 봉사하는 개인의 의무와 개인을 보호하는 사회의 의무도 있다. 이 모든 원칙들은 우리 사회에서(아니면 적어도 중류 이상의 계층 사이에서) 오랫동안 깊게 뿌리내려 온 가치들이다. 주류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와 교육 시스템에 의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자료들 대부분에는 그런 가치들이 명시적으로 표현되어 있거나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좌파, 특히 지나치게 사회화된 좌파들은 그 원칙들에 대해 저항하지 않는다. 대신에 사회가 그 원칙들을 지키지 않는다고(어느 정도는 진실이다) 주장함으로써 사회에 대한 자신들의 적대감을 정당화할 뿐이다.
지나치게 사회화된 좌파가 사회에 저항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거기에 집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를 하나 들어보자. 많은 좌파들이 흑인들의 차별 해소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닌다. 흑인에게 보다 높은 지위의 직업을 주려고, 흑인 학교에서의 교육의 질을 높이고, 흑인 학교에 대한 지원금을 늘리려고 노력한다. 이 때 좌파들은 흑인들의 '최하층' 삶을 사회적 수치로 간주한다. 좌파들은 흑인 남성을 사회 체제속에 통합시키기를 원하고, 흑인 남성을 중상층 백인들과 똑같이 기업체 중역, 변호사, 과학자로 만들고 싶어한다. 좌파들은 반박할 것이다. 흑인 남성을 백인 남성의 복사판으로 만드는 것은 결코 자신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아프리카계 미국 문화를 보존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아프리카계 미국 문화를 보존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흑인 스타일의 음식을 먹고, 흑인 스타일의 음악을 듣고, 흑인 스타일의 옷을 입고, 흑인 스타일의 교회나 모스크에 가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다른 말로 하자면, 아프리카계 미국 문화는 오로지 피상적인 사안들 내에서만 표현될 수 있다. 대부분의 지나치게 사회화된 좌파들은 모든 핵심적인 부분에서 흑인 남성이 백인 중상층의 이상을 따르도록 만들고 싶어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흑인 남성이 기술 분야를 공부해서 중역이나 과학자가 되고 평생을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오르며 살아가게 하고, 그럼으로써 흑인들도 백인만큼 똑똑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흑인 아버지를 '책임감 있는 아버지'로 만들고 싶어하며, 흑인 갱단을 비폭력주의자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바로 산업-테크놀로지 체제의 가치들이다. 체제는 사람이 어떤 음악을 듣는지, 어떤 옷을 입는지, 어떤 종교를 믿는지에 관해서는 일체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 사람이 학교를 다니고, 존경할 만한 직업을 갖고 있으며,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오르고, '책임감있는' 부모이며, 비폭력주의자인 한에 있어서는 말이다. 지나치게 사회화된 좌파는, 그 자신은 격렬히 부인하겠지만, 흑인 남성을 체제에 통합시키고 싶어하며, 흑인 남성으로 하여금 체제의 가치를 수용하도록 만들고 싶어한다.
우리는 지나치게 사회화된 좌파까지를 포함해서 좌파들이 우리 사회의 근본적 가치들에 대해 절대로 저항하지 않는다고는 주장하지 않는다. 분명히 그들도 때로는 저항한다. 일부의 지나치게 사회화된 좌파는 심지어 물리적 폭력을 사용함으로써 현대 사회의 가장 중요한 원칙들에 저항하기도 한다.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그들에게 있어 폭력은 '해방'의 한 형태다. 말을 바꾸면, 폭력을 저지름으로써 자신들에게 내재화된 심리적 구속을 깨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사회화된 탓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훤씬 심하게 그런 심리적 구속에 얽매여 있다. 거기서 그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그들의 욕구가 생겨난다. 그런데 좌파들은 흔히 지배적 가치를 담고 있는 용어들을 이용해 자신들의 저항을 정당화한다. 가령 폭력을 행사할 경우, 그들은 인종 차별주의 같은 것들에 저항해 싸우고 있노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엉성한 스케치 수준에서 시도한 좌파의 심리에 관한 설명에 많은 반론의 여지가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실제의 상황은 매우 복합적이며, 그것을 완벽하게 설명하려면, 설령 필요한 자료를 다 구할 수 있다고 해도, 몇권의 책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다만 현대 좌파주의의 심리 안에 두 가지 매우 중요한 성향이 자리잡고 있음을 극히 개략적이나마 지적하려 했을 뿐이다.
좌파의 문제는 우리 사회 전체가 지니 문제를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다. 자기 비하, 비관적 성향, 패배주의는 좌파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좌파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눈에 띈다는 것뿐이지, 문제는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그리고 오늘날의 사회는 이전의 어느 사회보다 더 극심하게 우리를 사회화시키고 있다. 심지어 우리는 먹고 운동하고 성교하고 애를 키우는 따위의 문제에서까지 전문가들의 지시에 따르고 있다.

권력 과정
인간은 우리가 앞으로 '권력과정'이라 부르게 될 어떤 것에 대한 욕구(아마 생물학적 욕구일 것이다.)를 갖고 있다. 이 욕구는 (널리 알려진 대로) 권력 욕구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과 동일한 욕구는 아니다. 권력 과정은 네 개의 구성 요소로 이루어진다. 그 중에서 뚜렷이 구분할 수 있는 세 구성 요소를 우리는 목표, 노력, 그리고 목표 달성이라고 부른다. (모든 사람에겐 노력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 목표가 필요하다. 그리고 최소한 목표의 일부라도 달성하는 데 성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네 번째 요소는 정확히 규정하기도 어렵고, 또한 모든 사람에게 필수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그것을 자율성이라고 부르며, 그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거론할 것이다.(문단 42~44)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사람은 권력을 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점차 심각한 심리적 문제들을 키워가게 될 것이다. 처음에야 모든 것이 신나겠지만, 그것도 잠깐, 그는 급속히 권태에 빠지고 타락해 간다. 그러다 마침내는 임상적 우울증에 빠지게 될 것이다. 역사는 유한()귀족들이 대체적으로 퇴폐주의자가 되어 버리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전투적 귀족들에겐 물론 그것이 해당되지 않는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해야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는 안정된 유한 귀족들은 권력을 쥐고 있어도 대개 권태에 빠지고, 쾌락에 탐닉하다가 결국 타락해 버린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권력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사람에겐 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목표가 필수적인 것이다.
누구나 목표를 지니고 있다. 다른 목표가 전혀 없다 해도, 음식과 물, 그리고 기후에 따라 필요한 옷과 주거지 등 생활을 위한 필수품을 구한다는 목표는 남아 있다. 그런데 유한 귀족은 이런 것들을 아무런 노력없이 획득한다. 거기에서 그의 권태와 타락이 생겨난다.
중요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때, 만약 그 목표가 생활 필수품이었다면 그 실패의 결과는 죽음이다.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어도 살아남을 수는 있다면, 그 결과는 좌절이다. 평생을 계속해서 목표 달성에 실패할 때, 그 결과는 패배주의, 자기 비하, 우울증이다.
따라서 심각한 심리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며느 인간은 노력을 쏟아야만 달성할 수 있는 목표들이 필요하며, 그 목표들을 상당한 정도까지 성공적으로 달성할 수 있어야 한다.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들
하지만 모든 유한 귀족이 권태와 타락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한 예로 일본 왕 히로히토는 퇴폐적인 쾌락주의에 빠지는 대신, 해양 생물학 연구에 전념했고 그 분야에서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신체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자신을 내던질 필요가 없을 때 사람들은 흔히 자신을 위한 인위적 목표를 세운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했던 것과 똑같은 에너지를 쏟아 가며 자신의 전부를 바쳐 목표 달성을 추구한다. 그런 식으로 로마 제국의 귀족들은 문학에 열정을 쏟았고, 몇 세기 전의 유럽 귀족들은 고기에 대한 욕구가 전혀 없었음에도 사냥에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부었던 것이다. 어떤 귀족들은 정교한 방싣으로 부를 과시함으로써 신분 경쟁을 계속했다. 그리고 히로히토 같은 소수의 귀족들은 과학으로 눈을 돌리기도 했다.
우리가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이라고 할 때, 그것은 사람들이 단순히 어떤 지행할 목표를 갖기 위해, 아니면 그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충족감'을 얻기 위해 만들어 낸 인위적 목표를 지향하는 활동을 뜻한다. 과연 어떤 활동이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인지를 알아보는 간단한 기준은 다음과 같다. 'X'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데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모두 쏟아 붓는 사람이 있다고 치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생각해 보자. 만약 그 사람이 대부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자신의 생물학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바쳐야만 했다면, 그리고 그런 생물학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그가 자신의 신체적, 정신적 능력을 여러 가지 다양하고 흥미로운 방법으로 활용하는 것이 필요했다면, 그 사람은 목표 X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에 심각한 박탈감을 느끼겠는가? 만약 그 대답이 아니오라면, 그 때 목표 X를 추구하는 것은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이 된다. 히로히토의 해양 생물학 연구는 분명히 하나의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이 된다. 히로히토가 생필품을 얻기 위해 비과학적 일에 모두 시간을 바쳤다 해도 그가 그 일에서 재미를 느꼈다면, 그는 자신이 바다 동물의 해부학과 라이프 사이클을 모른다는 이유로 박탈감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임이 틀림없다. 반면에 (예를 들어) 섹스나 사랑을 추구하는 것은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성 상대자와의 성적 관계를 전혀 가지지 않고 평생을 보내야 한다면, 설령 그 문제만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 해도, 여전히 박탈감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정도를 넘어서 과도하게 섹스를 추구하는 것은 역시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이 될 수 있다.)
현대의 산업 사회에서 신체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에는 최소한의 노력만 있으면 된다. 일분 간단한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훈력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충분하며, 그 다음에 직업을 계속 가지고 있으려면 그저 제 시간에 출근하고 적당히 열심히 일하면 되는 것이다. 필요 조건은 고작해야 적당한 지능, 그리고 무엇보다도, 단순한 복종심이다. 사회는 그런 조건을 갖춘 사람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살펴 준다. (물론 생활 필수품조차도 보장받지 못하는 최하층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은 주류 사회에 관해서이다.) 그러니 현대 사회가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으로 가득차 있다고 해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여기에는 과학적 연구작업, 스포츠 기록 경쟁, 인도주의 활동, 예술 및 문학 창작, 회사 내에서의 직위 상승, 신체적 필요를 한참 넘어서는 돈과 물질적 재화의 획득, 그리고 소수 유색 인종의 권리를 위해 일하는 백인 운동가처럼 운동가 자신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슈를 떠들어대는 사회 운동이 포함된다. 이런 활동들이 언제나 순수한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으로 머물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단순히 추구해야 할 목표를 확보한다는 욕구 이외의 다른 욕구들이 화롱의 동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고학 연구는 부분적으로 특권 향유를 위한 욕망에 의해 유발될 수도 있고, 예술 창작은 감정을 표현하려는 욕구에 의해서, 민병대식의 사회 운동은 적대감에 의해서 유발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활동을 추구하는 대개의 사람들에게 그 활동은 대부분이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이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아마 자신들의 연구에서 얻어지는 '충족감'이 돈이나 특권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거의는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은 진짜 목표(즉, 권력 과정에 대한 욕구가 이미 채워졌을 경우에도 여전히 달성하기를 원하는 목표)를 추구하는 것에 비해 충족감이 떨어진다.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에 깊이 몰두해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코 만족할 줄을 모르며,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데서도 그 같은 사실은 분명히 드러난다. 그래서 돈에 눈이 먼 사람은 끝없이 더 많은 부를 향해 질주하는 것이다. 과학자는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자마자 곧바로 다음 문제로 달려간다. 장거리 주자는 언제나 보다 멀리, 보다 빨리 달리기 위해 자신을 몰아친다.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생물학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의무로서의' 비즈니스에서 얻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충족감을 그런 활동에서 얻는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사회가 생물학적 욕구를 채우는 데 필요한 노력을 아주 미미한 수준으로 축소했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다. 보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생물학적 욕구를 자율적으로 충족시키지 못하고, 그 대신 거대한 사회적 기계의 부품으로서 기능함으로써 충족시킨다는 사실이다. 정반대로 사람들은 자신의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는 엄청난 자율권을 누리고 있다.

자율성
권력 과정의 한 부분으로서 자율성은 모든 사람에게 필수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대개의 사라들에겐 목표를 향해 일하는데,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자율성이 필요하다. 사람들의 노력은 스스로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하며, 또한 스스로 정한 방향과 통제를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이 같은 주도권과방향 결정권, 통제권을 반드시 행사해야 할 필요는 없다. 대개는 어떤 작은 집단의 구성원으로 행동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따라서 만약 여섯 명의 사람들이 공동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느 데 서로의 노력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킨다면, 권력 과정에 대한 욕구는 채워질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일체의 자율적인 결정권과 주도권을 허용치 않는 엄격한 상부의 명령에 따라 일한다면, 그들이 지닌 권력 과정의 욕구는 채워지지 않는다. 집단적인 결정 방식을 채택할 경우에 그 집단이 너무 커서 각 개인의 역할이 무의미해지는 집단에서도 이와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어떤 개인들은 자율성에 대한 욕구가 별로 없어 보이기도 한다. 권력 욕망이 원래 약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속한 강력한 조직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권력 욕망을 충족시키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한편 오로지 물리적인 권력으로만 만족해 하는 거의 동물 수준의 멍청이들도 있다.(훌륭한 전투 요원이 그런 예인데, 그는 상관에게 맹목저으로 복종하기 위해 전투 기술을 향상시키는데서 자신이 권력을 쥐고 있다는 느낌을 얻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존심과 자신감, 권력을 쥐고 있다는 느낌을 얻게 되는 것은 목표를 설정하고, 자율적인 노력을 기울이며, 목표를 달성하는 권력 과정을 통해서이다. 어떤 사람이 이 권력 과정에 참여할 정당한 기회를 갖지 못했을 때, 그 결과는 (개인에 따라, 그리고 권력 과정이 붕괴되는 방식에 따라 달라지지만) 권태, 타락, 자기 비하, 열등감, 패배주의, 절망, 불안, 죄책감, 좌절, 적대감, 배우자 또는 자녀 학대, 탐욕스러운 쾌락주의, 변태적 성 행동, 불면증, 과식 또는 거식증 등으로 나타난다.

사회 문제의 근원
앞에 열거한 증상들은 어느 사회에서나 생겨날 수 있다. 하지만 현대 산업 사회에서는 그런 증상들이 엄청난 규모로 만연해 있다. 오늘의 세계가 점차 미쳐 가고 있음을 지적한 것은 우리가 처음이 아니다. 이런 일은 인간 사회에서 정상적인 것이 아니다. 원시인이 스트레스와 좌절에서 오는 고통을 적게 겪었으며, 현대인보다 자신의 인생에 더 만족했으리라고 믿는 데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물론 원시 사회라고 해서 모든 것이 편안하고 쾌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호주 원주민 사이에서는 여성 학대가 흔하게 벌어지고 있으며, 일부 아메리카 인디언 부족에서는 성 전환증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앞 문단에서 열거했던 것과 같은 문제들은 분명 현대 사회에서처럼 흔하게 나타나는 문제는 아니었다.
현대 사회의 사회적, 심리적 문제들이 발생하는 이유는, 현대 사회가 지금까지 인휴가 그 안에서 이제껏 진회해 왔던 환경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가도록 사람들에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또 과거의 환경에서 살면서 발전시켜 온 행동 양식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이미 언급했듯이 현대 사회가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온갖 비정상적인 환경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권력 과정에 제대로 참여할 기회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것만이 사회 문제의 유일한 근원은 물론 아니다. 사회 문제의 한 근원으로서의 권력 과정 붕괴를 다루기에 앞서 우리는 몇 가지 다른 근원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현대 산업 사회가 안고 있는 비정상적 환경으로는 과도한 인구 밀도, 자연으로부터의 인간 소외, 자나치게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사회 변동, 대가족이나 마을, 부족 등과 같은 자연스러운 소규모 공동체의 붕괴 등을 들 수 있다.
인구 과밀이 스트레스와 공격서응ㄹ 증가시킨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오늘날의 인구 과밀과 자연으로부터의 인간 소외는 테크놀로지 발전의 결과로 빚어진 현상이다. 산업화 이전의 모든 사회는 전적으로 농업 사회였다. 산업 혁명으로 인해 도시의 규모는 엄청나게 커졌으며, 도시에 사는 인구 역시 엄청나게 늘어났다. 한편 현대적 영농 테크놀로지 덕분에 지구는 이제껏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과밀한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게 해 주었다. (또한 테크놀로지로 인해 인구 과밀의 부정적 효과는 더욱 강화되었는데, 이는 테크놀로지가 사람들의 손에 더욱더 강한 파괴력을 쥐어 주었기 때문이다. 전기 잔디 깎기, 라디오, 오토바이 등등 저 수많은 종류의 소음 발생 장치들을 생각해 보라. 만일 이런 기계들의 사용을 제한하지 않는다면, 형퐈와 고요를 바라는 사람들은 소음으로 인해 좌절에 빠지게 될 것이다. 반면 기계의 사용을 제한한다면, 이번에는 기계를 사용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규제로 인해 좌절에 빠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런 기계들이 아예 발명되지 않았더라면 아무런 갈등도 좌절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원시 사회에는 (아주 서서히 변화할 뿐인) 자연이 안정적인 준거클을 제공해 주었고, 그 결과로 사람들을 안심시킬 수 있었다. 반대로 현대 사회에서는 인간의 사회가 자연을 지배하고 있으며, 테크놀로지의 변화에 따라 현대 사회는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안정적인 준거틀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는 바보들이다. 그들은 이미 썩어 가는 전통적 가치관에 묶여 있으면서도 여전히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경제 성장을 열광적으로 지지한다. 한 사회의 테크놀로지와 경제의 급격한 변화는 사회의 다른 부문의 급격한 변화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그런 급속한 변화는 필연적으로 전통적 가치들을 붕괴시킨다는 자명한 사실을 보수주의자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전통적 가치의 붕괴는 전통적인 소규모 사회 집단을 묶어 주고 있는 유대 관계가 붕괴된다는 것을 의미하게 마련이다. 현대의 환경이 개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속한 공통체로 부터 떨어져 나와 새로운 지역으로 옮겨가도록 요구하거나 유혹한다는 점도 소규모 사회 집단의 와해를 촉진한다. 그런 이유를 제쳐놓고라도, 우선 테크놀로지 사회가 효율저긍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가족 간의 유대와 지역 공통체를 약화시켜야만 한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은 체제 자체에 최우선으로 충성해야 하며, 소규모 공동체에 대한 충성은 부차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소규모 공동체의 내부적 퉁성도가 체제에 대한 충성도보다 더 강력할 경우, 그런 공통체들은 체제를 희생시키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고위 공무원이나 기업체 중역이 어떤 자리에 능력을 고려치 않고 그저 자신의 사촌이나 친구, 같은 종교의 신도를 앉힌다고 생각해 보자. 그는 체제에 대한 충성보다 개인적 충성을 우선시한 것이고, 이는 곧 '족벌주의' 또는 '차별'이 되는데, 둘 다 현대 사회에서는 끔찍한 범죄 행위다. 개이적 또는 지역적 충성을 체제의 충성에 완전히 굴복시키지 못한 채 산업 사회를 지향하는 사회는 대부분 몹시 비효율적이다(라틴 아메리카를 보라.). 따라서 선진 산업 사회는 오로지 거세되고, 길들여진, 그리고 체제의 도구가 되어 버린 소규모 공동체들만을 허용할 수 있다.
인구 과밀, 급겨한 변동과 공동체의 붕괴는 그 동안 사회 문제의 근원으로 널리 인정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만으로는 오늘날 볼 수 있는 광범위한 사회 문제를 설명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고 믿는다.
산업화 이전 단계의 도시 가운데서도 몇몇 도시는 매우 큰 규모와 높은 인구 밀도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 도시의 주민들이 현대인들고 같은 정도로 심리적 문제들 때문에 고통을 겪었던 것 같지는 않다. 미궁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구가 적은 농촌 지역이 남아 있으며, 우리는 그런 농촌 지역에서도 도시에서 일어나는 것고 동일한 문제들을 발견한다. 물론 농촌 지역에서는 문제들이 상대저긍로 덜 두드러진다는 차이는 있다. 그러니 인구 과밀이 사회 문제의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미국의 개척자들이 서부로 퍼져 나가던 19세기, 당시에도 인구의 이동으로 말미암아 대가족과 소규모 사회 집단은 붕괴되었다. 그 붕괴의 정도는 오늘날에 비해 결코 약하지 않았다. 사실, 수 마일에 걸쳐 전혀 이웃이 없으니 도대체 공동체에 소속될 방법이 없는 고립된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핵가족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개척민들이 공동체의 붕괴 때문에 사회 문제들을 심화시켰던 것 같지는 않다.
아울러 미국 개척 사회에서의 사회 변동은 매우 빠르고 심층적으로 이루어졌다. 법률과 질서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상황에서, 통나무집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야생 동물의 고기를 주식으로 먹으며 성장한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다가 노인이 되어서야 그는 제대로 된 직장에서 일하게 되고, 법률적 제재가 효력을 발휘하는 질서 잡힌 공동체에서 살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사회 변동은 현대인의 인생에서 전형적으로 벌어질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심층적인 변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회 변동이 사람들에게 심리적 문제들을 야기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여 19세기 미국 사회에는 오늘날의 사회와는 달리 낙관적이고 자신만만한 사회 분위기가 펴져 있었다.
우리가 볼 때 두 사회가 다른 점은, 19세기의 개척자가 자신의 선택에 의해 스스로 변동을 만들어 냈다고 느낀 반면(이는 상당히 정당한 논리다.), 현대인은 변동이 자신에게 강요되었다고 느낀다는(이 역시 상당히 정당한 논리다.)점이다. 개척자는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땅에 정착해 자신의 노력을 통해 그 땅을 농장으로 만들어냈다. 그 시절의 어느 군()에는 군을 통틀어 수백 명의 거주자가 있을 뿐이었고, 현대의 군보다 훨씬 더 고립되고 자율적인 집단을 이룰 수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개척자는 비교적 작은 집단의 일원으로서 질서 잡힌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하는 작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 같은 공동체의 창조를 과연 진보로 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개척자는 그런 공동체 창조 작업을 통해서 권력 과정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급격한 사회 변동과 밀접한 공동체적 유대 관계의 상실을 겪으면서도 현대 산업 사회에서 나타나는 광범위한 이상 행동을 발생시키지 않는 사회는 그 밖에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사람들에게 권력 과정을 정상적인 방법으로 통과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 우리는 현대 사회의 사회적, 심리적 문제들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바로 그것이라고 주장한다. 현대 사회에서만 권력 과정이 붕괴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대개의 문명 사회에서 권력 과정은 심하게든 약하게든 항상 방해를 받아 왔다. 그런데 유독 현대 사회에서는 권력 과정의 붕괴라는 문제가 특히 극심하게 벌어졌던 것이다. 좌파주의, 적어도 최근(20세기 중반부터 후기까지)의 좌파주의는 권력 과정아 붕괴되면서 나타난 박탈 증상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의 권력 과정 붕괴
우리는 인간의 욕망을 세 부류로 나눈다. (1)최소한의 노력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 욕망 (2)상당한 노력을 치러야만 충족시킬 수 있는 욕망 (3)아무리 노력해도 충족시킬 수 없는 욕망, 권력 과정은 그 중에 두번째 부류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과정이다. 세번째 부류의 욕망이 많으면 많을수록 좌절과 분노, 그리고 궁극적으로 패배주의와 절망도 더 빈번히 생겨나게 된다.
현대 산업 사회에서 자연적인 인간의 욕망은 주로 첫번째와 세번째 부류에 속하며, 두번째 부류의 욕망은 점점 더 인위적으로 조작된 욕망들이 되어 간다.
원시 사회에서 생활 필수품은 대개 두번째 욕망에 속한다. 필수품을 구할 수는 있지만, 거기엔 상당한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선 최소한의 노력만으로도 누구나 생활 필수품을 얻는 것이 보장되어 있고, 따라서 신체적 욕구는 첫번째 부류의 욕망으로 전환된다. (직업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노력이 정말 '최소한의' 노력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중급 이하 수준의 직업에서 요구되는 노력은 기껏해야 복종하려는 노력 정도에 불과하다. 서라면 서고, 않으라면 앉고, 그거 시킨 대로만 따라 하면 되는 것이다. 전심전력을 다해야 할 경우란 거의 없으며, 어느 경우에도 작업에서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 그러니 권력 과정에 대한 욕구가 제대로 충족되지 않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의 섹스, 사랑, 신분 등과 같은 사회적 욕구는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흔히 두번째 부류에 머문다. 그러나 특별히 강력한 신분 상승의 욕망을 지닌 사람들을 제외하면, 사회적 욕망을 총족시키는 데 필요한 노력은 권력 과정에 대한 욕구를 제대로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두번째 부류에 속하는 인위적 욕구들이 만들어지고, 사람들은 그런 인위적 욕구를 채움으로써 권력 과정에 대한 욕구를 대신 채운다. 발달된 광고나 마케팅 기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할어버지 세대는 결코 욕망하지 않았을, 아니면 아예 꿈도 꾸지 않았을,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고 느끼도록 만들고 있다. 그런 인위적 욕구들을 충족시키려면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선 또 막대한 노력이 필요하고, 따라서 인위적 욕구는 두번째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문단 80~82를 보라.) 현대인은 광고와 마케팅 산업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 욕구를 추구하면서, 그리고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을 통해서, 권력 과정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어야만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권력 과정에 대한 인위적 욕구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20세기 전반부의 사회 비평서에서 계속 반복된 주제는 현대 사회의 대다수의 사람들을 괴롭히는 목적 상실감이었다(이 목적 상실감은 흔히 '무정부 상태', 또는 '공허한 중산층' 등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우리가 보기엔 이른바 '정체성의 위기'라는 것도 사실은 목적을 찾기 위한, 그리고 흔히 적절한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에 몰두하는 방법을 찾기 위한 모색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실존주의는 현대의 삶이 목적 없음에 대한 반발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충족'을 위한 모색 활동은 대단히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충족감이 목표인 활동(즉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을 통해서 충족감을 완벽하게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달리 말해,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은 권력 추구의 욕구를 온전히 충족시켜 주지를 못한다.(문단 41을 보라). 권력 과정에 대한 욕구는 생활 필수품, 섹스, 사랑, 신분, 복수 등과 같이 외적인 목표를 지니고 있는 활동을 통해서만 비로소 완벽히 충족될 수 있다.
아울러 돈을 벌거나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오르서나, 기타 다른 방식으로 체제의 부속품 역할을 수행하면서 목표를 추구할 때, 대개의 사람들은 자율적으로 자신의 목표를 추구할 만한 지위에 있지 않다. 대개의 노동자들은 우리가 문단 61에서 지적했듯이 피고용자의 신분이며, 그저 누군가가 시킨 대로 따라 하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한다. 자영업자들의 경우에도 역시 자율성은 제한적일 뿐이다. 중소기업의 사장들은 언제나 과도한 정부의 규제가 자신들의 손발을 묶어 놓고 있다는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이 같은 규제들 중 일부는 의심할 바 없이 불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회 부문에서 정부 규제는 극단적으로 복잡한 우리 사회에서는 필수적이고 또 불가피한 것이다. 오늘날 소규모 기업의 상당 부분은 프랜차이즈 제도에 따라 운영되고 있다. 몇 년 전 (월 스트리트 저널)지는, 많은 프랜차이즈 제공 회사들이 프랜차이즈 희망자들에게 특별한 인성 검사를 받도록 요구하고 있다는 기사를 실었다. 기사에 따르면, 그 검사의 목적은 창의적이고 주도적인 사람들을 제외하기 위한 것으로서, 그런 사람들은 프랜차이즈 제도를 군소리 없이 따라갈 만큼 고분고분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다른 무엇보다 자율성을 요구하는 많은 사람들은 소규모 사업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스스로를 위해 자신이 행한 무엇보다는 체제가 그들을 위해서, 아니면 그들에게 행한 무엇에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를 위해 무엇인가를 할 때에도 점점 더 체제가 마련해 놓은 통로를 따라가고 있다. 기회란 것도 체제에 의해 재공되며,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규칙과 규제에 순응해야 한다. 그리고 성공을 위해서는 전문가들이 미리 정해 놓은 기법을 따라야만 한다.
우리 사회에서 권력 과정은 진정한 목표의 부재, 그리고 목표 추구에서의 자율성의 부재로 인해 붕괴되고 있다. 권력 과정이 붕괴되는 것은 세번째 부류의 속하는 욕망들 때문이기도 하다. 제아무리 발버둥쳐도 도저히 충족시킬 수 없는 그런 욕망들 말이다. 이제 우리의 삶은 다른 사람이 내리는 결정에 좌우된다. 우리는 그런 결정에 전혀 관여할 수 없으며, 그런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마 500명에서 1,000명 정도의, 세계 인구와 비할 때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숫자의 사람들이 모든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 - 필립 헤이만, 하버드 법대 교수,<뉴욕 타임즈> 1995.4.21자에서 안토니 루이스가 인용.) 우리의 삶은 핵발전소에서 안전 기준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의 여부에 좌우된다. 얼마나 많은 농약이 음식에 들어가도록 허용되는지. 대기에 오염 물질이 얼마나 허용되는지, 의사가 얼마나 숙련된 사람인지(또는 무능력한지)에 따라 우리의 삶이 좌지우지되는 것이다. 직업을 잃고 얻는 것도 정부 경제 부처나 기업체 중역들이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달려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같은 위협들로 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지위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자신의 안전을 지키고자 하는 개인들의 노력은 좌절될 수 밖에 없고, 그것은 곧 무력감으로 이어진다.
짧은 평균 수명에서도 볼 수 있듯이, 원시인은 현대인보다 신체적으로는 더 불안한 삶을 살았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현대인에게 고통을 주는 불안함의 총합은 인간에게 통상적으로 주어지는 불안함보다 적으면 적었지, 더 크지는 않을 것이라는 반론이다. 그러나 심리적 안정은 신체적 안정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를 안전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자신감과 같이, 별로 객관적이라고 할 수 없는 보호 장치다. 맹수와 배고픔의 위협에 둘려싸여 있지만, 원시인은 자기 방어를 위해 싸울 수 있고 음식을 찾아 먼 길을 여행할 수도 있다. 원시인에겐 노력한 만큼 성공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원시인은 자신을 위협하는 것들에 대해 그저 앉아서 당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원시인과 달리 현대인은 자신이 도저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것들에 의해 위협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핵사고, 식품 속의 발암 물질, 환경 공해, 전쟁, 늘어나는 세금, 거대 조직에 의한 개인적 프라이버시의 침해,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 전국적인 사회 현상또는 경제 현상 등이 그런 위협들이다.
물론 원시인 역시 자신을 위협하는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무력하다. 가령 질병을 그런 위협의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원시인은 질병의 위험조차도 냉철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질병은 사물의 본서으이 한 부분이었으며, 상상 속의 비인간적인 악마의 잘못이 아니라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하지만 현대의 개인에게 가해지는 위협들은 인간이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그 위협들은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개인은 도저히 영향을 끼칠 수 없는 타인들이 결정에 의해 개인에게 강요된 위협이다. 그러니 그가 좌절과 모욕을 느끼고, 분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원시인이 대개의 경우 자기 손(개인으로서건, 아니건 작은 집단의 일원으로서건)으로 자신의 안전을 지킬 수 있는 반면, 현대인의 안전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거나 너무나 거대해서 개인적으로 도저히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타인들이나 조직의 손에 맡겨져 있다. 그러니 현대인의 안전에 대한 욕망은 첫번째와 세번째 부류의 욕망으로 전락해 버린다. (음식이나 주거지 같은) 일부 영역에서는 아주 조금만 노력해도 안전이 보장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밖의 영역에서는 전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현실 상황을 극단적으로 단순화 시킨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의 환경이 원시인의 환경과 어떻게 다른지를 개략적으로 보여주는 데는 충분할 것이다.)
현대 생활에서 사람들이 지닌 부질없는 욕망 중 상당 부분은 어쩔 수 없이 좌절되게 마련이고, 그 결과 세번째 부류의 욕망으로 전락한다. 여기에 분노를 느끼는 사람이 생기겠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싸움이 허용되지 않는다. 많은 경우에 심지어는 말을 심하게 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어디론가 급히 가야 할 때도 있고, 아니면 천천히 움직이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교통 흐름을 따르고 교통 신호를 지키며 움직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다른 방식으로 작업해 보고 싶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는 고용주가 정한 규칙을 따라야만 한다. 현대인은 그런 식으로 (명시적이건 암묵적이건) 규칙과 규제의 그물에 꽁꽁 묶에 있으며, 그 규칙과 규제들은 현대인의 욕망을 좌절시키고, 그 결과 권력 과정을 교란시킨다. 이 규제들 대부분은 산업 사회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 필수적이므로,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도 없다.
어느 면에서 현대 사회는 극도로 자유 방임적이다. 체제의 기능 수행과 무관한 사안에 대해서는 우리는 거의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 (그 종교가 체제를 위협하는 행동을 장려하지 않는 한) 우리는 어느 종교든 마음대로 믿을 수 있다. ('안전한' 섹스를 실천하는 한) 우리는 누구라도 마음에 드는 상대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중요한 사안에서 체제는 갈수록 우리의 행동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명시적인 볍률과 정부에 의해서만 행동에 대한 규제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통제는 간접적인 강요를 통해서, 심리적 억압또는 조작을 통해서, 그리고 정부보다는 조직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대형 조직들은 대중의 태도나 행동을 조작하기 위해 어떤 형태의 프로퍼겐더를 사용한다. 프로퍼겐더는 '상업 광고'와 홍보에 국한되지 않으며, 때로는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조차도 자신들이 프로퍼겐더를 만든다는 의식을 갖고 있지 않을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오락 프로그램의 내용은 강력한 프로퍼겐더 형식 중의 하나다. 간접적인 강요의 한 에를 들어보자. 우리가 매일 직장에 출근해야 하고 고용주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적힌 법률은 없다. 우리가 원시인들처럼 대자연 속에 살아가는 것, 또는 우리 자신을 위한 사업에 뛰어드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은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자연은 거의 남아 있질 않으며, 소규모 자영업자를 위한 경제적 공간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그러니 우리들 대부분에게 생존할 수 있는 실은 단 하나, 누군가 다른 사람의 피고용자가 되는 것뿐이다.
우리는 현대인이 지닌 장수()에 대한 강박 관념, 그리고 노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육체적 힘과 성적 매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바로 권력 과정에서의 욕구 충족이 박탈당한 데서 초래된 병적 증상이라고 본다. '중산층의 위기' 또한 그 같은 병적 증상이다. 현대 사회에서 일반화된 자녀 양육에 대한 무관심은 원시 사회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현상이다.
원시 사회에서 삶은 일련의 단게들이 지속되는 것이었다. 어느 한 단계의 욕구와 목적이 충족되면 곧장 다음 단계로 망설이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젊은 남성은 사냥꾼이 됨으로써 권력 과정을 통과했으며, 이 때 사냥은 스포츠나 충족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식량으로 필요한 고기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젊은 여성의 경우 그 과정은 좀 더 복잡하다. 우리의 논의는 사회적 권력을 중심으로 한 것이므로, 여성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그 단계를 성공적으로 통과하면, 청년은 망설임 없이 곧바로 가정을 이루는 책임을 떠맡았다. (대조적으로 현대인들은 수많은 '충족감'을 채우느라 너무나 바쁜 탓에 자녀 갖기를 끝없이 미루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 그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이라는 인위적 목표의 달성에서 오는 충족감이 아니라, 정당한 권력 과정을 경험하는 일이다.) 자녀를 제대로 기르고, 자녀들에게 생활 필수품을 공급하면서 권력 과정을 통과하고 나면, 원시인은 자신이 할 일을 다했다고 느끼며 (그 때까지 그가 살아 있다면) 노년기와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반대로 많은 현대인은 그들이 육체적 컨디션과 외모, 건강을 지키기 위해 쏟아 붓는 엄청난 노력에서 볼 수 있듯이, 육체적 쇠락과 죽음 앞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다. 현대인은 단 한번도 실용적인 목적으로 자신의 육체적 힘을 사용하지 못하며, 권력 과정을 통과하는 데 있어 한번도 자신의 육체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 그럼으로써 현대인의 욕구는 결코 채워지지 않으며, 그것이 노화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낳는 것이다.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매일 자신의 육체를 사용한 원시인은 노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데자동차에서 집까지 걷는 일 말고는 일체 자신의 육체를 사용하지 않는 현대인이 오히려 노화를 두려워하고 있다. 인생을 통해서 권력 과정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만이 인생의 종말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 우리의 주장에 대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회는 사람들에게 권력 과정을 통과하기 위한 기회를 제공해 줄 방법을 찾아낼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문제는 사회가 기회를 제공해 준다는 바로 그 사실때문에 기회의 가치가 훼손된다는 점이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 기회르 찾거나 만들어 내는 것이다. 체제가 사람들에게 기회를 제공해 주는 한, 사람들은 여전히 체제의 사슬에 묶일 수 밖에 없다. 자율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그 사슬을 벗어 던져야 한다.

일부 사람들이 체제에 적응하는 방법
산업-테크놀로지 사회의 모든 사람이 심리적 문제로 인한 고통을 겨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일부의 사람들은 현재의 사회에 만족하고 있기도 하다. 이제 왜 사람들이 현대 사회에 대해 그렇게도 확연히 다른 반응을 보이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의심할 바 없이 사람마다 권력 욕망의 강도가 다르다. 권력 욕망이 약한 개인들은 상대적으로 권력 과정을 통과해야 할 필요성이 적을 수도 있다. 아니면 적어도 권력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자율성이 덜 필요할 수도 있다. 이들은 '옛날 남부(Old South)'의 농장에서 일하던 흑인 노예들처럼 고분고분한 타입으로, 쉽게 행복해 질 수 있는 사람들이다. (옛날 남부의 '흑인 노예'를 비웃으려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노예들은 자신들이 노예 생활에 만족하지 않았다. 우리가 비웃는 것은 노예 생활에 만족하는 부류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권력 욕망을 추구하면서 몇 가지 예외적인 욕망을 품게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신분 상승에 대해 예외적으로 강력한 욕망을 지닌 사람들은 신분 상승이라는 게임에 결코 싫증을 느끼지 않으며 평생을 그저 신분의 사다리를 오르며 보낼 수도 있다.
광고 및 마케팅 기법에 넘어가는 정도도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그 정도가 너무나 심해,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도 광고 산업이 그들의 눈 앞에 대고 흔들어 대는 눈부신 신형 장난감을 향한 끝없는 갈망을 충족시킬 수가 없다. 그러니 그들의 수입이 엄청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경제적으로 궁핍함을 느끼며, 결국 그들의 갈망은 좌절로 이어진다.
어떤 사람들은 광고 및 마케팅 기법에 잘 넘어가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돈에도 별로 관심이 없다. 물질을 얻는 것으로는 권력 과정에 대한 욕망이 채워지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광고 및 마케팅 기법에 중간 정도로 넘어가는 사람들은 상품과 서비스를 향한 갈망을 채우기에 충분한 정도의 돈을 벌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선 상당한 노력(시간외 근무, 부업, 승진을 위한 공작 등)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 물질을 얻음으로써 권력 과정에 대한 욕망이 채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욕망이 완전히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권력 과정에서 자율성이 부족할 수도 있고(그들의 노동이 명령을 따르는 것으로만 이루어져 있을 수도 있다.) 그들이 지닌 욕망 중 일부는 좌절될 수도 있다.(안전, 공격성 등). (문단 80~82에서 우리가 물질을 얻고자 하는 욕망이 순전히 광고 및 마케팅 산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가정한 까닭에 문제가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버린 것은 우리의 잘못이다. 물론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강력한 조직이나 대규모 운동과 자신을 동일화시킴으로써 권력 과정에 대한 욕망을 부분적으로나마 충족시킨다. 목표나 힘을 지니지 못한 개인들은 운동이나 조직에 참여해 운동과 조직의 목표를 자신의 목표로 받아들이고 그 목표를 추구하며 일한다. 이들 목표의 일부가 이루어질 경우, 개인은 자신의 노력은 목표 달성에 아주 미미한 힘을 보탰음에도 불구하고, (운동 또는 조직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권력 과정을 통과한 듯한 느낌을 얻게 된다. 파시스트와 나치,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악용했다. 우리 사회 역시 조금 덜 노골적이긴 하지만 그것을 이용하고 있다. 파나마의 독재자 노리에가는 미국에게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목표:노리에가의 처벌), 미국은 파나마를 침공했고(노력), 노리에가를 처벌했다(목표의 달성). 미국은 권력 과정을 통과했고, 많은 미국인들은 자신을 미국과 동일시했기에 권력 과정을 대리 경험했다. 광범위한 대중이 파나마 침공을 용인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즉, 파나마 침공은 사람들에게 권력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군대, 기업체, 정당, 인도주의 단체, 종교 운동, 이데올로기 운동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벌어진다. 특히 좌파 운동들은 권력 욕구를 충족시킬 방법을 착조 있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거대 조직 또는 대규모 운동에 대한 동일화를 통해서는 권력 욕구를 완전히 충족시키지 못한다.
사람들이 권력 과정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또 하나의 방법은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을 통해서이다. 문단 38~40에서 설명했듯이,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은 인위적 목표를 향해 가는 활동이다. 개인은 목표 자체의 달성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저 목표를 추구하면서 얻어지는 '충족감'을 위해서 그런 활동에 매달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디 빌딩을 통해 우람한 근육을 키우는 것이나, 조그만 공을 구멍으로 집어넣는 것, 완전한 기념 우표 세트를 모으는 것 등에는 아무런 실용적인 동기가 없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보디빌딩과 골프와 우표 수집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보다 더 '타인 지향적'이다. 그런 사람들은 오로지 주변 사람들이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이유만으로, 또는 사회가 중요하다고 말한다는 이유만으로,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단정해 버린다. 어떤 사람들이 스포츠, 트럼프 게임, 체스, 학문적 비밀의 추구 등 깨인 의식을 지닌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 활동, 즉 본질적으로 사소한 일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정작 권력 과정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일은 전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 많은 경우에 생활비를 벌는 일조차도 역시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이 된다. 생활 필수품을 얻고 높은 사회적 신분을 획득하고 광고에 의해 촉발된 사치품에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활동은 물론 순수한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돈과 신분을 훨씬 초과하는 것을 얻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쏟아 붓고 있으며, 바로 그 초과분의 노력이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이 초과분의 노력은 거기에 수반되는 정서적 투자와 함께, 개인의 자유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체제의 영속적인 발전과 완성을 위한 가장 강력한 잠재력 중의 하나가 된다(문단 131을 보라). 특히 가장 창의적인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에게조차, 작업은 대부분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에 불과하다. 이는 특히 중요한 문제이므로 잠시 후에 따로 논의하기로 한다(문단 87~92).
여기서 우리는 현대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권력 과정에 대한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지 알아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권력 과정에 대한 욕구를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첫째, 끝없는 신분 상승에의 욕망을 지닌 사람들이나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에 '코가 꿰인' 사람들, 권력 욕구의 충족을 위해 운동이나 조직과 자신을 철두철미 동일화시키는 사람들은 오히려 예외적인 성격의 소유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은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이나 조직과의 동일화로는 결코 완전한 충족을 얻을 수 없다(문단 41과 64를 보라). 둘째, 명시적인 규제나 사회화를 통해서 체제가 너무나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런 통제 때문에 자율성은 사라지고, 목표 달성이 불가능한 데다가 너무나 많은 욕망을 억눌러야 하는 데서 오는 좌절감은 늘어나는 것이다.
설령 산업-테크놀로지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만족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런 형태의 사회를 반대한다. (다른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는 진정한 목표의 추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이나 조직과의 동일화를 통해서 권력 과정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천박한 행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학자의 동기
과학과 테크놀로지는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의 가장 중요한 사례들이다. 어떤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과학 연구에 몰두하는 동기가 '호기심'이나 '인류의 복지'를 향한 열망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 중 어느 것도 대개의 과학자들에게 있어 주된 동기가 아니라는 사실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호기심'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헛소리일 뿐이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정상적인 호기심의 대상이 아닌 고도로 전문화된 문제들을 놓고 씨름한다. 가령, 천문학자나 수학자, 곤충학자가 아이소프로필트라이메틸메탄의 성분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겠는가? 물론 아니다. 그런 것에 호기심을 느낄 사람은 오직 화학자뿐이며, 화학자가 그것에 호기심을 느끼는 것은 단 하나, 화학이 그에게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이기 때문이다. 화학자가 새로운 종의 딱정벌레를 정확하게 분류하는 일에 호기심을 느끼겠는가? 아니다. 그 질문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곤충학자뿐이다. 그리고 그가 흥미를 느끼는 것 역시 곤충학이 그에게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이기 때문이다. 만약 화학자나 곤충학자가 생활 필수품을 얻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하고, 그러한 노력을 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능력이 비과학적이지만 흥미로운 방식으로 발휘될 수 있다면, 그들은 아이소프로필트라이메틸메탄이나 딱정벌레의 분류 따위에 대해서는 코방귀도 뀌지 않을 것이다. 대학원의 연구 기금이 바닥난 화학자가 할 수 없이 보험 외판원이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화학자는 이제 보험에 관련된 문제에는 대단한 흥미를 보이겠지만, 아이소프로필트메틸메탄에 대해서는 일체 관심도 두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간에, 과학자들이 자신의 작업에 쏟아붓는 시간과 노력이 그저 단순히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정상이 아니다. 과학자들의 동기를 '호기심'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짓이다.
'인류의 복지'또한 '호기심'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는 설명이다. 어떤 과학적 연구는 인류의 행복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대부분의 고고학이나 비교 언어학 같은 것이 그 예다. 몇 가지 다른 과학 분야는 아예 명백히 위험한 가능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도 이 분야의 과학자들은 예방 백신 개발이나 대기 오염을 연구하는 학자들과 똑같이 자신의 연궁에 열광하고 있다. 핵발전소 건설을 추진하는 데 온 마음을 다 바쳤던 에드워드 텔러(Edward Teller) 박사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가 그렇게 온 마음을 바친 것은 인류의 행복을 위한 열망 때문이었는가? 만약에 그렇다면, 텔러 박사는 왜 다른 '인도주의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전혀 흥분하지 않았는가? 그가 그렇게 인도주의자였다면, 도대체 왜 수소폭탄의 개발을 도왔던 것인가? 다른 수많은 과학적 업적과 마찬가지로, 핵발전소가 과연 인류 복지를 위한 것이냐 하는 질문에는 서로 상이한 대답들이 나올 수 있다. 값싼 전기가 쌓여 가는 핵 폐기물과 핵 사고의 위험을 능가할 정도로 값어치 있는 것인가? 텔러 박사는 질문의 오직 한 측면만을 보았다. 분명히 그가 핵발전소에 온 마음을 다 바친 것은 '인류의 복지'를 위한 열망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연구에서 얻어지는, 그리고 연구 결과가 실제 사용되는 것을 보면서 얻어지는 개인적 충족감 때문이었다.
과학자들 일반에 대해서도 똑같은 진실이 통용된다. 희귀한 예외를 제외하곤, 그들의 동기는 호기심도 아니고 인류의 복지도 아니다. 진짜 동기는 권력 과정을 통과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목표를 갖는(풀어야 할 과학적 문제), 노력하는 것(연구), 그리고 목표를 달성하는 것(문제의 해결)이다. 과학이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인 이유는 과학자들이 주로 연구 그 자체로부터 충족감을 얻기 위해 연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많은 과학자들에게는 그 밖의 다른 동기들도 작용한다. 예를 들어 돈과 신분 같은 동기들이다. 어떤 과학자들은 신분 상승에 대해 끊없는 욕망을 지닌 사람들일 수도 있고(문단 79를 보라), 이런 욕망이 그들의 연구에 상당한 동기를 부여할 수도 있다. 일반 대중과 마찬가지로 과학자들의 대다수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광고 및 마케팅 기법에 현혹되며, 따라서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돈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과학을 순수한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크게 봤을 때 과학은 역시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에 속한다.
한편 과학과 테크놀로지는 거대한 권력 운동을 구성하며, 많은 과학자들은 이 거대한 운동에 자신을 동일화함으로써 권력 욕구를 충족시킨다.
따라서 과학은 과학자들과 연구 기금을 제공하는 정부 관료 및 기업체 중역들이 지닌 심리적 욕구에만 복종하는 맹목적인 행진일 뿐이다. 그들은 인류의 진정한 행복이라든가 그 밖의 다른 기준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자유의 본질
우리는 산업-테크놀로지 사회가 인간의 자유 영역을 점점 더 좁혀 가는 것을 막는 방법으로는 개혁될 수 없음을 밝히려 한다. 그러나 '자유'란 단어에 워낙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므로, 우선 우리가 어떤 종류의 자유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를 먼저 밝혀 두겠다.
우리가 말하는 '자유'란 권력 과정을 통과할 수 있는 기회를 뜻한다. 여기에는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이라는 인위적 목표가 아니라 진정한 목표가 있어야 하며 누구로부터도, 특히 어떤 거대 조직으로부터도, 일체의 간섭이나 조작 또는 감독이 없어야 한다. 자유란(개인으로건 아니면 작은 집단의 일원으로서건) 당사자의 존재가 걸린 생과 사의 문제를 스스로 통제할 수 있음을 뜻한다. 음식, 옷, 주거지와 환경 내에 있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위협에 대한 방어 능력등이 그런 문제들이다. 자유란 권력을 확보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말하는 권력은 다른 사람을 통제하기 위한 권력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둘러싼 환경을 통제하기 위한 권력이다. 누군가(특히 거대 조직이) 우리에게 권력을 행사할 때, 그 권력이 아무리 호의적이고 관용적으로, 또 방임처럼 행사된다 해도, 우리에겐 자유가 없다. 자유와 체제가 허용하는 방임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문단 72를 보라)
사람들은 우리가 헌법으로 보장된 몇 가지의 권리를 확보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우리가 자유로운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법률적 권리는 누에 보이는 것처럼 중요한 것들이 아니다. 한 사회 내에 존재하는 개인적 자유의 정도는 그 사회의 볍률이나 정부 형태가 아니라, 그 사회가 지닌 경제적, 테크놀로지적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 뉴잉글랜드 지역에 있던 인디언 국가들은 대부분 왕국이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도시 국가들 중 상당수는 독재자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러나 이들 사회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사회들이 우리 사회보다 훨씬 더 많은 개인적 자유를 허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부분적으로, 그 이유는 그 사회들이 지배자의 의지를 강요하기 위한 효과적 메커니즘을 갖추지 못했던 때문이기도 하다. 그 사회에는 현대적이고 잘 조직된 경찰력도 없었고, 고속 장거리 통신망도 없었으며, 감시 카메라도, 보통 시민들의 삶에 대한 일목요연한 정보도 없었던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통제를 피하기도 상대적으로 쉬웠다.
우리의 헌법적 권리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언론의 자유를 예로 들어 따져 보자. 우리는 결코 언론의 자유라는 권리를 공격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 권리는 정치권력의 집중을 막는 데, 또 정치적 권력의 소유자들이 저지르는 잘못을 계속 공중의 시선 앞에 드러내는 데 매우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나 언론의 자유는 개인으로서 보통 시민에게는 거의 쓸모가 없다. 매스미디어는 거의 대부분 거대 조직의 통제하에 놓여 있으며, 이 거대 조깆들은 체제에 통합되어 있다. 누구라도 약간의 돈만 있으며 인쇄물을 만들 수 있고, 그것을 인터넷이나 그 밖의 다른 방법을 통해 배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미디어에 의해 쏟아 부어지는 엄청난 자료의 늪에 잠겨 버리고, 결국 아무런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따라서 개인들이나 작은 집단들이 말로써 사회의 이목을 끌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를 그 실제의 사례로 생각하면 된다. 우리가 한번도 폭력을 저지르지 않은 상태에서 지금 여러분이 읽고 있는 선언문을 출판사에 보냈다고 가정해 보라. 출판사가 그것을 받아 주었겠는가. 설령 출판사가 그것을 받아 주어 출판해 주었다고 해도, 아마 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심각한 논문을 읽기보다는 미디어가 제공하는 오락 거리를 지켜보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설령 많은 독자들이 그것을 읽는다해도, 대부분의 독자들은 금방 자신들이 읽은 것을 잊어버릴 것이다. 미디어가 그들에게 심어 놓은 엄청난 정보 자료들로 머리가 넘치기 때문이다. 우리의 메세지를 오래도록 기억되게끔 깊은 인상을 남기며 대중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을 죽여야 했다.
헌법적 권리들도 어느 면에서는 유용하지만, 그것들은 부르주아적 개념에서의 자유라고 부를 수 있는 것 이상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부르주아들이 갖고 있는 자유 개념을 따르자면, '자유로운' 인간은 근본적으로 사회라는 기계의 부품일 뿐이며, 고작해야 사전에 정해지고 제한된 자유를 확보할 수 있을 뿐이다. 부르주아의 자유란 개인의 욕구가 아니라 사회라는 기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고안된 자유에 불과하다. 따라서 부르주아의 '자유인'은 경제적 자유가 성장과 진보를 촉진하기 때문에 경제적 자유를 누린다. 그가 언론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공적인 비판이 정치 지도자들의 비행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그가 공정한 재판의 권리를 누리는 것은 권력자들을 아무렇게나 감옥에 처넣는 것이 사회에 해롭기 때문이다. 사이먼 볼리바(Simon Bolivar)가 취했던 태도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가 볼 때, 사람들이 자유를 누리는 것은 오직 그 자유를 진보(그것도 부르주아가 생각하는 진보)를 촉진하기 위해 사용할 경우에 한해 허용될 수 있는 일이었다. 다른 부르주아 사상가들도 그와 비슷한 자유에 대한 시각을 지니고 있었는 바, 그들에게 자유는 집단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체스터 탄(Chester C. Tan)은 "20세기 중국의 정치 사상" 202페이지에서, 국민당 지도자 후 한민(Hu Han-Min)의 사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한 개인에게 권리가 보장되는 것은 그가 사회의 일원이기 때문이며, 그의 공동체적 삶을 위해서 그러한 권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후 한민에게 있어 공동체란 곧 국가 사회 전체를 뜻하는 말이었다. 이어 259페이지에서 탄은 장 춘매(Chang Chun-Mai, 중국 국가 사회당 당수)에 따르면, 자유는 국가와 전체 인민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오로지 다른 사람이 정해 놓은 대로밖에는 사용할 수 밖에 없는 자유라면, 도대체 그것을 자유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는 볼리바나 후 한민, 장 춘매, 또는 기타 부르주아 이론가들이 생각하는 그런 자유가 아니다. 그런 이론가의 문제는 그들이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으로서 사회 이론들을 발전시키고 적용해 왔다는 점이다. 그러니, 그 이론들이 그러잖아도 그런 이론이 강요되는 사회에서 살아야 하는 불행한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론가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고안되었다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한 가지만 더 지적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어떤 사람이 자기가 충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말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충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단정해서는 안된다. 자유는 사람들이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심리적 통제에 의해 제한 당한다. 게다가 무엇이 자유를 구성하는가에 관한 사람들의 생각 자체가 자신들의 진정한 욕구보다는 사회적 관습에 의해 더 많이 결정된다. 예를 들어, 지나치게 사회화된 좌파들은 아마도 자신들을 포함해서 대개의 사람드링 지나치게 사회화된 것이 아니라 사회화가 너무 덜 되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주장한다 해도, 지나치게 사회화된 좌파들이 고도의 사회화를 위해 무거운 심리적 대가를 치르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역사의 몇가지 원칙
역사란 두 가지 요소가 합해진 결과라고 생각해 보라. 한 요소는 전혀 예측 불가능한 패턴을 따라 벌어지는 우발적인 사건들로 구성된 불규칙한 요소이고, 다른 한 요소는 장기간에 걸친 역사적 추세를 따라 구성된 규칙적 요소이다. 여기서 우리가 다룰 것은 장기간에 걸친 추세다.
제1원칙. 장기간에 걸친 역사적 추세에 영향을 미칠 만한 작은 변화가 일어날 경우, 그 변화의 효과는 거의 언제나 단기간에 그치며, 역사적 추세는 곧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 버리고 만다. (예: 한 사회의 정치적 부패를 해소하기 위해 마련된 개혁 운동이 단기 효과 이상을 발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머지 않아 개혁가들은 긴장이 풀리고, 부패가 다시 슬며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한 사회의 정치적 부패는 항상 일정한 수준에 머물며, 변한다 해도 사회 진화에 따라 아주 천천히 변할 뿐이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청소 작업은 광범위한 사회 변동이 수반될 경우에 한해 지속될 수 있다. 해당 사회에서의 작은 변화로는 충분치 않은 것이다.) 만약 장기간에 걸친 역사적 추세에서 작은 변화가 지속적인 것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변화가 이미 추세가 움직여가는 방향으로 함께 일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발을 더 내딛는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추세가 바뀌지는 않는다.
제1원칙은 거의 동어 반복이라 할 수 있다. 만약 그 추세가 작은 변화에도 흔들릴 만큼 불안정한 것이라면, 하나의 확고한 방향을 따라 진행되기보다는 마구잡이로 흘러갈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런 추세는 결코 장기적인 추세가 될 수 없다.
제2원칙. 장기간에 걸친 역사적 추세를 지속적으로 바꿀 만큼 커다란 변화가 일어날 경우, 그 변화는 모든 부분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체제이며, 그 모든 여타의 부분들을 동시에 바꾸지 않고서는 어느 중요 부분도 지속적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제3원칙. 장기간에 걸친 역사적 추세를 지속적으로 바꿀 만큼 커다란 변화가 일어날 경우, 사회 전체에 걸쳐 일어날 변화의 결과를 사전에 미리 예측할 수는 없다. (다양한 다른 사회들이 똑같은 변화를 겪고 똑같은 결과를 경험하지 않는 한, 그래서 어느 다른 사회가 똑같은 변화를 겪었을 때 비슷한 결과를 경험할 것이라는 것을 실증적으로 예측할 수 있기 전에는, 예측이란 불가능하다.)
제4원칙. 새로운 종류의 사회를 종이 위에 설계할 수는 없다. 즉, 어떤 형태의 새로운 사회를 사전에 계획하고 세워서 애당초의 설계 의도대로 기능해 주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제3원칙과 제4원칙은 인간 사회의 복잡성에서 생겨난 것이다. 어떤 인간 행동의 변화는 그 사회의 경제와 물리적 환경에 영향을 미친다. 경제는 환경에 영향을 미치며, 환경은 경제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경제와 환경의 변화는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인간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원인과 결과의 그물망이 너무나 복합적인 탓에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제5원칙.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또 이성적으로, 자신이 속한 사회 형태를 선택하지 않는다. 사회는 사회 진화의 과정을 통해 발전하는 바, 그 진화 과정은 인가의 이성적 통제를 벗어나 있다.
제5원칙은 다른 네 가지 원칙의 결과이다.
요약: 제1원칙에 따라 일반적으로 사회 개혁의 시도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어느 식으로든 사회가 발전해 가는 방향을 따라 이루어지거나(따라서 개혁은 그저 어쨌든 일어나게 되어 있는 변화를 빨리 앞당길 뿐이다.), 아니면 그저 일시적인 효과에 그침으로써 사회는 곧 원래의 질곡 상태로 슬며시 되돌아간다. 사회의 어느 중요한 측면의 발전과 같은 방향으로 지속적인 변화를 일으키려면, 개혁은 충분치 않으며 혁명이 필요하다.(혁명이라고 해서 반드시 무장 봉기나 정부의 철폐를 담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제2원칙에 따라, 혁명은 사회의 어느 한 측면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변화시킨다. 제3원칙에 따라, 변화는 결코 기대하지 않았던, 혹은 바라지 않았던 방식으로 일어난다. 제4원칙에 따라, 혁명가나 유토피아주의자들이 어떤 새로운 유형의 사회를 세운다 해도 그 사회는 결코 계획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미국 혁명 역시 그 같은 원칙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미국 '혁명'은 우리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혁명은 아니었다. 그것은 독립 전쟁이었으며, 그에 뒤이어 상당히 넓게 정치적 개혁이 뒤따랐을 뿐이다. 미국의 '국부()들'은 미국 사회의 발전의 방향을 바꾸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러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들은 다만 영국의 지배로 인해 미국 사회의 발전이 더뎌지는 것을 막았을 뿐이다. 그들의 정치적 개혁은 어떤 기본적 추세도 바꾸지 않았으며, 미국의 정치 문화가 자연스러운 발전 방향으로 전개되도록 밀어 주었을 뿐이다. 미국 사회의 모체인 영국 사회는 이미 오래 전부터 대의제 민주주의 방향으로 옮겨가고 있는 중이었다. 게다가 독립 전쟁 이전에도 이미 미국인들은 식민지 의회 안에서 상당한 정도의 대의제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었다. 헌법에 의해 성립된 정치 제도는 영국의 제도와 식민지 의회의 제도를 그대로 본뜬 것이었다. 중요한 변화와 함께 미국의 국부들이 대단히 중요한 발걸음을 내딛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발걸음은 이미 영어권 세계가 움직이고 있었던 길을 그대로 따라간 것이었다. 영국과 영국 출신이 인구의 절대 다수를 점유했던 모든 식민지 국가들이 미합중국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똑같은 형태의 대의제 민주주의 제도를 구축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설령 미국의 국부들이 뚝심이 부족해 독립선언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고 해도, 오늘 우리들의 삶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영국과 여전히 긴밀한 유대 관계를 지속하면서 국회(Congress)와 대통령 대신에 의회(Parliament)와 총리를 갖게 되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그것이다. 미국 혁명은 우리가 제시한 역사의 원칙을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옳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그렇지만, 이 원칙들을 적용할 때는 상식을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이 원칙들은 부정확한 언어로 표현되었으며, 그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고, 한편 그 원칙들에서 벗어나는 예외적인 역사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원칙들이 신성불가침의 법칙이 아니라 대략적인 원칙, 또는 일종의 지침으로서 사회의 미래에 대한 순진한 생각들에 대해 부분적 해독제 정도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밝혀 둔다. 이 원칙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며, 그 원칙들에 어긋나는 결론을 내리게 될 때마다 조심스럽게 자신의 사고를 재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며, 그렇게 원칙과 어긋나는 결론을 고수하는 것은 정당한 근거가 있는 경우에 한해야 할 것이다.
산업-테크놀로지 사회의 개혁은 불가능하다.

앞서 든 원칙들을 보면, 산업 체제가 우리의 자유를 점점 더 제한해 가는 것을 막ㄱ는 정도의 방법으로는 산업 체제를 개혁하는 일이 얼마나 절망적으로 어려운 일인가를 알 수 있다. 산업 혁명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계속되어 온 하나의 일관된 경향이 있으니, 그것은 테크놀로지가 개인의 자유와 지역의 자율성의 희생이라는 비싼 대가를 치르며 체제를 강화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테크놀로지로부터 자유를 보호하겠다는 목적으로 계획된 어떤 변화도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발전 추세와는 대치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런 변화는 역사라는 파도에 곧 파묻혀버릴 일시적 변화에 그치거나, 아니면 우리 사회의 전체의 본질을 지속적으로 바꿔 놓을 만큼 거대한 변화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것은 제1원칙과 제2원칙에 의한 결과다. 더구나 사회란 사전에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변할 것이므로(제3원칙), 거기엔 커다란 위험성이 담겨 있다. 자유를 지켜 주면서 이전의 사회와는 확연히 다른 사회를 오래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변화는 시작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변화들이 체제를 교란시킨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혁을 향한 시도는 모두 너무나 소심한 나머지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한다. 설령 지속적인 차이를 낳을 만큼 커다란 변화가 시작된다 해도, 그것들이 사회를 혼란시키는 효과가 눈에 드러날 때에는 꽁무니를 빼게 될 것이다. 결국, 오로지 체제 전체의 급진적이고 위험하며 예측불가능한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자유를 옹호하는 지속적 변화를 이루어 낼 수 있다. 말을 바꾸면, 개혁가가 아니라 혁명가만이 변화를 이를 수 있다.
자유를 회복하되 주어진 테크놀로지의 혜택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하는 사람들은 자유와 테크놀로지가 타협하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를 내세우는 순진한 계획을 제시할 것이다. 그런 제안을 내놓는 사람들이 어떻게 새로운 형태의 사회가 세워질 수 있을지에 대해선 전혀 실천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제쳐두자. 설령 어찌어찌해서 새로운 형태의 사회가 일단 세워진다고 해도, 그 사회는 제4원칙을 따라 무너져 버리거나 아니면 기대했던 바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좋게 봐준다 해도 사회를 변화시킴으로써 자유와 현대 테크놀로지를 조화시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로 보인다. 이어질 몇 단원에서 우리는 자유와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공존할 수 없는 구체적 이유를 살펴볼 것이다.
자유의 제한은 산업사회에서는 피할 수 없다

단락 65-67, 70-73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현대의 인간은 규칙과 규제의 그물에 사로 잡혀있고, 그의 운명은 그가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그로 부터 떨어진 사람들의 행동에 달려있다. 이것은 우연적이거나 거만한 관료주의자의 전제의 결과가 아니다. 이는 모든 기술적으로 진보된 사회에서는 필요하고 불가피하다. 시스템은 제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행동을 빈틈없이 규제 해야만 한다. 작업장에서는 인간은 자신이 지시받은 일을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산은 혼란으로 빠지게 마련이다. 관료제도는 엄격한 규칙에 따라 시행되어야 한다. 하위 관료에 대한 어떠한 실제적인 재량권의 부여도 시스템을 망치거나 각 관료들이 자신의 재량으로 시행한 방법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불공정에 대한 문책으로 이어진다. 우리들의 자유에 대한 어떤 제한들은 제거될 수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거대한 조직에 의한 우리들의 삶에 대한 규제는 산업-기술 사회의 기능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결과는 보통 사람들의 측면에서는 일종의 무력함이다. 물론, 공식적인 규제는 사람들이 시스템이 자신들에게 필요로 하는 것을 하고 싶어하도록 만드는 심리적인 도구들로 급속하게 대체될 수도 있다. (선전 [14], 교육 기술, "정신 건강" 프로그램 등.)
시스템은 인간이 점점 더 인간의 자연스러운 행동 방식과는 거리가 먼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강요한다. 예를 들어, 시스템은 과학자, 수학자, 그리고 기술자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그들없이는 제대로 동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이들에게는 이러한 분야들에서 뛰어나도록 아주 무거운 압력이 가해진다. 청년기의 인간들이 그들의 많은 시간을 책상에서 공부하는데 빼앗기면서 보내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보통의 청년들은 그의 시간을 실세계와 능동적인 접촉을 하면서 보내기를 원한다. 원시인들의 세계에서 아이들이 훈련받은 것들은 타고난 인간의 충동과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세계에서는, 예를 들어, 소년들은 능동적인 야외 활동 -- 소년들이 좋아하는 류의 -- 을 하도록 훈련받았다. 그러나, 우리의 사회에서는 아이들은 기술적인 주제를 공부하도록 내몰리고 있고 대부분이 마지못해 그것을 한다.
시스템이 인간의 습성을 바꾸기위해 꾸준히 행사하는 압력때문에, 사회의 요구를 수용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 복지기금에 의존해 사는 사람, 소년-폭력조직원, 광신자, 반정부 세력, 급진 환경주의 행동원, 낙오자, 그리고 여러 종류의 저항자들.
어떤 기술적으로 진보된 사회에서든 개인의 운명은 그가 직접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도 없는 그런 결정들에 달려있다. 기술이 발달한 사회는 생산이 아주 많은 사람들과 기계들의 협동에 의존하기 때문에 작고 자치적인 공동체들로 쪼개어 질 수 없다. 그러한 사회는 고도로 구성되어야만 하며 결정은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내려진다. 어떤 결정이, 예를 들어, 100만명에게 영향을 미친다면 영향을 받는 각 개인은 평균적으로 의사결정의 100만분의 1의 몫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일어나는 상황에서는 공무원, 기업의 중역이나 기술적인 전문가에 의해 결정이 내려지며, 결정에 대한 투표에서 조차 투표참가자가 너무나 많은 탓에 어떤 개인의 투표는 중요하지 않다. [17] 따라서 대부분의 개인들은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주요한 결정에 가시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기술적으로 진보된 사회에서는 이러한 점을 치유할 만한 어떤 납득할 만한 방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스템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내려진 결정을 바라도록 만드는 선전을 통해서 이러한 문제들 해결하려 한다. 하지만 이러한 해결책이 사람들이 그것을 선호하게 만드는데 완벽한 성공을 거두더라도 그것은 불행이다.
보수주의자들과 몇몇 다른 사람들은 '지방 자치'를 호소한다. 지역 공동체들은 한때 자치권을 가졌었다. 그러나, 그러한 자치는 지역 공동체들이 공공 시설, 컴퓨터 네트워크, 고속도로 망, 대중 매체, 현대 건강 관리 시스템 등과 같은 거대한 규모의 시스템과 연결되고 의존하게 됨에 따라 점점 더 가능성이 줄어들고 있다. 한 지역에 적용된 기술이 종종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또한 자치를 방해한다. 샛강 주변에서의 살충제나 화학약품의 사용은 수백여 마일 떨어진 하류의 상수원을 오염 시킬 수도 있고, 온실효과는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시스템은 인간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대신 인간의 행동이 시스템의 요구에 맞춰 수정되어야 한다. 이것은 기술적인 시스템을 유도하는 것 처럼 보이는 정치적인 혹은 기술적인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하다. 시스템은 이데올로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술적인 필요에 의해 유도되기 때문에 그것은 기술의 잘못이다. [18] 물론 시스템은 많은 인간의 요구를 충족시켜주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것이 그렇게 하는것이 시스템에 유익한 한에서는 그렇게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스템의 요구이지 인간의 요구가 아니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이 굶주린다면 시스템은 재대로 기능하지 않기 때문에 시스템은 사람들에게 음식을 공급한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침체되어 빠져있거나 반항적이라면 시스템은 제대로 기능하지 않기 때문에, 쉽사리 가능할 때 마다, 시스템은 사람들의 심리적인 요구를 봐준다. 그러나, 시스템은, 합당한, 학고한, 실용적인 이유에 의해, 사람들이 그들의 행위를 시스템의 요구에 맞추도록 끊임없이 압력을 가해야한다. 너무 많은 쓰레기가 쌓이는가? 정부, 매체, 교육 제도, 환경주의자, 모두들 우리에게 재활용에 관한 대량의 선전을 퍼뜨리고 있다. 더 많은 기술인이 필요한가? 한떼의 목소리들이 어린이들에게 과학을 공부하도록 권한다. 아무도 청년들에게 그들의 많은 시간을 그들 대부분이 싫어하는 주제를 공부하는데 보내도록 강요하는 것이 비인간적인 것인지를 물어보려 하지 않는다. 숙련된 노동자가 기술적 진보에 의해 직장에서 쫓겨나서 '재교육'을 받아야 하게 될때도, 아무도 그들이 그런식으로 내몰리는 것이 잔인하지 않는가를 물어보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은 기술적인 필요성과 합당한 이유에 굴복해야 한다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만약 인간의 요구가 기술적인 요구보다 앞서 놓여진다면 경제 문제들, 실업, 물자 부족 및 더 심각한 사태가 발생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정신 건강'의 개념은 개인이 사회의 요구에 발맞추어 행동하고 스트레스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으로 대개 정의되고 있다.
시스템 내에서 목적의식과 자율을 위한 여건을 만드려는 노력은 농담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어떤 회사에서, 각 종업원이 목록의 오직 한 부분만을 조립하도록 하는 대신에 전 목록을 조립하게 한다면 이것은 그들에게 목적의식과 성취동기를 부여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어떤 회사는 종업원들에게 그들의 작업에 있어서 더 많은 자율을 주려고 시도했었다. 그러나, 실용적인 이유로, 이는 대개 매우 제한된 정도로만 행해질 수 있다. 그리고 어느 경우에서나 종업원은 궁극적인 목적에 비하자면 어떤 자율도 부여받지 못했다. -- 그들의 "자율적인" 노력은 결코 그들 자신이 직접 선택한 목표로 향하지 못했고 오직 회사의 생존과 성장과 같은 고용주의 목표만을 향했다. 그들의 종업원에게 그와는 달리 행동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어떤 기업도 곧 사업을 그만 두게 될 것이다. 비슷하게, 사회주의 체제의 어떤 사업에서도 노동자는 그들의 노력을 사업의 목적에 맞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업은 시스템의 일부로서 그 목적을 다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순전히 기술적인 이유때문에, 대부분의 개인또는 작은 집단이 산업 사회에서 자율권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소기업의 소유자 조차도 단지 제한된 자율권을 가진다. 정부의 규제는 별도로 하고라도, 그는 경제 시스템에 맞추어야 하고 그것의 요구를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에 의해 제한되어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새로운 기술을 개발한다면, 중소기업인은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대개는 그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그 기술을 사용해야만 한다.
기술의 '나쁜'부분은 '좋은'부분과 분리될 수 없다.

산업사회가 자유에 대해 호의적으로 개혁될 수 없는 또 한가지 이유는 현대의 기술은 모든 부분이 다른 부분에 의존하는 통합된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당신은 기술의 '나쁜'부분을 제거하고 오직 '좋은'부분만을 취할 수는 없다. 현대 의학을 예로 들어보자. 의학에서의 진보는 화학, 물리학, 생물학, 전산학, 그리고 다른 분야들의 진보에 의존한다. 개선된 진료법은 기술적으로 진보되고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회에서나 가능한 비싼 하이테크 장비를 필요로 한다. 분명히, 모든 기술적 시스템과 그에 필요한 제반의 것들 없이는 의학에서의 많은 진보는 있을 수 없다.
의학의 진보가 나머지 기술적 시스템 없이 이루어 진다 할지라도, 그 자체로서 어떤 해악을 가지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당뇨에 대한 치료법이 발견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당뇨에 대한 유전적 경향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계속 생존하여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식들을 낳을 것이다. 당뇨를 가진 유전자에 대한 자연 선택은 멈추고 그러한 유전자들은 사람들 사이에 퍼지게 될 것이다.( 당뇨가 완치될 수는 없지만 인슐린에 의해 억제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은 이미 어느 정도 발생하고 있다.) 같은 일이 인류의 유전적 퇴화에 의해 영향을 받는 다른 질병 감염과 관련해 일어날 것이다. 유일한 해결책은 일종의 우생학 프로그램이나 광범위한 인류에 대한 유전 공학일 것이며, 그러므로 미래의 인간은 더이상 자연이나 우연의 또는 신( 당신의 종교적인 혹은 철학적인 믿음에 따라)의 창조물이 아니라 생산품일 될 것이다.
만약 당신이 거대한 정부가 지금 당신의 생활에 너무 많이 간섭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정부가 당신의 자녀의 유전적 구성을 규제하기 시작할 때까지 한번 기다려보라. 규제받지 않는 유전 공학의 결과는 엄청날 것이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유전공학의 도입후에 그러한 규제가 불가피하게 따를 것이다.[19]
그러한 문제에 대한 대개의 반응은 "의학 윤리"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윤리의 규약은 의학의 진보에 대항하여 자유를 보호하는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유전 공학에 적용되는 윤리의 규약은 실제로는 인간의 유전적 구성을 규제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누군가는(아마도 대개는 중산층이 되겠지만) 그러한 유전공학의 적용이 "윤리적"이라고 판단할 것이며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그들은 대개의(at large) 인간들의 유전자 구성에 그들의 가치를 부여하게 될 것이다. 윤리의 규약이 철저히 민주적인 기반위에서 선택되었다고 할지라도 다수는 어떤 것이 유전공학의 윤리적인 사용인가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다른 소수들에 대해 자신들의 가치를 강제하게 될 것이다. 진정으로 자유를 보호하는 윤리의 규약은 인간에 대한 어떠한 유전자 조작도 금지하는 것일 것이지만 당신은 그러한 규약은 산업사회에서는 절대로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생체공학의 엄청난 위력에 의해 제시되는 유혹은 거부할 수 없고, 특히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것의 적용은 분명하고도 명백하게 좋아보이기 때문에(육체적 정신적 질병을 제거하고, 사람들에게 현대 세계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능력을 주니까), 유전공학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어떠한 규약도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불가피하게, 유전공학은 광범위하게, 그러나 오직 산업-기술 사회의 요구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사용될 것이다.[20]
기술은 자유를 향한 열망보다 더 강력한 사회적 권력이다.

기술과 자유사이의 지속적인 타협을 유지하는 것은, 기술이 훨씬 더 강력한 사회적 권력이고 반복되는 협상을 통해 계속해서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최초에 같은 크기의 땅을 소유하고 있던, 하지만 한쪽이 다른쪽보다 힘이 센, 두 이웃의 경우를 상상해보자. 더 힘이 센 쪽이 상대의 땅의 일부분을 요구한다. 약한쪽은 거절한다. 힘이 센 쪽이 말한다. "좋소, 타협을 합시다. 내가 요구한 것의 절반을 주시오." 약한쪽은 굴복하는 수 밖에 도리가 없다. 얼마후에, 힘이 더 센쪽이 땅의 다른 부분을 요구하고, 다시 타협이 이루어지고, 계속해서 이런 식이다. 약한쪽에 대해 일련의 타협을 강요함으로써, 힘이 더 센쪽은 결국은 그의 모든 땅을 얻는다. 기술과 자유사이의 갈등에서도 그러하다.
왜 기술이 자유를 향한 열망보다 더 강력한 사회적 권력인지 설명해 보이겠다.
자유를 위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기술상의 진보는 종종 자유를 위협하는 것으로 밝혀지며 나중에 가서는 종종 그것을 매우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으로 밝혀진다. 예를 들어, 차량 운송에 대해 생각해 보자. 도보자는 전에는 그가 원하는 어디든, 어떤 교통 법규도 살피지 않고 자신의 페이스대로 갈 수 있었고 기술적인 지원시스템에 독립적이었다. 자동차가 소개되었을 때 그것들은 인간의 자유를 증진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들은 도보자로 부터 어떠한 자유도 박탈하지 않았으며,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자동차를 가질 필요가 없었고, 자동차를 사기로 선택한 사람은 도보자보다 훨씬 빨리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차량 운송의 도입은 곧 사회를 인간의 이동의 자유를 상당히 제한하는 방향으로 바꾸었다. 자동차가 매우 많아졌을 때, 그것들의 사용을 광범위하게 규제할 필요가 생겼다. 특히 인구가 밀집된 지역에서는, 차를 몰고서는 자신이 원하는 곳에 자신의 페이스대로 갈 수는 없다. 그의 움직임은 교통의 흐름과 여러가지 교통법규에 의해 좌우된다. 운전자는 여러가지 의무에 묶여 있다. 면허 취득, 운행 테스트, 갱신 등록, 보험, 안전에 필요한 유지, 월부 자동차 할부금. 게다가, 차량 운송수단의 사용은 더이상 선택적인 것이 아니다. 차량 운송수단의 도입 이후로 도시 배치는 대다수의 사람이 더이상 그들의 직장, 쇼핑지역과 여가선용지역으로 부터 걸어서 갈 수 있는 지역에 살지 않도록, 그래서 그들이 교통을 위해 자동차에 의존해야만 하도록 바뀌었다. 혹은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해야만 하는데, 이 경우에는 그들은 자가용을 몰때보다 그들 자신의 이동에 대해 훨씬 더 적은 통제력을 가지게 된다. 도보자의 자유또한 이제는 매우 제한된다. 도시에서는 그는 반복해서 멈추고는 자동차 통행을 위주로 설계된 교통 신호를 기다려야 한다. 지방에서는 자동차 통행이 고속도로를 따라 걷는 것을 위험하고 불쾌하게 만든다. ( 우리가 차량 운송의 사례와 함께 제시한 중요한 논점에 주의하라. 기술의 새로운 요소가 그가 선택하는 대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는 선택으로서 도입되었을 때, 그것은 반드시 선택적인 것으로 남아있지는 않는다. 많은 경우에, 새로운 기술은, 사람들이 결국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강요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바꾼다.
기술적인 진보가 '대체로' 끊임없이 우리들의 자유의 영역을 축소시키는 반면에, 각각의 새로운 기술적 진보는 그 자체로서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된다. 전기, Indoor Plumbing, 급속한 장거리 통신... 어찌 이러한 것들 또는 어떠한 다른 수없이 많은 현대 사회를 만든 기술적 진보들을 반대할 수 있겠는가? 예를 들어 전화의 도입을 반대한다면 어리석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많은 장점을 제공했지만 어떠한 단점도 제공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단락 59-76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결합된 모든 이러한 기술적 진보들은 보통 사람들의 운명이 더이상 그 자신이나 그의 이웃이나 친구의 손이 아닌 개인이 영향을 미칠 힘이 없는 정치가, 기업의 중역, 그리고 떨어진 익명의 기술자와 관료의 손에 매달려 있는 사회를 만들었다.[21] 같은 과정이 미래에도 계속된다. 유전 공학을 예로 들어보자. 거의 아무도, 유전적 질병을 제거하는 유전학 기술의 도입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명백한 해도 주지 않고 많은 고통을 예방한다. 하지만 결합된 많은 수의 유전학적 개선은 인간을 우연(혹은 신, 혹은 당신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무엇이든)의 자유로운 창조물 이 아니라 공학적 생산품으로 전락시킬 것이다.
기술이 강력한 사회적 권력인 또다른 이유는, 주어진 사회의 배경속에서 기술적 진보는 오직 한 방향으로만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 방향은 결코 되돌려 질 수 없다. 일단 어떤 기술혁신이 도입되면 사람들은 대개 그것에 의존하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어떤 훨씬 더 진보된 혁신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 사람들이 개인으로서 기술의 새로운 요소에 의존하는 것 뿐만아니라, 훨씬 더, 시스템도 대체로 그것에 의존하게 된다.( 만약, 예를 들어, 컴퓨터가 없어진다면 현재의 시스템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상상해보라.) 그러므로 시스템은 더 거대한 기술화(technologization)를 향해 오직 한 방향으로만 나아간다. 기술은 계속해서 자유가 한발짝 더 물러서도록 -- 전 기술 시스템의 타도에 못 미치게 -- 강요한다.
기술은 급격히 빠르게 진보하며 동시에 많은 다른 부분에서 자유를 위협한다.( 알력, 규칙과 규제, 증가하는 큰 집단에 대한 개인의 의존, 선전, 그리고 다른 심리적 기술, 유전 공학, 감시 장치와 컴퓨터를 통한 개인의 사생활 침해 등) 자유에 대한 위협 중 어느 하나라도 억제하기 위해서는 길고 어려운 투쟁이 필요하다. 자유를 보호하길 바라는 사람들은 새로운 공격의 절대적인 숫자와 그것이 발전하는 속도에 압도당하여, 비참해지고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을 것이다. 위협들의 각각과 따로따로 싸우는 것은 무익할 것이다. 오직 기술 시스템 전체와 싸울 때만이 성공이 기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혁명이지 개혁이 아니다.
기술자들(우리는 이 용어를 훈련을 필요로 하는 전문화된 작업을 수행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광법위한 의미로 사용할 것이다.)은 그들의 일에 너무나 열중해 있어서 그들의 기술적인 작업과 자유사이에 갈등이 발생할 경우에는 거의 언제나 그들의 기술적 작업에 대해 호의적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과학자의 경우에 명백하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도 역시 나타난다. 교육자들, 인도주의 단체들, (환경)보호 단체들은 그들의 거창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선전과 다른 심리적인 방법들을 사용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기업들과 정부 기관은, 그것이 유용하다고 판단될 때,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아랑곳 않고 그들에 관한 정보를 모으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법 집행기관은 용의자 내지는 흔히 완전히 결백한 사람들의 헌법상의 권리때문에 종종 불편을 느낀다. 그래서 그들은 그러한 권리를 제한하거나 기만하기 위해서 합법적으로(또는 때로는 불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면 뭐든지 한다. 이러한 교육자들, 정부 공무원, 그리고 법률가 대부분은 자유, 프라이버시, 그리고 헌법상의 권리를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그들의 일과 갈등을 일으킬 때 는 그들은 대개 그들의 일이 더욱 중요하다고 느낀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처벌이나 부정적인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 보다는 보상을 위해 분투할 때 더 잘, 그리고 더 꾸준히 일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과학자들 그리고 다른 기술자들은 대개 그들의 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보상에 의해 고무된다. 그러나 자유에 대한 기술의 침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부정적인 결과를 피하기 위해 일하고 있으므로, 결과적으로 이러한 비관적인 일을 꾸준히 그리고 잘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만약 개혁가들이, 기술적 진보를 통한 더 이상의 자유의 침해를 막을 견고한 방벽을 쌓은 것처럼 보이는, 현저한 승리를 거둔다면, 대부분은 안도하여 그들의 주의를 더욱 마음에 드는 목표에 돌리려 할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그들의 연구실에서 계속 바쁜 상태로 있고, 기술은 그것이 진보함에 따라 어떤 방벽에도 불구하고 방법을 찾아내어 개인에 대한 더욱 더 많은 통제력을 행사하고 그들로 하여금 항상 시스템에 더욱 의존하도록 만들 것이다.
법이든 제도든 관습이든 윤리적 규범이든 간에, 어떠한 사회적 장치도 기술에 대항한 영속적인 보호를 제공할 수는 없다. 역사는 모든 사회적 장치들은 일시적인 것이어서, 그것들은 결국에는 모두 바뀌거나 무너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기술적 진보는 주어진 문명의 배경에서 영속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유전 공학이 인간에게 응용되거나 또는 자유나 존엄을 위협하는 쪽으로 사용되는 것을 방지하는 사회적 장치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가정해 보자. 여전히 기술은 기다리고 있다. 조만간 사회적 장치들은 무너질 것이다. 아마도 곧, 우리 사회에서 변화의 움직임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면 유전 공학은 우리의 자유의 영역을 침법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침범은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기술 문명 자체의 붕괴에는 못미친다.) 사회적 장치를 통해서 영속적인 어떤 것을 얻으려는 환상은 현재 환경 입법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의해 떨쳐져야만 한다. 몇 년전에, 적어도 환경 파괴의 최악의 형태중 몇몇은 막을 수 있는 안전한 법적 방벽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치계의 정세의 변화로 그러한 방벽들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앞서 제시한 모든 이유들로 인해, 기술은 자유를 향한 열망보다 더욱 강력한 사회적 권력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제는 중요한 전제 조건을 필요로 한다. 다음 수십년 동안 산업-기술 시스템은 경제, 환경 문제, 그리고 특히 인간의 행위(불화, 반란, 적의, 여러가지 사회적 심리적 난제들)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스스템이 겪게 될 고통이 그것을 붕괴시키기를 바란다. 그러한 혁명이 일어난다면 그리고 성공한다면, 바로 그 때에는 자유를 향한 열망이 기술보다 더욱 강력함을 입증할 것이다.
단락 125에서 우리는 일련의 타협을 강요함으로써 모든 땅을 뺏어가는 힘센 이웃에 의해 궁핍한 상태에 있는 약한 이웃의 비유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제 힘센 이웃이 병들어서 그가 자신을 방어할 수 없다고 가정해 보자. 약한 이웃은 힘센 이웃에세 그의 땅을 돌려줄 것을 강요하거나 그를 죽일 수도 있다. 만약 그가 강자가 살아남도록 하고 단지 그의 땅만 되돌려 줄 것을 강요한다면 그는 바보이다. 왜냐하면 강자가 회복하면 그는 다시 모든 땅을 그의것으로 할 것이이기 때문이다. 약한자의 유일한 현명한 선택은 그에게 기회가 주어졌을때 강자를 죽이는 것이다. 같은 방법으로, 산업 시스템이 병들어 있을때 우리는 그것을 파괴하여야 한다. 만약 우리가 그것과 타협을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질병으로 부터 회복하도록 한다면, 그것은 결국에는 우리의 모든 자유를 없앨 것이다.
단순한 사회문제조차도 우리는 제어할 수 없었다.

누군가 아직도 테크놀로지로부터 자유를 보호하면서 체제를 개혁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꿈을 꾸고 있다면, 우리 사회가 훨씬 더 간단하고도 단순한 사회 문제들조차 참으로 엉성하게 다루다가 결국에는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해왔다는 사실을 차분히 생각해 보기 바란다. 체제는 환경 파괴, 정치 부패, 마약 거래, 가정 내 폭력 등의 간단한 문제도 근절시키지 못했다.
환경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여기서 가치의 갈등은 단순하다. 현재의 경제적 편의와 우리가 후손들을 위해 자연 자원의 일부를 저축해 두는 것 사이의 갈등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주제에 관해 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권력을 지닌 자들이 지껼이는 도대체 무슨 고리인지도 모를 헛소리이다. 명확하고 일관된 행동은 찾아볼 수도 없다. 그러는 와중에 우리 후손들은 그 문제들을 안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환경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들은 서로 다른 파벌 간의 투쟁과 타협으로 점철된다. 어느 때는 한쪽이 주도권을 잡았다가 어느 때는 다른 쪽이 주도권을 잡는다. 투쟁의 노선은 여론이 흘러가는 대로 계속 바뀐다. 이것은 결코 합리적인 과정ㄷ 아니며ㅡ 문제를 적시에 제대로 풀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중요한 사회의 문제들은 설령 '해결될' 수 있다 해도, 합리적이며 포괄적인 계획을 통해서는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수많은 경쟁 집단들이 저마다의 (대개는 그저 운이 좋아서) 간신히 타협점을 찾아낼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문단 100~106에서 제시했던 역사적 원칙들을 생갹하면, 합리적이고 장기적인 사회적 계획이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
그러니 명백한 사실은, 인류는 비교적 단순한 사회 문제조차도 어쩌다 겨우 풀 수 있을 만큼 무능력하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자유와 테크놀로지의 공존이라는 훨씬 더 어렵고 미묘한 문제를 대체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테크놀로지가 명백한 물질적 장점을 제시하는 반면, 자유는 백 사람이면 백 사람에게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니는 추상적 개념이다. 게다가 자유의 상실은 프로퍼갠더와 달콤한 거짓말로 쉽게 감출 수 있다.
중요한 차이를 기억하기 바란다. (예를 들어) 언젠가 우리의 환경 문제가 합리적이고 포괄적인 계획을 통해 해결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환경 문제가 해결된다면, 그것은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볼 때 체제에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와 작은 집단의 자율성을 보존하는 것은 체제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 반대로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인간 행동을 통제하에 두는 것이 체제에 이익이 된다. 그러니 실질적인 이유 때문에 체제가 억지로나마 환경 문제에 대해 합리적이고 신중하게 접근할 수도 있는 반면, 똑같은 실질적인 이유 때문에 체제가 보다 더 치밀하게 (대개는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간접적 수단을 통해서) 인간 행동을 규제할 수도 있다. 이것은 우리만의 견해가 아니다. 저명한 사회과학자들 (제임스 윌슨 같은) 역시 보다 효과적으로 사람들을 '사회화'하는 것의 중요성을 줄곧 강조해 왔다.
혁명이 개혁보다 쉽다.

우리는 독자들이 자유와 테크놀로지를 화해시키는 방식으로는 체제가 개혁될 수 없다는 사실을 똑똑히 인식했기를 희망한다. 단 하나의 방법은 산업-테크놀로지 체제를 모조리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혁명을 의미한다. 이 혁명이 반드시 무장 봉기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사회의 본질을 뿌리부터 근본적으로 바꿔 놓는 것이어야 함은 분명하다.
사람들은 흔히 혁명이 개혁보다 훨씬 더 많은 변화를 담고 있으므로 개혁보다 더 완수해 내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정한 조건하에서는 혁명이 개혁보다 훨씬 더 쉽다. 혁명은 개혁이 이룰 수 없는 정도의 강력한 몰입력을 사람들에게 불어넣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개혁 운동은 고작해야 특정한 사회 문제의 해결을 제안할 뿐이다. 혁명 운동은 단번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것을 제안한다. 따라서 테크놀로지의 어떤 한 분야(가령 유전 공학과 같은)의 개발과 응용을 효과적으로, 또 지속적으로 제한하는 일보다는, 아예 테크놀로지 체제 전체를 폐기해 버리는 편이 훨씬 더 쉽다. 오로지 유전 공학을 제한하는 일에만 정열을 다 바칠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제대로 조건만 된다면 아주 많은 사람들이 산업-테크놀로지 체제에 항거하는 혁명에 몸을 바칠 것이다. 문단 132에서 지적했듯이 테크놀로지의 특정 부문을 제한하고자 하는 개혁가들은 그저 부정적인 결과를 피하기 위해 일하는 것이다. 하지만 혁명가들은 엄청난 보상을 얻기 위해 일한다.
변화가 너무 과도하게 진행될 경우에 초래될 고통스러운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개혁은 언제나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일단 혁명의 열기가 사회를 장악하는 날에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그 어떤 어려움도 기꺼이 감수한다.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에서 그런 사실은 이미 증명되었다.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에서 정말로 혁명에 자신의 전부를 바친 사람은 전 인구 중의 소수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소수는 이미 수적으로는 충분했으며 적극적인 소수였기에 사회의 지배적인 세력이 될 수 있었다. 혁명에 관해서는 문단 180~205에서 더 자세히 논의하게 될 것이다.
인간 행동의 통제

문명이 시작될 때부터 조직 사회는 사회 유기체의 기능 수행을 위해서 인간에게 억압을 가해 왔다. 억압의 종류는 사회에 따라 판이하게 다르다. 어떤 억압이 육체적인 것이라면 (나쁜 음식, 과도한 노동, 환경 공해), 어떤 억압은 심리적인 것이었다.(소음, 인구 과밀,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의 인간 행동의 개조) 과거에는 인간의 본성은 대개 일관성을 유지했고, 달라진다 해도 한정된 범위안에서 달라졌을 뿐이다. 그 때문에 사회가 사람들을 몰아치는 데도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인간이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을 때 사태는 잘못되기 시작한다. 반란, 범죄, 부패, 노동 회피,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 질환, 사망률의 증가, 출산율의 감소 등으로 인해 사회가 붕괴될 수도 있고, 아니면 사회의 기능 수행이 너무나 비효율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탓에 결국 보다 효율적인 다른 형태의 사회로(신속하게 또는 서서히, 정복이나 쇠퇴, 진화를 통해서) 대체되기도 한다.
과거에는 인간의 본성으로 인해 사회의 발전에 일정한 한계가 주어졌다. 사람들을 몰아 세우는 일도 어느 정도까지만 가능했다. 그러나 오늘날 상황이 바뀌고 있다. 현대 테크놀로지가 인간을 개조하는 방법을 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끔찍하게 불행한 조건 아래 몰아넣고 나서 이번엔 사람들에게 그들의 불행을 잊어버릴 수 있는 약물을 건네주는 사회를 상상해 보라. SF소설이냐고?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이미 어느 정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최근 몇십년 간 우울증의 발병률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는 그것이 문단 59~76에서 설명한 대로 권력 과정의 붕괴로 인해 빚어진 것이라고 믿는다. 설령 우리가 틀렸다해도, 우울증의 증가는 분명히 오늘의 사회에 존재하는 어떤 조건이 빚어낸 결과다. 가람들을 절망에 빠뜨리는 조건을 제거하는 대신에, 현대 사회는 사람들에게 항우울제(抗憂鬱劑)를 건네주고 있다. 실제로 항우울제는 개인의 정신 상태를 개조하는 수단이다. 항우울제를 먹어 가며, 그 약을 먹지 않고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사회적 조건을 이겨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우리도 우울증이 때로는 순전히 유전적 윈인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예로 든 것은 환경이 주된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의 우울증이다.)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약물은 현대 사회가 개발중인 새로운 인간 행동 통제용 수단들 가운데 해나에 불과하다. 또 다른 수단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감시 기술을 들 수 있다. 이제 거의 모든 상점과 기타 많은 장소에 숨겨진 비디오 카메라가 사용되고 있다. 컴퓨터는 어마어마한 양의 개인 정보를 수집하고 처리한다. 그렇게 얻어진 정보는 물리적 강제력을 대폭 증강시킨다(교도 기관 등). 이어서 매스 미디어가 효과적인 매개체 역할을 해 주는 프로퍼겐더를 들 수 있다. 선거에서 승리하고, 상품을 팔고, 여론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효과적인 기법들이 개발되어 왔다. 오락 산업은 그것이 엄청난 섹스와 폭력을 퍼부을 때조차도 여전히 체제의 중요한 심리적 도구 역할을 수행하나. 오락은 현대인에게 있어 필수적인 도피 수단이다. 텔레비젼과 비디오에 빠져있는 동안 현대인은 스트레스와 불안, 좌절, 불만을 잊어버릴 수 있다. 원시인들은 할 일이 없을 때면 그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몇 시간이고 앉아 있을 수 있었고, 거기에 불만을 품지도 않았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건 세강에 대해서건 그들은 아무런 갈등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인은 끝없이 무엇인가에 몰두해야 하고, 아니면 오락거리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 '권태'에 빠지게 된다. 안절부절, 좌불안석, 신경질이 그 권태의 양상이다.
또 다른 기법들은 감시와 프로퍼갠더를 훨씬 능가한다. 교육은 이제 더 이상 아이가 배운 것을 모르면 엉덩이를 때리고, 잘 알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식의 간단한 일이 아니다. 교육은 이제 어린이의 성장을 통제하는 과학적 기법이 되어 가고 있다. 예를 들어 실반 학습 센터(Sylvan Learning Center)는 아이들에게 공부에 빠져들도록 만드는 데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고, 전통적인 학교에서도 점차 심리적 기법들을 성공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부모들은 아이들로 하여금 체제의 기본적 가치 체계를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자녀 양육법'을 배우고, 체제가 바람직한 것으로 제시하는 방식대로 행동한다. '정신 건강' 프로그램, '중재' 기법들, 심리 요법 등은 겉으로 보기엔 개인의 행복을 위해 고안된 것 같지만, 사실은 개인들이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주입하는 수단으로서 이용된다. (여기에 모순은 전혀 없다. 어떤 개인이 지닌 태도와 행동이 체제와 갈등을 일으킨다고 할 때, 그 개인은 도저히 자기 힘으로는 이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로부터 달아날 수도 없을 만큼 강력한 세력에 대해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개인은 스트레스와 좌절, 패배감으로 인해 고통받을 수 밖에 없다. 만약 그가 그저 체제가 요구하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인생이 훨씬 편해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체제가 개인을 세뇌해 순응하도록 만드는 것은 곧 개인의 행복을 위해 선행을 베풀고 있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문화권에서는 어린이 학대를 금지하고 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사소한 이유로, 또는 아무 이유 없이 어린이를 매질하는 것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 그런데 심리학자들은 학대의 개념을 훨씬 더 확대해서 해석한다. 이성적이고 일관된 훈육체계의 한 부분으로서 엉덩이 때리기는 학대에 해당하는가? 거기에 대한 대답은 궁극적으로 엉덩이를 때리는 것이 아이의 행동을 사회의 현존 체제에 적절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냐 아니냐의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실제로는, '학대'라는 단어는 체제를 불편하게 만드는 행동을 조장하는 모든 종류의 어린이 양육 방법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어린이 학대' 방지 프로그램이 명백하고 무자비하게 잔인한 학대를 막는 범위를 넘어설 때, 그 프로그램은 체제를 위해 인간 행동을 통제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예상컨데 각종 연구를 통해 인간 행동을 통제하기 위한 심리적 기법들의 효과는 끝없이 커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기에 심리적 기법만 가지고 지금 테크놀로지에 의해 창조되고 있는 사회에 맞춰 인간을 개조하기란 힘들 것 같다. 결국에는 그런 목적을 위해 생물학적 방법이 이용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런 맥락에서 약물이 이용되고 있음을 언급했다. 신경학이 아마 인간 정신을 개조하는 데 있어 또 다른 대로()를 마련해 줄 것이다. 인간 유전 공학은 이미 '유전자 치료법'이라는 이름 아래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런 방법들이 결국 정신 기능에 영향을 미치는 신체적 부분까지 개조하는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아무 데도 없다.
문단 134에서 언급했듯이, 산업 사회는 한편으로 인간 행동의 문제 때문에, 또 한편으로 경제 문제와 환경 문제 때문에, 심각한 스트레스를 겪는 단계로 진입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체제의 경제 문제와 환경 문제의 상당 부분은 인간의 행동 양식에 의해 빚어진 문제다. 소외, 자기 비하, 절망, 적대감, 반항, 공부 안 하는 아이들, 청소년 갱단, 불법 약물 복용, 강간, 어린이 학대, 기타 범죄, 무분별한 섹스, 10대 임신, 인구 증가, 정치적 부패, 인종 간의 증오, 민족 갈등, 극심한 이데올로기 투쟁(낙태 찬성론과 반대론 간의 투쟁 같은), 정치적 극단주의, 테러리즘, 사보타지, 반정부 단체들, 증오 집단, 이 모든 것들이 체제의 생존 자체를 위협한다. 체제는 결국 어쩔 수 없이 인간 행동을 통제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야만 할 것이다.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사회 붕괴 현상은 분명 단순한 우연의 결과가 아니다. 체제가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삶의 조건들이 빚어낸 결과일 뿐이다(우리는 앞에서 이들 조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권력 과정의 붕괴임을 밝혔다.) 만약 체제가 인간 행동을 완전히 통제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 때 인간의 역사는 새로운 분수령을 넘어서게 될 것이다. 예전에는 인간이 지닌 인내심의 한계 때문에(문단 143~144에서 설명한대로) 사회의 발전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산업-테크놀로지 사회는 심리적 방법이나 생물학적 방법, 아니면 그 둘을 사용해 인간을 개조함으로써 그런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미래의 사회 체제는 인간의 욕구에 맞춰 적응하지 않는다. 반대로 인간이 체제의 욕구에 맞춰 적응하게 될 것이다.
인간 행동에 대한 테크놀로지의 통제가 전체주의적 의도에서, 또는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의식적 욕망에서 시작되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 정신에 대한 통제가 하나씩 새롭게 등장할 때, 그것은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합리적 반응으로서 간주될 것이다. 알콜 중독을 치료한다든지, 범죄를 줄인다든지, 젊은이들을 과학과 공학 연구에 몰두하도록 한다든지하는 식으로 말이다. 많은 경우에 통제는 인도주의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날 것이다. 예를 들어 정신과 의사가 우울증 환자에게 항우울제를 처방해 줄 때, 의사는 분명히 그 개인에게 호의를 베풀고 있는 것이다. 약이 필요한 사람으로부터 약을 빼앗아 버리는 것이야말로 비인간적인 짓이다. 부모들이 자녀를 실반 학습 센터에 보내 공부에 열광하는 아이들로 만드는 것은, 부모들이 아이들의 행복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런 부모들 중에 어떤 사람은 자신이 직업을 얻기 위해 받아야만 했던 전문가 훈련을 다른 이들은 더 이상 받지 않기를, 그리고 자기 자식은 더 이상 세뇌를 통해 컴퓨터 귀신이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부모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들은 사회를 바꿀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의 아이가 어떤 기술을 익히지 못하면 실업자가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이를 실반 학습 센터에 보낸다.
인간 행동에 대한 통제는 정부 당국의 치밀한 계산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 진화(단, 고속 진화이다.)의 과정을 통해서 시작될 것이다. 그 과정에 저항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각각의 진보는 그 자체만 놓고 볼 때는 이익이 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최소한 진보를 이루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해악이 나중에는 이익이 되거나, 진보하지 않을 때 빚어지는 결과보다는 진보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해악이 덜 해롭기 때문일 수도 있다(문단 127을 보라). 프로퍼겐더만 해도 어린이 학대 금지나 인종 분쟁 근절과 같이 여러 가지 좋은 목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 성교육은 분명히 유용한 것이지만, 성교육으로 인해(그것이 성공할 경우) 아이들에게 성에 관한 자세를 형성하도록 도와주는 임무는 가족의 손을 떠나 공립 학교 체제로 대표되는 국가의 손으로 넘어가 버린다.
가령 어린이가 범죄자로 성장할 가능성을 높이는 생물학적 인자가 발견된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모종의 유전자 치료법이 그런 인자를 제거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물론 그런 인자를 가진 아이들의 부모는 당연히 아이들을 치료할 것이다. 만약 부모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인간적 행위가 될 것이다. 아이가 그래도 커서 범죄자가 되면 불행한 삶을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원시 사회에는 하이테크 자녀 양육법이나 가혹한 처벌 시스템이 없었어도, 그 범죄 발생률은 우리 사회에 비해 훨씬 낮다. 현대인이 원시인보다 훨씬 강한 야수적 경향을 지니고 있다고 가정할 근거는 없다. 따라서 우리 사회의 높은 범죄율은 현대적 환경이 사람들에게 가하는 압박 때문임이 틀림없다. 많은 사람들은 그 압박에 적응할 수 없고, 아니면 아예 적응하려고 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러니 잠재적인 범죄 성향을 제거하기 위한 치료법은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사람들을 리엔지니어링하는 식으로 이루어질 것이고,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체제가 요구하는 조건에 자신을 맞춰 갈 것이다.
우리 사회는 체제와 맞아떨어지지 않는 모든 종류의 생각이나 행동을 '질병'으로 간주한다. 어느 개인이 체제에 적응하지 못할 때 그것은 체제에 문제가 될 뿐만 아니라 개인도 고통을 겪게 되므로, '질병'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그러니 체제에 적응하도록 개인을 조작하는 것은 '질병'에 대한 '치료'이고, 좋은 일이다.
문단 127에서 우리는 새로운 테크놀로지 제품의 사용이 처음에는 선택 사항이었다 해도 반드시 선택 사항으로 남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그 테크놀로지를 이용하지 않고는 개인이 기능을 수행하기가 어렵거나 불가능한 방식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 행동을 통제하는 테크놀로지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아이들이 공부에 열광하도록 만드는 프로그램에 대부분의 아이들을 보내는 세상에서는 어느 부모라도 어쩔 수 없이 자기 아이를 그 프로그램에 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가 무식한 인간으로 자라날 것이고, 따라서 직업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우리 사회의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심리적 스트레스를 크게 줄여 줄 수 있는, 그러면서 부작용도 없는, 그런 생물학적 치료법이 개발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는다면 사회의 전반적인 스트레스 수준이 떨어질 것이고, 그러면 사회는 다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억압을 증가시킬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이미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다.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덜어 주는(아니면 최소한 일시적으로 스트레스로부터 달아나게 해 주는)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심리적 도구의 하나인 이른바 대중 오락에서 벌어지는 일이다(문단 147을 보라). 우리가 대중 오락을 이용하는 것은 '선택 사항'이다. 우리더러 텔레비전을 보고, 라디오를 듣고, 잡지를 읽으라고 요구하는 법률은 없다. 그런데도 우리들 대부분은 도피와 스트레스 감소의 수단으로 점점 더 대중 오락에 의존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텔레비젼을 쓰레기통 같다고 불평한다. 거의 모든 사람이 텔레비젼을 본다. 소수의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보는 습관을 벗어 던졌다. 하지만 대중 오락을 전혀 이용하지 않으면서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역 공동체가 스스로 창조한 오락거리 말고는 일체의 오락없이도 아주 잘 살아왔다.) 만약 오락 산업이 없었다면, 체제가 지금 하고 있는 식으로 우리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억압을 가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산업 사회가 살아남는다고 가정하면, 마침내 테크놀로지는 안간 행동에 대해 완전한 통제를 행사할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인간의 생각과 행동이 상당 부분 생물학적 토대를 갖고 있다는 데는 이제껏 별다른 이론이 없었다.연구자들이 밝혀 냈듯, 뇌의 특정 부분에 전기 자극을 가함으로써 배고픔, 기쁨, 분노, 공포 등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가라앉힐 수도 있다. 뇌의 어느 부분을 다치면 기억이 사라져 버릴 수도 있으며, 전기 자극에 의해 그렇게 잊혀진 기억이 다시 떠오를 수도 있다. 약물로 환각을 일으킬 수 있으며, 분위기를 바꿀 수도 있다. 비물질적인 영혼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설령 영혼이 있다고 해도 인강 행동이 지닌 생물학적 메커니즘보다는 분명히 힘이 약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약물과 전류를 가지고 인간의 감정과 행동을 그렇게 쉽사리 조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머리 속에 전기 장치를 달고 정부 당국에 의해 통제된다는 것은 아마 황당무계한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생각과 행동이 생물학적 간섭에 그토록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다는 사실은 인간 행동 통제라는 문제가 기본적으로 기술적 문제임을 보여준다. 문제는 뉴런과 호르몬, 고분자다. 과학은 얼마든지 그런 문제에 달려들 수 있다. 우리 사회가 기술적 문제의 해결에 보여준 뛰어난 성적을 생각하면, 인간 행동의 통제에도 얼마나 엄청난 진보가 이루어질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대중적 저항을 통해 테크놀로지의 인간 행동 통제를 막을 수 있을까? 만약 통제가 모조리 한꺼번에 시작된다면 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테크놀로지의 통제는 장기간에 걸친 소규모 진보를 통해 등장한다. 그에 따라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대중적 저항도 있을 수 없다.(문단 127, 132, 153을 보라)
이런 얘기가 모두 공상 과학 소설처럼 들린다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제의 공상 과학 소설이 오늘의 현실이라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다. 산업 혁명은 인간의 환경과 생활 양식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이제 테크놀로지가 점점 더 인간의 육체와 정신에 적용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환경과 생활 양식이 그래 왔던 것처럼 인간 그 자체도 역시 근본적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갈림길에 선 인류
이야기가 너무 멀리 나갔다. 문제는 두가지다. 하나는 실험실에서 인간 행동을 조작하기 위한 심리적 또는 생물학적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런 기술을 사회 체제의 기능에 통합시키는 것이다. 두번째 문제가 더 어렵다. 예를 들어, 교육 심리학의 기술은 그것이 개발된 '실험 학교'에서는 두말할 것도 없이 아주 잘 돌아아겠지만, 그것을 우리의 전체 교육 시스템에 효과적으로 적용하기가 반드시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학교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다. 교사는 아이들에게서 칼과 권총을 빼앗느라고 너무 바빠 아이들을 컴퓨터 귀신으로 만들어 낼 새로운 기술을 가르칠 시간이 없다. 인간 행동과 관련된 그 모든 기술적 진보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체제는 인간을 통제하는 데 그다지 크게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래도 상당히 고분고분하게 체제의 통제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은, 이른바 '부르주아'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한편 어떤 식으로든 체제에 저항하는 반항아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사회 보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청소년 갱단, 광신자, 악마 숭배자, 나치, 급진 환경주의자, 민병대 등이 그 반항아들이다.
체제는 지금 그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들과 절망적인 투쟁을 벌이고 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인간 행동의 문제다. 만약 체제가 빠른 시일 내에 인간 행동을 통제할 효과적인 수단을 찾아낸다면, 체제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채제는 붕괴한다. 우리는 앞으로 몇십 년 안에, 즉 40년에서 100년 사이에 결과가 나오리라고 생각한다.
체제가 앞으로 수십 년 간의 위기에서 살아남는다고 가정해 보자. 그 때쯤이면 사회는 중요한 문제들을 다 해결했거나 적어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체제가 해결한 문제 중에는 특히 인간을 '사회화'하는 문제, 즉 더 이상 그들의 행동이 사회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사람들을 순화시키는 문제가 포함된다. 일단 그렇게 되면 더 이상 테크놀로지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없을 것처럼 보인다. 테크놀로지는 인간과 여타의 모든 중요 생물을 포함한 지구 전체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마지막 논리적 귀결점을 향해 진보해 나갈 것이다. 체제는 하나의 단일한 독재적 조직이 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오늘날 정부와 기업체, 기타 다른 대형 조직들이 서로 협동하고 동시에 경쟁하듯, 협동과 경쟁 관계를 맺고 공존하는 몇 개의 분리된 조직들로 나위어질 수도 있다. 인간의 자유는 거의 다 사라져 버릴 것이다. 개인들과 작은 집단들이, 슈퍼 테크놀로지로 무장하고 온갖 감시 장치와 물리적 물리적 강제력은 물론, 인간을 조작하기 위한 수많은 심리적, 생물학적 수단을 갖춘 거대 조직과 맞서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진짜 권력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들조차 아주 제한된 자유만을 누릴 것이다. 그들의 행동에도 역시 규제는 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과 똑같이 정치가와 기업체 중역들은, 그들의 행동이 좁은 한계에 머물러 있는 한, 여전히 권력을 지닌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다가오는 몇십 년 간의 위기가 끝나고 체제의 생존을 위해 통제를 강화하는 것이 불필요해진다고 해서 체제가 인간 행동과 자연을 통제하기 위한 기술 개발을 멈출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말라. 오히려 일단 시련기가 끝나면 체제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통제를 더욱 빨리 강화시켜 갈 것이다. 지금 체제가 겪고 있는 어려움이 더 이상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통제를 확대하는 데 생존은 주된 동기가 아니다. 문단 87-90에서 설명했듯, 기술자와 과학자들은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으로서 자신의 일을 수행한다. 즉,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권력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그들은 미래에도 여전히 식지 않는 열정을 가지고 그 일을 계속할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흥미롭고 도전해 볼 만한 문제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그 성장에 끼여드는 일이 될 것이다. 물론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다.
반대로 이번엔 다가오는 몇십 년 간의 스트레스를 체제가 버티지 못하는 경우를 가정해 보자. 만약 체제가 붕괴하면, '환난의 시대', 즉 역사가들이 과거의 여러 시대에 갖다 붙인 이름대로의 혼란기가 닥쳐올 것이다. 그런 환난의 시대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찌됐든 인간에겐 새로운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가장 위험한 사태는 산업 사회가 붕괴 이후 몇 년 내에 다시 건설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분명히 많은 사람들(특히 권력에 눈이 뒤집힌 족속들)은 공장이 다시 돌아가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산업 체제에 의한 인류의 노예화를 증오하는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의 임무가 주어진다. 첫째, 우리는 체제 안의 사회적 스트레스를 더욱 증가시켜야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체제가 붕괴될 가능성을 높이거나, 아니면 체제에 저항하는 혁명이 일어날 수 있을 정도로 체제를 약화시켜야 한다. 둘째, 체제가 충분히 약해질 때를 대비해 테크놀로지와 산업 사회를 공격하는 이데올로기를 개발하고 널리 확산시켜야 한다. 그런 이데올로기는, 산업 사회가 붕괴되었을 때, 남겨진 잔재를 아예 수리도 불가능하게 날려버리도록 만들어 줄 것이고, 그러면 체제의 재구성도 불가능해질 것이다. 공장은 무너뜨려야 하며, 기술 서적들은 불태워 버려야 한다.

인간의 고통
순전히 혁명적 행동으로만 산업 체제를 무너뜨릴 수는 없다. 산업 체제는 내재적인 발전의 문제로 인해 심각한 장애에 도달하지 않는 한 혁명의 공격에 끄덕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만약 체제가 붕괴한다면, 그것은 갑자기 우발적으로 붕괴하거나, 아니면 부분적으론 우발적이되 혁명가들의 힘이 보태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붕괴할 것이다. 만약 붕괴가 갑작스럽게 이루어지면 많은 사람이 죽게 될 것이다. 세계의 인구는 첨단 테크놀로지 없이는 다 먹여 살릴 수도 없을 만큼 과도하게 늘어나 있기 때문이다. 설령 사망률을 올리는 대신 출산율을 낮춤으로써 인구가 줄어들 수 있을 만큼 점진적으로 붕괴가 이루어진다 해도, 그런 탈()산업화의 과정은 여전히 심한 혼란에 빠질 것이고, 커다란 고통을 수반할 것이다. 테크노로지를 무리 없이 질서정연한 방식으로 제거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무엇보다 기술 숭배자들이 매 단계마다 격렬히 저항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체제의 붕괴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잔인한 짓인가?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첫째, 혁명가들이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체제가 이미 심각한 문제에 빠져 어차피 결국은 무너지게 되어 있는 상황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한편 체제가 더 거대해질수록 그 붕괴로 인해 초래될 결과도 더 참혹해진다. 드러니 혁명가들이 붕괴의 출발을 앞당기는 것은 오히려 재앙을 줄이는 길이 될 수도 있다.
둘째, 우리는 투쟁과 죽음, 그리고 자유와 존엄성의 상실, 이 두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우리들 대부분에게 장수하는 것이나 육체적 고통을 피하는 것보다는, 자유와 존엄성이 더 중요하다. 더욱이,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죽는다. 공허하고 목적도 없는 삶을 오래끄느니 생존을 위해서건 운동을 위해서건 싸우다 죽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셋째, 체제가 살아남는다고 해서 붕괴될 때보다 더 고통이 적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체제는 이미 지금까지도 엄청난 고통을 전 세계에 안겨 주었고, 지금도 계속 고통을 주고 있다. 수백년에 걸쳐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 및 환경과 행복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던 고대 문명들은 산업 사회와의 접촉을 통해 일시에 와해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산적한 경제 문제, 환경 문제, 사회 문제, 심리 문제들이다. 산업 사회의 지배로 인해 빚어진 가공할 결과의 하나는, 전 세계의 전통적 인구 조절 방법들이 전혀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오늘의 인구 폭발이 벌어졌다. 이어서 운이 좋다고 여겨졌던 서구 국가들에 심리적 고통이 확산되었다(문단 44,45를 보라). 오존층 감소, 온실 효과, 그리고 기타 아직까지 예측 불가능한 환경 문제들로 인해 어떤 결곽가 빚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핵 확산에서 볼 수 있듯,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독재자와 무책임한 제3세계 국가들의 손에서 안전하게 떼어놓을 수도 없다. 이라크나 북한이 유전 공학을 가지고 어떤 짓을 할지 한번 생각해 보라.
기술 숭배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 과학이 모두 잘 해결할 겁니다! 우리는 기아 문제를 해결할 것이고, 심리적 고통을 제거할 것이며, 모든 사람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해 줄 겁니다!" 아무렴, 그렇고 말고, 그들은 200년 전에도 똑같은 말을 했다. 예정대로라면 산업 혁명은 가난을 몰아내고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었어야 한다. 실제의 결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기술 숭배자들은 사회 문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절망적일 정도로 순진하다(아니면 스스로를 속이고 있거나). 그들은 사회에 거대한 변화, 겉보기에 바람직한 변화일지라도 일단 변화가 시작되면 예측 불가능한 수많은 변화들이 연이어 일어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아니면 일부러 무시하거나). (문단 103을 보라.) 그 결과는 사회의 붕괴다. 기술 숭배자들이 가난과 질병을 몰아내고, 유전 공학을 통해 온순하고 행복한 성격의 사람을 만들어 내려고 시도할 때, 그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끔찍하게 혼란스러운 사회 체제를 만들어 낼 것이다. 과학자들은 새로운 유전 공학적 식량 생산 공장을 만들어 기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큰소리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인구가 무한정 늘어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인구 과밀이 스트레스와 공격성 증가로 이어진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것은 그저 예측할 수 있는 문제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우리는 과거의 경험이 보여주듯, 기술 진보가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문제들을 낳을 것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문단 103을 보라). 실제로 산업 혁명 이후 테크놀로지는 낡은 문제를 해결하는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른 속조로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왔다. 그러니(설령 그들이 그렇게 한다 해도) 기술 숭배자들이 그들의 '멋진 신세계'에서 결함을 제거하는 데는 아주 길고 힘든 시행착오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와중에 엄청난 고통이 따른다. 산업 사회가 생존할 때의 고통이 붕괴될 때의 고통보다 덜하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테크놀로지는 지금껏 인류를 도저히 쉽게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곤경으로 몰아 왔다.

탈출
이제 산업 사회가 앞으로의 수십 년을 살아남고 마침내 그 결함을 체제에서 걸러 내 제대로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고 가정해 보자. 그 체제는 과연 어떠한 것일까?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보자.
우선 컴퓨터 과학자들이 모든 일을 인간보다 잘 처리하는 인공 지는 기계를 개발하는 데 성공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게 되면 거대하고 고도로 조직적인 기계 시스템이 모든 노동을 담당할 것이고, 인간의 노력은 필요 없게 될 것이다. 그런 경우의 가능성은 두 가지 중 하나다. 인간의 감독 없이 기계가 스스로 모든 결정을 내리거나, 아니면 여전히 인간이 기계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는 것이다.
기계가 스스로 모든 결정을 내리게 된다며느 우리는 어떤 결과가 빚어질지 전혀 예측할 길이 없다. 그런 기계가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짐작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다만 인류의 운명이 기계의 자비심에 달려 있다는 것뿐이다. 인류가 기계에게 모든 힘을 넘겨줄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는 반론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인류가 자발적으로 기계에 힘을 넘겨주거나 기계가 자신의 의지로 권력을 장악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인류가 쉽사리 기계에 종속된 지위로 떨어질 것이며, 결국 기계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리라는 것이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따라서 사회 문제들고 점점 더 복잡해짐에 따라, 그리고 기계가 점점 더 지능화함에 따라,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결정권을 기계에게 넘겨줄 것이다. 단순히 기계에 의한 결정이 사람에 의한 결정보다 더 나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마침내는 체제를 계속 돌아가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결정이 너무나 복잡해져서 인간의 지능으로는 아무런 결정도 내릴 수 없는 그런 단계가 도래할 것이다. 그 단계에서는 기계가 통제권을 장악한다. 이제 인간을 기계를 꺼 버릴 수조차 없다. 기계에 철저히 종속된 인간이 기계를 끈다는 것은 곧 자살 행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인간이 기계에 대한 통제권을 계속 유지할 가능성도 있다. 그런 경우, 보통 사람도 자동차나 PC 같은 개인 소유 기계는 통제할 수 있겠지만, 대형 기계 시스템에 대한 통제권은 극소수 엘리트의 손에 쥐어지게 될 것이다. 오늘날과 비슷한 상황이지만, 거기엔 두 가지 차이점이 있다. 진보된 기술 덕분에 엘리트는 대중에 대해 더 강화된 통제권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인간의 노동이 불필요해진 탓에 대중은 불필요한 존재, 즉 체제에 떠념겨진 쓸모 없는 짐더미가 되어 버린다. 무자비한 엘리트라면, 간단히 엄청난 인구를 죽여 없앨지도 모른다. 인간적인 엘리트라면 프로퍼갠더나 심리적, 생물학적 기술을 활용해 출산율을 줄이는 식으로 대부분의 인구를 멸종에 이르게 한 뒤, 남은 세상을 독차지할 것이다. 만약 엘리트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마음 약한 리버럴들이라며느 그들은 나머지 인류의 선한 목자 역할을 하겠다고 나설 것이다. 그들은 모든 사람의 신체적 욕구가 충족되고 있는지, 모든 아이들이 심리학적으로 위생적인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지, 모든 사람이 유익한 취미 생활로 바쁘게 지내고 있는지,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제대로 '문제'를 고치는 '치료'를 받고 있는지 꼼꼼히 챙길 것이다. 물론 삶은 너무나 무의미해졌으므로, 사람들은 권력 과정에 대한 욕구를 제거하거나, 안전한 취미로 권력 욕망을 '승화'시킬 수 있도록 생물학적으로건 심리적으로건 공학적 처치를 받아야 한다. 이들 공학적 처치를 받은 사람들은 해당 사회안에서 행복하긴 하겠지마느 결코 자유롭지는 않다. 그들은 가축의 신분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번엔 컴퓨터 과학자들이 인공 지능을 개발하는 데 실패하고, 따라서 인간의 노동이 계속 필요한 경우를 가정해 보자. 그래도 기계는 여전히 점점 더 많은 단순 작업을 떠맡을 것이고, 그에 따라 단순 직종에서는 잉여 노동력이 늘어나게 될 것이다. (그런 일은 이미 벌어지고 있다. 현재의 체제 안에서 계속 쓸모 있는 존재로 남으려면 반드시 받아야 하는 훈련을 지적 또는 심리적 이유로 인해 받지 못하기 때문에 직업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이미 상당수에 달한다.)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겐 끝없이 임무가 부과된다. 그들에겐 더 많은 훈련과 더 많은 능력이 필요하며, 점점 더 거대한 유기체의 세포 같은 존재가 되어 갈 것이므로 더욱더 믿을 만해져야 하고, 순응적이어야 하고, 양순해져야 한다. 그들의 작업은 더욱 더 전문화되어 간다. 그래서 그들이 접촉할 수 있는 현실의 아주 작은 한 조각에만 몰두하는 탓에, 그들의 노동은 현실 세계와 단절돼 버린다. 체제는 심리적 수단이건, 생물학적 수단이건 가능한 모든 수단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공학적으로 처치해 양순하게 만들고, 체제가 요구하는 능력을 갖도록 만들고, 권력에 대한 욕망을 전문화된 작업으로 '승화'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사회의 사람들이 반드시 양순해져야만 하는가에는 이론이 생겨날 수도 있다. 사회는 경쟁이 쓸모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체제가 필요로 하는 방향으로 경쟁을 유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끝없는 경쟁이 펼쳐지는 미래 사회를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상의 자리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문단 163의 마지막 부분을 보라). 한 사람이 자신의 권력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수많은 다름 사람들을 밀어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의 권력에의 기회를 박탈해야만 하는 사회. 참으로 끔찍한 사회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여러 가능성들이 서로 결합되는 시나리오도 머리 속에 그려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기계가 실질적인 노동을 전부 떠맡는 대신, 인간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노동에 종사하면서도 바쁘게 뛰어다녀야 하는 상황이 생겨말 수 있다. 서비스 산업의 엄청난 발전에 따라 인간을 위한 직업이 계속 생겨나리라는 주장은 이제까지 줄곧 제기되어 왔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서로의 구두를 닦아주며, 서로를 택시에 태워 여관 주변을 달리며, 서로에게 팔기 위해 수공예품을 만들며, 서로의 테이블에서 음식 주문을 기다리며, 인생을 보내게 될 것이다. 인류가 그런 길로 간다니, 얼마나 경멸스러운 일인가. 그런 아무런 의미 없는 일에 허겁지겁 하면서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낄 사람이 얼마나 될지 의심스럽다. 생물학적 또는 심리적인 공학적 처치를 통해 그런 생활 양식에 적합하게 자신을 짜맞추지 않는 한, 사람들은 (마약, 범죄, '광신', 증오 집단 등의) 위험한 배출구를 찾게 될 것이다.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위에서 이야기한 시나리오들에 모든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시나리오들이 보여주는 것은 그저 우리가 보기에 가장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결과들일 뿐이다. 우리는 그 시나리오들보다 더 바람직한 장밋빛 시나리오를 상상할 수가 없다. 만약 산업-테크놀로지 체제가 다가오는 40~100년을 살아남는다면, 그 때쯤이면 체제는 틀림없이 다음과 같은 일반적 특징들을 거의 확립시켜 놓고 있을 것이다. 개인들은(적어도 체제에 통합되고, 체제를 움직이게 하고, 따라서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부르주아' 유형의 개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심하게 거대 조직에 종속되어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심하게 '사회화'될 것이며, 그들의 신체적 정신적 능력은 상당한 정도로(아마 엄청난 정도로) 우연(또는 신의 의지, 아니면 다른 무엇)의 산물이 아니라 공학의 산물로 만들어질 것이다. 그 무엇이든 자연에 남겨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과학 연구를 위해 보존된 잔재에 불과할 것이며, 과학자들이 그것을 감독하고 관리할 것이다(그러니 더 이상 그것은 순수한 자연이 아니다.) 마지막에는(지금으로부터 몇백년 뒤) 인간이건 아니면 다른 중요한 생물이건 간에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로 존재하는 생명체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유전 공학을 통해 한번 생물을 개조하기 시작하면, 어느 시점에서 그것을 멈춰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개조 작업은 아마 인간과 다른 생물들을 완전히 변형시킬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 밖에 다른 어떤 경우가 생겨나든 간에, 분명한 것은 테크놀로지를 통해 인간이 전혀 새로운 물리적, 사회적 환경을 창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새로운 환경은 인류가 자연 선택에 따라 자신을 육체적 심리적으로 적응시켜 온 그런 환경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환경이다. 만약 인간이 스스로를 인위적으로 리엔지니어링함으로써 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않는다면, 길고 고통스러운 자연 선택 과정을 거쳐야만 그 환경에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후자보다는 전자가 일어날 확률이 훨씬 더 높다.
그러니 차라리 이 썩은 냄새 풍기는 체제를 던져 버리고, 그 뒤에 일어날 결과를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전략
기술 궁배자들은 우리 모두를 지극히 위험한 놀이 기구에 태우고 전혀 알려지지 ㅇ낳은 세계로 끌고 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테크놀로지의 진보로 인해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면서도, 여전히 그것이 불가피하다는 이유를 들어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멈출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멈추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몇가지 방법을 이야기하려 한다.
문단 166에서 말했듯, 현재 주어진 두가지 중요한 임무는 첫째, 산업 사회의 사회적 스트레스와 불안정성을 증가시키는 일과 둘째, 테크놀로지와 산업 체제에 저항하는 이데올로기를 개발하고 퍼뜨리는 일이다. 체제가 충분한 정도로 스트레스를 일으키고 불안정해지면, 테크놀로지에 저항하는 혁명이 가능해질 것이다. 혁명의 양상은 프랑스 혁명 및 러시아 혁명과 비슷할 것이다. 프랑스와 러시아 사회는 저 존경할만한 혁명이 일어나기 수십 년 전부터 이미 점점 늘어나는 스트레스와 취약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편 혁명가들에 의해 개발된 이데올로기들은 낡은 세계관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했다. 러시아 혁명의 경우, 혁명가들은 낡은 질서를 깨뜨리기 위해 정열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다가 낡은 체제에 충분한 스트레스가 더해졌을 때(프랑스에서의 재정 위기, 러시아 전쟁 패배) 혁명은 낡은 체제를 휩쓸어 버렸다. 우리가 제안하는 것도 그와 동일한 수순을 따른다.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은 실패한 혁명이라는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혁명에는 대개 두 가지 목표가 있다. 하나는 낡은 형태의 사회를 파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혁명가의 비전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은 그들이 꿈꾸었던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다헹스럽게도!). 낡은 사회를 파괴하는 데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우리는 새로운 이상적 형태의 사회를 창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알고 있다. 우리의 목표는 다만 현재의.사회를 파괴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어떤 이데올로기가 사람들로부터 열정적인 저지를 얻기 위해서는 부정적인 이상과 함께 긍정적인 이상을 담고 있어야 한다. 이데올로기는 무엇에 저항하는 것임과 동시에 무엇을 지향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제시하는 긍정적 이상은 바로 '자연', 다시 말해 순수한(WILD) 자연이다. 여기서 순수한 자연이란, 인간의 관리에서 벗어나 있고 인간의 간섭 및 통제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생물들과 지구가 조화롭게 기능을 수행하는 자연이다. 순수한 자연 안에 우리는 인간성을 포함시킨다. 우리가 말하는 인간성이란 조직 사회의 규제를 받지 않는, 그리고 (당신의 종교 혹은 철학적 견해에 따라)우연, 자유 의지, 또는 신의 산물인,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조화롭게 기능을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자연은 몇가지 이유로 테크놀로지에 대한 완벽한 대안적 이상이 될 수 있다. (체제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자연은 끝없이 체제의 힘을 확장하려 하는) 테크놀로지의 반대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이 아름답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확실히 자연은 사람들에게 굉장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급진적 환경주의자들은 이미 자연을 찬양하고 테크놀로지에 반대 하는 이데올로기를 확보하고 있다. 자연을 위해서는 화학적 유토피아나 새로은 사회 질서를 건설할 필요가 없다. 자연은 스스로를 돌본다. 자연은 인간 사회가 시작되기 오래 전부터 이미 존재해 온 우연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수많은 인간 사회가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으면서 자연과 공존했다. 오로지 산업 혁명의 결과로 인해 인간 사회는 자연에 참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자연에 가해지는 억압을 종식시키기 위해 어떤 특별한 종류의 사회를 만들어 낼 필요는 없다. 그저 산업 사회를 몰아내면 된다. 딩연한 얘기지만, 산업 사회를 제거하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산업 사회는 이미 자연에 엄청난 손상을 입혔고, 그 상처를 치료하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한편 산업화 이전의 사회들도 자연에 심각한 손상을 입힐 수 있다. 하지만 산업 사회를 제거하는 것만으로도 일단 상당한 성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산엄 사회가 사라지면, 자연에 가해지는 최악의 억압이 종식될 것이고, 그러면 상처의 회복도 시작될 수 있다. 조직 사회가 자연(인간성을 포함해)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 가는 능력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산업 사회가 사라진 후 어떤 사회가 생겨나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첨단 테크놀로지가 없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은 그것 뿐이기 때문이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농부가 되거나 목동, 어부, 아니면 사냥꾼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역 공동체가 늘어날 것이 틀림없다. 첨단 테크놀로지와 고속 통신이 사라지면서, 정부를 비롯해 지역 공동체를 통제하는 거대 조직들의 능력도 제한될 것이기 때문이다.
산업 사회를 제거함으로써 빚어지는 부정적 결과들에 대해서... 글쎄, 케익을 계속 손에 쥐고 있으려면 먹지 말아야 한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버려야 하는 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리적 갈등을 싫어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어려운 사회적 이슈에 관해 골치 아프게 생각하는 것을 원치 않고 남들이 그런 이슈를 간단한 흑백 논리로 제시해 주는 것을 좋아한다. 이것은 모두 옳고 저것은 모두 나쁘다라는 식으로. 그러니 두 가지 수준에서 혁명의 이데올로기를 개발해야 한다.
보다 정교한 수준의 이데올로기는 지적이고 신중하며 이성적인 사람들에게 제시되어야 한다. 이때 제시되는 목표는 합리적이고 냉철한 판단 위에서 산업 체제에 저항할 핵심적인 혁명가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체제의 문제와 모호한 성격에 대해, 그리고 체제를 제거 하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철저히 이해해야 한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일은 특히 중요하다. 그들은 능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며,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고의로 사실을 왜곡하지도 말아야 하며. 선동적인 표현도 피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감정적인 호소를 일체 외면하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감정에 호소할 경우 진실을 호도하지 않도륵 주의하고, 이데을로기가 지닌 지적 품위를 훼손할 만한 일은 저지르지 말라는 것이다.
두번째 수준의 이데올로기는, 생각없이 살아가는 다수가 테크놀로지와 자연간의 갈등을 이해할 수 있도륵 명료한 용어를 사용해 단순한 형식으로 전파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두번째 수준에서도 이데을로기를 표현할 때 야비한 언어나 선동적이고 비이성적인 언어는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언어를 사용할 경우 신중하고 이성적인 사람들을 뒤돌아 서게 만들 수도 있다. 야비하고 선동적인 프로퍼갠더가 단기적으로는 상당한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 없이 사는 변덕스러운 군중은 누군가 더 나은 프로퍼갠더 미끼를 들고 나타나는 즉시 태도를 바꾸어 버린다. 그러니 그런 군증의 정열을 부추기기보다는, 역시 논리적 근거에 의해 헌신적인 소수 사람들의 충성심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볼 때 더 나은 결과를 낳는다. 하지만 체제가 거의 파괴 직전에 다다랐을 때, 그리고 낡은 세계관이 쓰러졌을 때, 새로운 지배적 세계관으로 등장하기 위해 경쟁적인 이데올로기들 간의 마지막 투쟁이 벌어질 경우에는 선동적 프로퍼갠더가 필요할 수도 있다.
혁명가들은 그런 마지막 투쟁이 필쳐지기 전에 이미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기편에 서 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말아댜 한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적극적이고 확고한 신념을 지닌 소수이지, 다수가 아니다. 다수는 대개의 경우 자신이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명확하고 일관된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 혁명을 향한 마지막 진격의 날이 올 때까지, 혁명가의 임무는 다수의 얄팍한 지지를 얻어내는 일이 아니라 깊이 헌신적인 사람들로 이루어진 작은 핵심 집단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다수에 대해서는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존재합을 알리고 수시로 그것을 되살려 주는 일로 층분하다. 물론 헌신적인 소수의 집단을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다수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다면 그야말로 바람직한 일이다.
모든 사회적 갈등은 체제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혁명가는 어떤 갈등을 조장해야 할지를 신증하게 고려해야 한다. 대다수사람들과 권력을 소유한 산업 사회의 앨리트(정치가, 과학자, 상류층, 기업체 중역, 정부 관료 등) 간에 확실한 갈등의 경계선을 그어야 한다. 절대로 혁명가와 대다수 사람들 사이에 경계선이 그어져서는 안된다.예를 들어, 혁명가가 그들의 과소비 행태를 들어 미국인을 비난 하는 것은 좋지 않은 전략이다. 그 대신에 미국인을, 불필요한 허접쓰레기를 자유의 상실이라는 비싼 대가를 치르며 구입하도록 강요당하는 존재로서, 즉 광고 및 마케팅 산업의 피해자로서 부각시켜야 한다. 어느 쪽이든 둘 다 사실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대중을 조작한다는 죄목으로광고 산업을 비난하든, 아니면 광고 산업에게 자신을 조작하도륵 허용한다는 죄목으로 대중을 비난하든, 그것은 다만 태도의 문제일 뿐이다. 전략의 문제를 놓고 볼 때, 대중을 비난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권력을 소유한 엘리트(테크놀로지를 지배하는)와 일반 대중(테크놀로지가 권력을 행사하는 대상으로서의) 간의 갈등 외에 다른 사회적 갈등을 부추길 때에는 실행에 앞서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한다. 우선, 여타의 갈등들은 정작 중요한 갈등(권력 엘리트와 보통 사람들 간의 갈등, 테크놀로지와 자연 간의 갈등)으로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분산시킬 수 있다. 또한 여타의 갈등들은, 실제로는 테크놀로지화를 조장할 수도 있다. 그 갈등에서 갈등 당사자들은 상대방을 누르기 위해 테크놀로지의 힘올 사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국가 간의 경쟁에서 그런 현상은 확연히 드러난다. 또한 한 국가 안의 인종 간 갈등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흑인 지도자들은 테크놀로지 권력 엘리트의 자리에 흑인 개인들을 보내는 방법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위한 권력을 획득하려 몸부림치고 있다. 즉 더 많은 흑인 정부 관료, 흑인 과학자, 흑인 기업체 증역이 생기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노력을 통해 흑인 지도자들은 오히려 테크놀로지 체제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하부 문화를 흡수하는 것을 도와주고 있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권력 엘리트 대(對) 보통 사람들, 테크놀로지 대 자연 간의 갈등 틀에 해당하는 사회적 갈등만을 부추겨야 한다.
소수 집단 권리를 폭력으로 쟁취하려 할 경우 오히려 인종 간의 갈등을 증폭시키게 된다 (문단21.29를 보라). 혁명가는 소수 집단이 다소간 불이익을 겪더라도 그 불이익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우리의 진정한 적은 산업-테크놀로지 체제이며, 체제에 항거하는 투쟁에서 인종 차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혁명이 반드시 정부에 대한 무장 몽기를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물리적 폭력은 포함될 수도 있고 배제될 수도 있다. 단 우리의 혁명은 절대 정치적 혁명이 되지 말아야 한다. 정치가 아니라, 테크놀로지와 경제에 혁명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
혁명가는 산업 체제가 심각한 스트레스를 겪고 대다수 사람들이 산업 체제를 명백한 실패괘로 인정하기 전까지는, 합법적이건 불법적이 건, 일체의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가령 일단의 녹색당이 선거를 통해 미국 의회를 통제하게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쇄신하거나 회석시키지 않으려면, 녹색당은 어쩔 수 없이 강경 수단을 동원해 경제 성장를 경제 축소로 전환시켜야 할 것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그 결과는 참혹할 것이다. 대량 실업, 생필품 부족 등의 사태가 벌어진다. 설령 초인적인 경영 능력을 발휘해 최악의 사태를 피한다 해도, 여전히 사람들은 그 때까지 중독되어 있던 안락함을 포기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불만이 늘어나고 녹색당은 선거에 패배해 요직에서 쫓겨날 것이며, 혁명가들은 좌절에 고통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혁명가들은, 산업 체제 자체가 완전히 혼란에 빠져 사람들이 그 모든 고통은 혁명가의 정책때문이 아니라 산업 체제 자체의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할 때까지는, 정치 권력을 장악하려 애쓰지 말아야 한다. 테크놀로지에 항거하는 혁명의 주체는 아웃사이더들이어야 하며, 위로부터의 혁명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어야한다.
혁명은 국제적으로 또 범세계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혁명은 결코 국가별로는 수행될 수 없다. 미국인들에게 테크놀로지 발전이나 경제 성장을 멈춰야 한다고 주장하면, 사람들은 곧바로 히스테리에 빠져, 우리가 테크놀로지에서 뒤지면 일본인들이 우리를 추월할 것이라고 비명을 지를 것이다. 저 빌어먹을 로봇! 일본인들이 우리보다 더 많은 자동차를 팔아먹는다면 세계는 거꾸로 굴러가게 될 것이다! (내셔널리즘은 테크놀로지의 든든한 후원자다.) 보다 합리적인 반론으로는, 만약 비교적 민주적인 국가들이 테크놀로지에서 뒤지면, 중국이나 베트남, 북한 같은 못된 독재 국가들은 발전을 계속할 것이고 마침내 그들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는 반른이 제기될 수도 딨다. 내셔널리즘의 발흥을 막기 위해서라도, 산업체제에 대한 공격은 가능하다면 모든 국가에서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산업 체제가 전세계에 걸쳐 거의 동시에 무너진다는 보장은 없다. 그리고 체제를 몰아내려는 시도가 오히려 독재자들이 지배하는 체제를 낳게 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런 위험은 감수해야 한다.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도 충분하다. 민주적인 산업 체제와 독재자가 통제하는 산업 체제 간의 차이란 산업 체제와 비산업 체제 간의 차이에 비하면 사소한 차이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독재자돌이 통제하는 산업 체제가 횔씬 더 낫다고 볼 수도 있다. 독재자가 통제하는 산업 채제는 대개 비효올적이며. 따라서 붕괴할 가능성도 더 크기 때문이다. 쿠바를 보라.
혁명가는 세계 경제를 하나의 단일체로 묶는 시도들을 잘 이용해야 한다. NAFTA나 GATT 같은 자유 무역 협정들은 아마 단기적으로는 환경에 해악을 끼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국가들 사이의 경제적 종속성을 증대시킴으로써 오히려 혁명에 도옴이 될 것이다. 만약 세계 경제가 완전히 통합되어 어느 한 중요 국가의 붕괴가 모든 산업 국가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면 전 세계 차원에서 산업 체제를 무너뜨리는 일도 더 쉬워질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현대인이 자연에 대해 과도한 권력과 통제력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인류에 대해서는 훨씬 더 소극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들은 거대 조직을 위한 권력과 개인 및 작은 집단을 위한 권력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내세우는 이론은 항상 모호하다. 무력함과 수동성을 옹호하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사람들에겐 권럭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집단적 존재로서의 현대인, 즉 산업 체제는 자연에 대해 엄청난 권력을 갖고 있으며, 우리는 그 권력을 사악한 것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현대의 개인들과 개인들의 작은 집단은 원시인보다도 훨씬 적은 권력을 갖고 있다. '현대인'이 자연에 대해 갖고 있는 어마어마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개인들이나 작은 집단이 아니라 거대 조직들이다. 현대의 보통 개인이 어쩌다 테크놀로지의 권력을 쥐게 된다 해도, 그가 권력을 쥘 수 있는 것은 아주 제한된 한계 안에서, 그것도 체제의 감독과 통제를 받으면서 허용될 뿐이다. (당신은 모든 일에 면허가 필요하며, 그 면허들에는 규칙과 규제가 따른다.) 개인이 지닌 테크놀로지의 권력은 고작해야 체제가 그에게 골라서 건네준 권력에 불과하다. 그가 자연에 대해 지닌 개인적 권력은 아주 미미한 것이다.
원시 개인과 작은 집단이 실제로는 자연에 대해 상당한 권력을 갖고 있었다. 아니, 차라리 자연 안에서의 권력을 갖고 있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원시인에게 식량이 필요할 때, 그는 어떻게 식용 식물 뿌리를 찾고 요리할 것인지를 알고 있었고, 어떻게 짐승을 추적해 집에서 만든 무기로 그것을 잡을지를 알고 있었다. 더위와 추위, 비, 홍수로부터 어떻게 자신을 보호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원시인이 자연에 입힌 손상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원시 사회의 집단적 권력이 산업 사회의 집단적 권력에 비하면 무시해도 좋을 만큼 미약했기 때문이다.
무력함과 수동성을 옹호하는 대신에 우리는 산업 체제의 권력이 파괴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개인들과 작은 집단들의 권력과 자유가 비약적으로 증대되리라는 것을 주장해야 한다.
산업 체제가 완벽하게 쓰러질 때까지는, 혁명가의 유일한 목표는 체제의 파괴뿐이다. 다른 목표등은 중심 목표로부터 관심과 에너지를 분산시킬 것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만약 혁명가가 테크놀로지의 파괴 이외의 다른 목표를 갖게 되면, 그 다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테크놀로지를 사용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혁명가가 그런 유혹에 굴복할 경우 곧바로 테크놀로지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현대의 테크놀로지는 하나의 통합된, 치밀하게 조직된 체제로서 어떤 테크놀로지를 유지하기 위해선 거의 대부분의 테크놀로지를 유지해야만 하고, 따라서 아주 작은 부분을 제외하곤 테크놀로지를 고스란히 살려 둘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혁명가가 사회 정의를 목표로 취했다고 가정해 보자. 현재의 인간성을 두고 볼 때, 사회 정의는 자발적으로 생겨나지 않는다. 강요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회 정의를 강요하기 위해서는 혁명가가 중앙 조직과 통제권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려면 고속 장거리 수송수단과 통신망이 필요하고, 결국 그 수송 및 통신 시스템을 지탱하기 위한 테크놀로지 전체가 필요하다. 매사가 그런 식이다. 따라서 사회 정의를 확립하려면 혁명가는 어쩔 수 없이 테크놀로지 체제의 거의 전부를 유지해야 하지만, 동시에 테크놀로지 체제를 제거하기 위한 노력을 방해해서는 안된다는 모순이 벌어진다.
혁명가가 일체의 현대 테크놀로지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체제를 공격하기란 불가능하다.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한다 해도,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최소한 커뮤니케이션 매체는 이용해야 한다. 그러나 혁명가가 현대 테크놀로지를 이용할 경우, 그것은 오직 하나의 목표, 즉 테크놀로지 체제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알콜 증독자가 포도주 한 통을 놓고 앉아 있다고 상상해 보라. 그가 혼자 이렇게 중얼거린다고 생각해 보자. '적당히만 마신다면 포도주가 나쁠게 뭐 있나. 약간의 포도주는 몸에 좋다고들 하지 않는가 말이야! 한 방울만 마시면 전혀 해가 안 될 거야.." 당신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잘 알고 있다. 테크놀로지를 가진 인류가 포도주 한 통을 가진 알콜 증독자와 똑같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라.
혁명가는 최대한 많은 자녀를 낳아야한다. 사회적 태도들은 상당 수준까지 유전된다는 강력한 과학적 증거가 나와 있다. 어떤 사람의 사회적 태도가 유전인자의 구성에 의한 직접적 결과라고는 아무도 주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상황에서는 개인의 성격적 특성은 그 사람이 어떤 특정한 사회적 태도를 갖도록 만들고 있다. 이런 사실에 대한 반른도 제기되어 있지만. 그 반론들은 근거가 빈약하며, 대개 이데올로기적 동기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어느 경우에든 평균적으로 아이들이 부모와 비슷한 사회적 태도를 갖게 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유전적 요인이 사회적 태도를 만드느냐, 아니면 환경이 만드느냐 하는 질문은 별 의미가 없다. 어느 경우에든 사회적 태도는 만들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산업 체제에 저항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 중의 다수가 인구 문제에 대해서도 역시 관심을 갖고 있으며 그에 따라 적은 수의 아이를 낳거나 아애 낳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산업 체제를 지지하거나 최소한 용인하는 사람들에게 미래의 세계를 통째로 넘겨주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다음 세대의 혁명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혁명 세대가 스스로를 열심히 재생산해야 한다. 그렁다고 해서 인구 문제가 크게 악화되지도 않는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산업 체제를 제거하는 일이다. 일단 산업 체제가 사라지면 세계 인구는 필연적으로 감소한다(문단 167을 보라). 반면에 산업 체제가 살아남게 되면, 체제는 식량 생산을 증가시키는 새로운 기술을 계속 개발할 것이고 인구는 무한정 늘어나게 될 것이다.
혁명 전략과 관련해 우리가 단호하게 지켜야 할 사항은 간단하다. 현대 테크놀로지의 제거가 유일한 목표가 되어야 하며, 그 목표와 경쟁하는 다른 어떤 목표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나머지에 대해 혁명가는 실증적인 접근 방법을 택해야 한다. 만약 경험에 의해 앞의 문단들에서 추천한 전략들이 전혀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한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 때는 미련없이 포기해야 한다.

두 가지의 테크놀로지
우리가 제안한 혁명에 대해, 역사적으로 테크놀로지는 항상 진보해 왔고 단 한번도 후퇴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테크놀로지의 후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혁명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재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주장은 틀린 것이다.
우리는 테크놀로지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소규모 테크놀로지며, 다른 하나는 조직 의존형 테크놀로지다. 소규모 테크놀로지는 소규모 공동체가 외부 지원 없이 사용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를 말한다. 조직 의존형 테크놀로지는 대규모의 사회 조직에 의존하는 테크놀로지다. 우리는 소규모 테크놀로지가 후퇴한 적은 한 번도 없었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조직 의존형 태크놀로지는 그것이 의존하고 있는 사회 조직이 붕괴할 때 함께 후퇴한다.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도 로마의 소규모 테크놀로지는 살아남았다. 영리한 시골 장인(匠人)이라면 누구든 물레방아를 만들 수 있었고, 숙련된 대장장이라면 로마식 제련법에 의해 얼마든지 철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로마의 조직 의존형 테크놀로지는 후퇴했다. 로마의 대수로는 무너졌고 다시는 재건되지 않았다. 로마의 도로 건설 기술은 잊혀졌다. 로마의 하수도 시스템은 잊혀졌으며 최근까지도 유럽 도시들의 하수도는 로마 제국이 아니라 고대 로마의 시스템에 머물러 있었다.
테크놀로지가 항상 진보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산업 혁명 이전 1,2세기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테크놀로지가 소규모 테크놀로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업 혁명 이후 개발된 테크놀로지는 대부분 조직 의존형 테크놀로지다. 냉장고를 예로 들어보자. 공장에서 생산된 부품이나 최첨단 공구들 없이 몇 사람의 지역 장인(匠人)들이 모여서 냉장고 한 대를 만드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기적적으로 그들이 냉장고를 만들어 낸다고 해도 안정적인 전기 공급 없이는 무용지믈이다. 그러니 강물을 막아 댐을 만들고 발전기를 세워야 한다. 발전기에는 엄청난 구리선이 필요하다. 현대적 공작 기계 없이 구리선 만드는 일을 상상해 보라. 이번엔 냉동을 위한 냉매(冷媒) 가스를 어디서 구할 것인가? 차라리 냉장고가 발명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얼음 창고를 만들거나 음식을 말리고 절여서 보관하는편이 훨씬 더 쉬울 것이다.
그러니 일단 산업 체제가 완전히 붕괴되면, 냉장고 테크놀로지는 곧 사라져 버릴 것이 틀림없다. 다른 조직 의존형 테크놀로지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일단 이 테크놀로지가 한 세대 동안 잊혀지면, 그것을 다시 세우는 데는 그것을 처음 세우는 데 수백 년이 걸린 것처럼 역시 수백 년이 걸릴 것이다. 기술 서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을 것이며, 남아 있다고 해도 사방에 흩어져 있올 것이다. 만약 그 잔해 속에서 외부의 도움 없이 어떤 산업 사회가 다시 건설되려면, 다음과 같은 일련의 단계를 밟아야 할 것이다. 도구를 만들기 위해 도구가 필요하고, 그 도구를 만들기 위해 도구가 필요하고 그 도구를 만들기 위해... 길고 긴 경제 개발 과정과 사회 조직의 발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때에는 이미 테크놀로지에 저항하는 이데을로기가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어 있을 것이며, 설령 그런 이데올로기가 없다 해도, 산업 사회를 재건설하는데 흥미를 느낄 사람은 전혀 없으리라는 점에 대해서는 믿어도 종다. '진보'에 대한 열광은 현대 사회에 국한된 현상일 뿐이며, l7세기 이전까지는 그런 현상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중세 후기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진보한 네 개의 중심 문명이 있었다. 유럽. 이슬람권. 인도, 그리고 극동(증국. 일본. 한국) 문명이다. 이들 문명 중 세 문명은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상태로 머물렀다. 오직 유럽만이 역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럽이 그 때 왜 그렇게 역동적으로 변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역사가들은 이런저런 이론을 내세우지만, 공허한 이론에 불과하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테크놀로지 사회로의 급속한 발전은 한정된 특수 조건 아래서만 일어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기간에 걸친 테크놀로지의 후퇴가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믿어야 할 이유는 없다.
결국에는 산업-테크놀로지 형태의 사회가 다시 발전할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500년 혹은 l,000년 뒤에 벌어질 일을 예측하고 통제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 문제는 미래에 살아갈 사람들이 해결할 문제다.

좌익주의의 위험성
반항에의 욕구와 운동에 소속되고 싶은 욕구 때문에 좌파나 그와 비슷한 심리적 유형의 사람들은 애당초 좌파의 목표와 소속을 공유하지 않은 저항 운동가에게 별로 호감을 갖지 않는다. 좌파 성향의 사람들은 비좌파 운동에 들어와도 쉽게 운동을 좌파 운동으로 변질시켜 버린다. 그러면서 운동의 원래 목표까지도 좌파의 목표로 대체해 버리거나 아니면 왜곡시켜 버린다.
자연을 찬양하고 테크놀로지에 항거하는 운동이 그런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는, 단호한 반(反)좌파 입장을 고수해야 하며, 일체 좌파와의 협력을 배제해야 한다. 좌파주의는 장기적으로 볼 때 순수한 자연, 인간자유, 그리고 현대 테크놀로지의 제거와는 공존할 수 없다. 좌파주의는 집단주의인 것이다. 좌파주의는 전 세계(자연과 인류 모두를) 하나의 통합체로 묶으려 한다. 이는 조직 사회를 통해 자연과 인간의 삶을 관리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러기 위해선 첨단 테크놀로지가 필요하다. 고속 수송 수단과 통신망이 없이는 통합된 세계를 만들 수 없다. 정교한 심리적 기술 없이는 모든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게 만들 수 없다. 테크놀로지의 기초 없이는 '계획적 사회'를 만들 수 없다. 무엇보다도 좌파주의를 끌고 가는 동력은 바로 권력에 대한 욕구이다. 그리고 좌파들은 대규모 운동이나 대규모 조직과의 동일화를 통해 집단주의적 논리에서 권력을 추구한다. 좌파주의는 결코 테크놀로지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집단주의적 권력의 원천으로서 테크놀로지는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이다.
아니키스트 역시 권력을 추구한다. 다만 개인적 또는 작은 집단의 논리에서 권력을 추구 할 뿐이다. 그는 개인들과 작은 집단들이 스스로의 삶을 둘러싼 환경을 통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가 테크놀로지에 저항하는 이유는 테크놀로지로 인해 작은 집단들이 거대 조직에 종속당하기 때문이다.
일부 좌파는 테크놀로지에 저항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테크놀로지에 저항하는 것은 그들이 아웃사이더일 경우에 한해서이며, 테크놀로지 체제가 비좌파에 의해 통제되는 경우에 한해서이다. 만약 좌파가 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그래서 좌파가 테크놀로지 체제를 언제든 쓸 수 있는 도구로 만든다면, 그들은 그 때부터 열광적으로 테크놀로지를 이용하고 테크놀로지의 발전을 지원할 것이다. 좌파주의가 역사에서 끝없이 반복해 왔던 그 패턴 그대로의 행동이다. 러시아 볼셰비키가 아웃사이더였을 때는 검열과 비밀 경찰에 대해 격렬히 저항했고, 소수 민족의 자율권을 외쳤다. 그러나 자신들에게 권력이 넘어오자마자 볼셰비키는 더 철저한 검열을 실시했고 짜르 치하에서의 비밀 경찰보다도 잔인한 비밀 경찰을 창설했다. 그리고 소수 민족에 대단 억압도 짜르 시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미국의 경우, 몇십 년 전 대학에서 좌파가 소수였을 때, 좌파 교수들은 열렬히 학문의 자유를 주장했다. 그러나 오늘날, 좌파가 주도권을 쥔 대학들에서 좌파들은 나머지 모든 사람으로부터 학문의 자유를 빼앗고 있다(이것이 바로 '정치적으로 옳은'운동 이다) 똑같은 일이 좌파와 테크놀로지 사이에도 벌어질 것이다. 일단 테크놀로지를 자기 통제하에 넣고 나면, 좌파는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나머지 모든 사람을 억압할 것이다.
과거의 혁명에서 권력에 눈이 먼 좌파들은 처음에는 진보적 성향의 좌파는 물론 비좌파 혁명가들에게도 협력했다. 그리고나서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양쪽을 모두 배반했다. 프랑스 혁명에서는 로베스피에르가 그랬고, 러시아 혁명에선 볼셰비키가 그랬다. 1938년 스페인 내란에선 공산주의자들이, 쿠바에선 카스트로와 그 일당이 그랬다. 좌파의 지난 역사를 두고 볼 때, 오늘의 비좌파 혁명가들이 좌파와 협력하는 것은 참으로 멍청한 짓이다.
수많은 사상가들이 좌파주의는 일종의 종교임을 지적해 왔다. 물른 좌파주의는 일체의 초자연적 존재를 주장하지 않으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종교는 아니다. 하지만 좌파에게 있어 좌파주의는 마치 종교가 사람들에게 하는 것과 거의 동일한 심리적 역할을 수행한다. 좌파는 좌파주의를 믿어야 한다. 좌파주의는 좌파의 심리적 경제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그의 신념은 논리나 사실에 의해 쉽게 수정되지 않는다. 그는 좌파주의가 윤리적으로 '옳다(Right =우파)'라는 확고한 신념과, 자신에겐 좌파 윤리를 모든 사람에게 강요할 권리뿐만 아니라 의무도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좌파로 부르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자신을 좌파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신념 체계를 좌파주의라고 부르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가 '좌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페미니스트나 동성애 권리 운동, 정치적으로 옳은 운동 등 관련된 운동 부류들을 모두 지칭할 더 적합한 용어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며, 또한 이들 운동이 과거의 좌파 운동과 강력한 친화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문단 227~230을 보라).
좌파주의는 전체주의적 세력이다. 좌파 주의가 일단 권력을 장악하면, 곧바로 모든 사적 영역을 침범해 들어가며 모든 사상을 좌파주의의 틀에 맞춰 뜯어고친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좌파주의가 지닌 사이비 종교적 성격 때문이다. 좌파주의에 어긋나는 모든 것은 '죄악'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좌파주의가 전체주의적 세력이 되는 것은 좌파들의 권력 욕망 때문이라는 점이다. 좌파는 사회 운동과의 동일화를 통해 권력 욕구를 충족시키려 하며, 운동의 목표를 추구하고 달성하도륵 협력함으로써 권력 과정을 통과하려 한다 (문단 83을 보라). 하지만 운동이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경우에도 좌파는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그의 운동이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이기 때문이다(문단4l을 보라). 즉 좌파의 진정한 동기는 좌파주의의 표면적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진정한 동기는 사회적 목표를 위해 투쟁하고 목표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그가 얻게 되는 권력의 느낌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좌파는 자신이 이미 달성한 목표로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 권력 과정에 대한 욕구로 인해 좌파는 항상 새로운 목표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 좌파는 소수 민족에게 동등한 기회가 주어지기를 원한다. 일단 그 목표가 이루어지면 이번엔 소수 민족이 통계적인 평등을 이룩해 줄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그 때까지 변함없이 여전히 소수 민족에 부정적 태도를 보이고 있을 경우에는 그사람을 재교육시켜야 한다. 소수 민족만으로는 층분치 않다. 누구도 동성애자와 장애자, 뚱뚱한 사람, 노인, 못생긴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 대상은 끝없이 이어진다. 대중에게 흡연의 위험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담뱃갑마다 경고문을 찍어야 한다. 이어서 담배 광고를 금지하지는 못해도 제한해야 한다. 담배가 불법이 되기 전에는 운동가에게 만족은 결코 있을 수 없고, 담배가 불법이 되고 나면 이번엔 술이, 다음 번엔 인스턴트 음식이 표적이 된다. 운동가들은 어린이 학대가 광범위하게 자행되고 있음을 세상에 알렸다. 잘한 일이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엉덩이 때리기까지 금지하고 싶어한다. 엉덩이 때리기를 금지하고 나면 그 때는 또 그들이 보기에 건전하지 않은 어떤 것을 금지하려 들 것이다. 금지 대상품목은 끝없이 이어진다. 어린이 양육법에 관한 모든 것을 통제하기 전까지는 그들은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또 다른 사회 문제로 넘어갈 것이다.
좌파에게 사회에서 잘못된 것들을 모조리 적은 리스트를 만들게 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모든 사회적 변화를 이뤄 준다고 가정해 보자. 를림없이 몇 년 안에 대부분의 좌파는 새로운 불만거리, 교정해야 할 새로운 사회'악'을 찾아낼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좌파를 움직이는 동기는 사회의 병패를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찾아낸 해결책을 사회에 강요함으로써 자신의 권력 욕망을 층족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좌파의 생각과 행동은 그들이 고도로 사회화되어 있는 까닭에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나치게 사회화된 좌파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방식대로 권력을 추구할 수 없다. 그들에게 권력 욕망이 빠져나갈 출구는 하나뿐이다. 그 출구란 바로 자신의 윤리관을 모든 사람에게 강제로 주입하기 위한 투쟁이다.
좌파, 특히 지나치게 사회화된 부류들은 에릭 호퍼(Eric Hoper)의 책 [참된 신자(The True Believer)]에서 말하는 바로 그 의미에서의 '참된 신자'들이다. 그러나 모든 참된 신자들이 좌파와 동일한 심리적 특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참된 신자 나치는 참된 신자 좌파와는 확실히 다른 심리적 특성을 갖고 있을 것이다. 하나의 사회 문제에 대해 한마음으로 전념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므로 참된 신자들은 혁명 운동에 유용한 구성원이 될 수 있으며 어쩌면 필수적인 구성원일지도 모른다. 이때 제기되는 문제는, 우리가 다를 수 없는 사람들도 혁명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테크놀로지에 항거하는 혁명에 참여하는 이들 참된 신자들의 에너지에 어떻게 고삐를 채을 수 있을지 전혀 확신이 서질 않는다. 현 단계에서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참된 신자의 열정을 오로지 테크놀로지 파괴에만 국한시킬 수 없을 경우, 참된 신자를 혁명에 끌어들이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는 것이다. 만약 그가 또 다른 이상에 몰두하게 된다면, 그는 그 이상을 추구하는 수단으로서 테크놀로지를 이용하려 할 것이다(문단 220, 221을 보라).
어떤 독자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좌파주의에 대해 당신들이 지껄인 얘기는 모두 쓸데없는 얘기다. 내가 아는 존과 제인은 모두 좌파들이지만 당신들이 말하는 전체주의적 성향 같은 것은 갖고 있지도 않다." 절대 다수의 좌파들이 선량한 사람들로서 타인의 가치관을 인정해야 한다는 진지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들의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고압적인 수단을 사용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은 옳은 말이다. 우리가 좌파주의에 대해 내린 핑가는 모든 좌파 개인들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으로서의 좌파주의가 지닌 일반적 성격에 해당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운동의 성격이 반드시 거기 참여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수적 점유율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좌파 운동에서 권력자의 위치에 오르는 사람들은 대개 가장 심하게 권력에 눈이 먼 유형의 좌파들이다. 권력에 눈이 먼 사람들만이 권력자의 위치에 오르기 위해 발버둥치기 때문이다. 일단 권력에 눈먼 자들이 운동의 통제권을 장악하면 보다 얌전한 많은 좌파들은 지도자들의 행동에 대해 내심으로는 불만을 품게 되지만, 앞장 서서 지도자들에게 저항하지는 못한다. 얌전한 좌파들은 운동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고 따라서 그 믿음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지도자들을 따라가는 것이다. 맞다. 어떤 좌파들은 담대하게 나서 전체주의적 성향에 대해 저항한다. 하지만 대개 그들은 패배할 수밖에 없다. 권력에 눈먼 좌파들이 훨씬 더 조직적이고 훨씬 더 잔인하며, 마키아벨리적이고, 그 때까지 이미 확고한 권력의 토대를 쌓아 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현상이 러시아와 그 밖의 좌파가 장악한 국가들에서 나타났다. 그와 비슷한 현상으로, 옛 소련에서 공산주의가 붕괴하기 전, 서구의 좌파들은 거의 소련을 비난하지 않았다. 어쩌다 할 수 없이 옛 소련이 수많은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인정할 때도 있었지만, 그들은 곧 공산주의자를 위한 변명거리를 찾아내려 애썼고, 다시 서방의 잘못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들은 언제나 공산주의의 공격에 대한 서방의 군사적 대응을 반대했다. 전 세계의 좌파들이 베트남에서의 미국의 군사 행동에 대해 격렬히 저항했다. 하지만 옛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소련의 행동을 인정해서가 아니었다. 좌파로서의 믿음을 버릴 수 없었기에 그들은 차마 공산주의에 대해 저항할 수가 없었다. 오늘날, '정치적으로 옳은 자'들이 지배하는 우리의 대학에 있는 좌파들 증의 다수가 개인적으로는 학문의 자유에 대한 제약을 인정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어떻게든 학문의 자유에 대한 제약과 함께 살아간다.
따라서 많은 좌파 개인들이 온유하고 관대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전체 좌파주의가 전체주의적 성향을 지니게 되는 경향을 막아주지는 못한다.
우리의 좌파주의 논의는 한 가지 심각한 취약점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좌파'라는 단어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지가 여전히 모호하다는 점이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 같다. 오늘날 좌파주의는 수많은 운동으로 분열되어 있다. 물론 모든 운동이 좌파 운동은 아니다. 그리고 몇몇 운동들 (과격 환경주의 등)은 좌파 유형의 사람들과 함께 철저한 비좌파 유형의 사람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바라건대 이들 비좌파들은 좌파와 협력하기에 앞서 좌파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두어야할 것이다. 다양한 유형의 좌파들이 다양한 유형의 비좌파들 속으로 숨어 들어간다. 그러니 어떤 개인이 좌파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기가 매우 어려운 경우도 흔하다. 좌파주의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일단 현재까지는 이 선언문에서 언급된 규정을 따른다. 우리가 독자들에게 줄 수 있는 충고는 누가 좌파인지를 판정할 때 자신의 판단을 따뜨라는 것뿐이다.
하지만 좌귀주의를 가려내기 위한 분류 기준이 있다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단, 이 분류 기준을 곧이곧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 어떤 개인들은 좌파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일부 기준에 맞아떨어질 수도 있고, 이 분류 기준에 전혀 맞지 않는 좌파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판단은 당신 스스로가 해야 한다.
좌파는 대규모 집단주의를 지향한다. 그는 오로지 사회를 위해 일하는 개인의 의무와 개인을 보호할 사회의 의무만을 강조한다. 그는 개인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는 때로 도덕주의자의 어투를 나타낸다. 그는 총기 휴대와 성교육, 그 밖의 심리적 계몽 교육범, 흑인 차별 해소 운동, 문화적 다원주의 등을 지지한다. 그는 피해자들과 자신을 동일화한다. 그는 경쟁과 폭력에 반대하면서도, 폭력을 저지르는 좌파를 변호한다. 그는 인종 차별주의, 성 차별 주의, 동성애 혐오, 자본주의, 제국주의, 신식민지주의, 인종 청소, 사회 변동, 사회 정의, 사회적 책임 등과 같은 좌파의 캐치프레이즈를 즐겨 사용한다. 좌파를 알아보는 가장 종은 방법은 그가 페미니즘이나 동성애 권리, 소수 민족 권리, 장애자 권리, 동물 권리, 정치적으로 옳은 운동 등에 대해 공감하고 있는지롤 알아보는 것이다. 이 모든 운동에 대해 열심히 공감하는 사람은 거의 틀림없이 좌파라고 보면 된다.
그들보다 더 위험한 좌파가 권력에 눈먼 부류들이다. 그들은 흔히 거만하고 이데올로기에 대해 교조적으로 접근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하지만 가장 위험한 좌파는 지나치게 사회화 된 부류로, 그들은 자신들의 좌파주의를 공격적으로 반복해서 떠들어댐으로써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들은 조용히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어린이들을 사회화시키고 개인을 체제에 종속시키는 집단주의적 가치관과 '계몽적' 심리 기법을 확산시킨다. 이들 비밀 좌파들은 (우리가 일컫는 대로) 특정 부르주아 유형과 흡사하다. 단, 이들 사이의 유사성은 실천적 행동이 관련된 한에서 그치며, 이들은 심리, 이데올로기, 그리고 동기의 측면에서는 서로 확연히 다르다. 보릉 부르주아들은 자신의 생활 양식을 지키기 위해서 사람들을 체제의 통제 하에 두려고 하거나, 아니면 단순히 전통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다. 비밀 좌파가 사람들을 체제의 통제 아래 두려고 하는 이유는 그가 집단주의 이데올로기의 '참된 신자'이기 때문이다. 비밀 좌파가 지나치게 사회화된 좌파와 구분되는 것은, 비밀 좌파의 저항적 충동이 절대적으로 약하며, 그가 더욱더 철저하게 사회화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잘 사회화된 부르주아와도 구분된다. 그는 내면적으로 깊은 박탈감을 갖고 있으며, 그로 인해, 사회 문제에 몸바쳐 일하고 집단에 몰두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잘 승화된) 권력 욕망은 보통 부르주아의 그것보다 훨씬 강렬하다.

결언
이 선언문에는 수많은 부정확한 진술들 이 담겨 있으며, 그런 진술들에는 어떻게든 단서 조항들과 유보 조항들을 함께 이야기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의 진술 증 일부는 완전히 틀린 것일 수도 있다. 정보 부족으로 인해, 그리고 지면이 짧은 까닭에, 우리는 좀더 정확하게 우리의 주장을 공식화하지 못했고, 필요한 단서 조항을 빠짐 없이 글 속에 포함시키지도 못했다. 물론 이런 종류의 논의에서는 누구나 어쩔 수 없이 직관적 판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때로는 그런 직관적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선언문이 그저 진실에 어느 정도 가까울 것이라는 정도밖에는 자신할수 없다.
그러나 별 차이는 없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그린 그림의 전체적 윤곽이 대체로 정확할 것이라고 자신한다. 우리가 자신할 수 없는 한 가지에 대해 언급하겠다. 우리는 현대적 형태의 좌파주의가 우리 시대에 국한된 현상이라고, 그리고 권력 과정의 붕괴로 인해 빚어진 병적 증상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틀렸을 수도 있다. 자신들의 윤리관을 모든 사람에게 강제함으로써 권력 욕망을 층족하려고 하는 지나치게 사회화된 부류들은 분명히 오래 전부터 존재해 왔다. 그러나 우리는 열등감, 자기 비하, 무력감, 스스로는 피해자가 아니면서도 피해자들과 자신을 동일화하는 것 등의 병적 심리가 운동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현상은 오로지 현대 좌파주의에서만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는 피해자가 아니면서 피해자들과 자신을 동일화하는 특성은 사실 19세기의 좌파주의와 초기 기독교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특성이다. 하지만 그런 운동들에서는 우리가 아는 한, 자기 비하와 같은 병적 증상들이 현재 좌파주의에서처럼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물론 우리는 그 같은 현대 좌파주의 이전에는 그런 병적 증상을 지닌 운동이 결코 없었다고 자신 있게 주장할 만한 위치에 있지는 않다. 그 문제에 대한 신중한 질문은 역사가들의 몫일 것이다.

NOTES
(문단 19) 우리는 모든, 아니면 대부분의 건달 두목과 무자비한 경쟁자들도 역시 열등감을 겪고 있다고 주장한다.
(문단 25) 빅토리아 시대동안 많은 지나치게 사회화된 사람들은 성욕을 억제하거나 또는 억제하려고 노력한 결과로 심각한 정신 질환을 겪었다. 프로이드의 이론은 명백히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에 기반을 두었다. 오늘날 사회화의 초점은 성에서 공격성으로 옮겨졌다.
(문단 27) 공학과 자연과학의 전문가를 반드시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문단 28) 이러한 가치들에 반대하는 많은 중상 계층이 있지만 대개 그들의 저항은 다소 숨겨져 있다. 그러한 저항은 아주 제한된 정도로만 대중 매체에 나타난다. 우리 사회의 프로퍼겐더의 주된 언급은 앞서 말한 가치들에 호의적이다. 이러한 가치들이 소위 우리 사회의 공식적인 가치가 된 주된 이유는 그것들이 산업 사회에 유용하기 때문이다. 폭력을 반대하는 것은 그것이 체제의 기능을 혼란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것은 민족 분쟁 또한 체제을 혼란에 빠뜨리고 차별은 체제에 유용할 수도 있는 소수 집단의 재능을 낭비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치유되어야만 하는데 그것은 하층민이 체제에 문제를 일으키고 하층민과의 접촉이 다른 계층의 도덕을 타락시키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직업을 갖도록 장려되는데 그것은 그들의 재능이 체제에 유용하며, 더욱 중요한 것은 여성이 정규 직업을 가지게 됨으로써 체제에 통합되고 가정보다는 체제에 더 구속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족의 유대감을 약화시키는데 도움을 준다. (체제의 지도자들은 그들은 가족이 강화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말의 진정한 의미는 가족이 체제의 요구에 부응하도록 자녀를 사회화하는 유용한 도구로 역할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우리는 문단 51, 52에서 체제는 가족이나 다른 작은 규모의 사회 집단이 강력해지거나 자율을 누리도록 할 수 없다는 것을 논할 것이다.)
(문단 42)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 결정을 내리기를 원하지 않고 지도자가 그들을 대신해 생각해 주기를 바란다고 논박할 수도 있다. 이러한 주장에는 맞는 구석이 있기는 하다. 사람들은 작은 일에 있어서는 그들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싶어하지만 어렵고 근본적인 문제는 정신적 갈등을 야기시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적 갈등을 싫어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 데에 있어서 다른 이들에게 의지하는 경향이 있다. 다수의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지도자가 아니라 따르는 사람이지만 그들은 그들의 지도자와 직접적인 개인적 접촉을 갖기를 원하고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데 있어서 어느 정도 관여하고 싶어한다. 적어도 그 정도까지는 그들은 자율을 필요로 한다.
(문단 44) 나열된 증상들의 일부는 우리에 갇힌 동물들에게서 나타나는 것과 비슷하다. 어떻게 이런 증상들이 권력 과정에 대한 기회 박탈로 부터 발생하는지 설명해보겠다. : 인간 본성에 대한 상식적인 이해는 그 성취를 위해 노력을 필요로 하는 목표의 부족은 지루함으로 이르고 지루함은 오래 지속되면 대개는 결국 절망으로 이르게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목표 획득의 실패는 좌절과 자기 비하로 이른다. 좌절은 분노로, 분노는 공격으로 이어지고, 종종 배우자나 자녀 학대의 형태로 나타난다. 오래 지속된 좌절이 대개는 절망으로 그리고 절망은 범죄를 일으키고, 불면증, 과식과 자신에 대한 악감정을 유발시킨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절망에 이르고 있는 이들은 해독제로서 쾌락을 추구한다. - 새로운 흥분을 느끼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탐욕스러운 쾌락주의, 변태적 성행동 - 권태 또한 지나친 쾌락추구를 일으키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다른 목표가 없는 사람들은 대개 쾌락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첨부된 도표를 보라. 전술된 것들은 단순화한 것이다. 실제로는 더욱 복잡한데, 물론 권력 과정에 대한 기회 박탈만이 전술된 증상들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그건 그렇고, 우리가 절망을 언급할 때, 그것은 반드시 정신과 의사에 의해 치료되어야만 하는 그런 심각한 절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종종 그저 가벼운 종류의 절망이 연루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가 목표를 이야기 할때 우리는 반드시 장기적인 안목의 용의주도한 목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랜 인류의 역사를 통해 많은 또는 대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벌어 먹고사는(단순히 자신과 가족들에게 하루하루 먹을 것을 제공하는) 목표도 아주 충분한 목표였다.
(문단 52) 부분적인 예외가 바깥 사회에 대해서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 Amish같은 일부 수동적이고, 비밀스럽게 보이는 집단에 대해 있을 수도 있다. 이들과는 별개로, 몇몇 순수한 작은 규모의 공동체가 현재 미국에 존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청소년 깡패와 (사교(邪敎)의)종파들이다. 모두들 그들을 위험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다. 왜냐하면 이런 집단들의 성원들은 체제가 아니라 서로에게 우선 충성하므로 체제가 그들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집시들을 예로 들자면, 집시들은 대개 절도나 사기를 잘 치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의리는 그들은 언제든지 다른 집시들이 그들의 결백을 입증할 증언을 하도록 할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집단들에 속한다면 명백히 체제는 아주 심각한 곤란을 겪게 될 것이다. 중국의 근대화에 참여했던 20세기 초기의 중국 사상가들 중 일부는 가족과 같은 소규모 사회 집단의 해체 필요성을 인식했다. "(Sun Yat-sen에 따르면) 중국 인민들은 가족으로 부터 국가로 충성심을 돌리게 될 새로운 애국심의 고취가 필요하다... (Li Huang에 따르면) 전통적인 집착, 특히 가족에 대한 애착은 애국심이 성장한다면 중국에게 넘겨져야만 한다." (Chester C. Tan, 20세기 중국 정치 사상, 125페이지, 297페이지)
(문단 56) 그렇다. 우리는 19세기 미국이 심각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간략함을 위해 우리는 단순화된 용어로 표현했다.
(문단 61) 우리는 하층계급은 제쳐두고 얘기하였다. 우리는 주류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문단 62) 몇몇 사회과학자, 교육학자, "정신 건강" 전문가와 같은 이들은 모든 이들이 만족스러운 사회적 삶을 영위하도록 애씀으로써 사회적 추진력을 첫번째 부류에 쏟아붓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문단 63, 82) 끊임없는 재화 획득의 욕망은 정말 광고와 마케팅 산업의 인위적 산물인가? 분명히 선천적인 인간의 재화 획득의 욕망은 없다. 그들의 기본적인 물질적 필요 이상으로는 물질적 부를 거의 바라지 않았던 많은 문화들이 있었다.(호주 원주민, 멕시코 농경 문화, 몇몇 아프리카 문화들) 반면 재화 획득이 중요한 역할을 한 산업화 이전의 문화들도 많았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의 물질추구 문화가 전적으로 광고나 마케팅 산업의 산물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광고와 마케팅 산업은 그러한 문화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수백만 달러를 광고에 쏟아 붓는 거대 기업들은 그들이 판매 증가로 그 돈을 되돌려 받을 수 있다는 확실한 증거 없이는 그만한 돈을 쓰지 않을 것이다. FC의 한 멤버는 2년 전에 그에게 "우리의 일은 사람들이 원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사도록 하는 일입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솔직한 판매 담당자를 만났었다. 그리고 그는 어떻게 훈련받지 않은 초보 사원은 상품에 대한 안내를 해도 하나도 팔지 못하는 반면 훈련 받고 경험있는 전문 세일즈 맨이 같은 사람들에게 많이 팔 수 있는가 를 설명해 주었다. 이것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들이 원하지 않는 것도 사도록 조종당함을 보여준다.
(문단 64) 목적 상실감의 문제는 지난 15년 동안은 덜 심각해진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제 예전보다고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덜 안전함을 느끼고 안전에 대한 요구는 그들에게 목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적 상실감은 안전을 얻기위한 어려움에 의해 좌절로 대체되었다. 우리는 자유주의자들과 좌파들이 사회가 모두의 안전을 보장하도록 함으로써 사회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만 만약 그것이 가능해 진다면 그것은 다시 목적 상실감의 문제를 가지고 올 것이기 때문에 목적 상실감의 문제를 강조한다. 진정한 문제는 사회가 사람들의 안전을 잘 지켜줄 것이냐 못 지켜줄 것이냐가 아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들의 안전을 스스로의 손으로 지키기 보다는 체제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일부 사람들이 무장할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일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총기 소지는 그들의 안전 문제를 그들의 손으로 념겼다.
(문단 66) 정부 규정의 양을 줄이기 위한 보수주의자들의 노력은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첫째로, 대부분의 규정는 필요하기 때문에 일부분의 규정만이 폐지된다. 둘째로, 대부분의 규정은 일반인 보다는 사업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어서 그 주된 결과는 권력을 정부로 부터 사기업으로 양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일반인들에게 의미하는 것은 그들의 삶에 있어서의 정부의 간섭이 거대 기업으로 부터의 간섭으로 대체된다는 것이다. - 따라서 거대기업은 예를 들어 그들의 화학 폐기물을 상수도 시설에 방류하여 암을 유발시키도록 용인 받을 것이다. - 보수주의자들은 그저 일반인들을 멍청이로 여기고 거대 정부에 대한 그들의 분노를 이용해 거대 기업의 권력을 키워주고 있다.
(문단 73) 누군가가 주어진 경우에 프로퍼겐더가 사용되는 목적을 승인할 때 그는 대개 그것을 "교육"이라 부르거나 약간 비슷한 완곡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프로퍼겐더는 그것이 어떤 목적으로 쓰이는 상관없이 프로퍼겐더이다.
(문단 83) 우리는 파나마 침공에 대한 승인또는 반대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주제를 예시하기 위해 그것을 사용했다.
(문단 95) 아메리카 식민지들이 영국의 지배하에 있을 때에는 미국 헌법이 발효된 후보다 자유에 대한 효과적인 법적 보장이 더 적었다. 그러나 독립전쟁 전후의 산업화 이전의 미국에는 산업 혁명이 일어난 후보다 더 많은 개인적 자유가 있었다. 우리는 Hugh Davis Graham과 Ted Robert Gurr가 편집한 "미국에서의 폭력: 역사적이고 비교적인 시각" 중 Roger Lane이 쓴 12장 476-478페이지에서 인용했다. - "점진적인 재산권 제도의 강화와 그에 따른 공식적인 법률의 집행에 대한 의존의 증가(19세기 미국에서의)는 ... 사회 전체에 공통적인 것이었다. ... 사회적 행위의 변화는 아주 장기적이고 광범위해서 대부분의 기본적인 현대 사회 과정 - 산업 도시화 그 자체의 - 과의 연관을 제안할 정도였다. ..." "1835년 메사추세츠에는 약 660940명의 인구와 81퍼센트의 시골의, 압도적인 산업화 전의 토착민이 살고 있었다. 그곳의 시민들은 모두 상당한 개인적 자유에 익숙했다. 마부든 농부든 공예가든 그들은 모두 그들 자신의 일정을 짜는 것에 익숙했고 그들의 작업의 성격은 그들을 물질적으로 서로에게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개인적인 문제들, 과실 또는 범죄조차 일반적으로 광범위한 사회적 관심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도시와 공장으로의 이주의 충격은 - 모두 1835년에야 힘을 얻기 시작했는데 -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개인적 행동에 점진적인 영향을 주었다. 공장은 행동의 규제, 시계와 달력의 리듬에 대한 복종에 지배되는 삶, 십장과 감독자를 요구했다. 도시또는 읍에서는 이웃과 가까이 밀집된 삶에 대한 필요로 인해 전에는 불쾌하게 생각되지 않았던 많은 행동들이 금지되었다.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 노동자 모두 더 커진 체제에서 그들의 동료들에게 상호의존하게 되었다. - 한 사람의 작업이 다른 사람의 작업에 맞추어 짐에 따라 한 사람의 일은 더 이상 그 자신의 것만은 아니게 되었다. - "새로운 삶과 일의 조직의 결과는 1900년에 이르러 명백해졌다. 2805346명의 메사추세츠 인구중 약 76퍼센트는 도시인구로 구분되었다. 무관심한 독립적인 사회에서는 용인되었던 많은 폭력또는 불법적인 행동은 나중의 더욱 형식화되고 협동적인 환경에서는 더이상 용납되지 않았다... 도시로의 이주는, 요약하자면, 그들의 선조보다 더욱 온순하고 더욱 사회화되고 더욱 "문명화"된 세대를 만들어냈다." 만약 저작권 문제로 이 긴 인용을 쓸 수 없다면 Note 16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주기 바란다. :
(문단 95) 아메리카 식민지들이 영국의 지배하에 있을 때에는 미국 헌법이 발효된 후보다 자유에 대한 효과적인 법적 보장이 더 적었다. 그러나 독립전쟁 전후의 산업화 이전의 미국에는 산업 혁명이 일어난 후보다 더 많은 개인적 자유가 있었다. Hugh Davis Graham과 Ted Robert Gurr가 편집한 "미국에서의 폭력: 역사적이고 비교적인 시각"중에서 Roger Lane이 쓴 12장은 산업화 이전의 미국에서 일반인들이 어떻게 오늘날보다 더 많은 독립성과 자율성을 가지고 있었는지와 어떻게 산업화 과정이 필연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제한시켰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다.
(문단 117) 체제 옹호론자들은 한두명의 투표자에 의해 결정되는 선거의 경우를 언급하길 좋아한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는 드물다.
(문단 119) "오늘날, 기술적으로 진보된 곳에서, 인간은 지리적, 종교적, 그리고 정치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매우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 시카고의 기독교 은행의 직원, 동경의 불교 은행 직원, 모스크바의 공산주의 은행 직원의 일상 생활은 그들중 어느 한 사람의 삶과 천년전에 살았던 누군가의 삶이 비슷한것 보다 훨씬 더 똑같다. 이러한 유사성은 공통된 기술의 결과이다..." L. Sprague de Camp, "고대의 기술자들", Ballentine edition, 18 페이지. 세 은행 직원의 삶은 "동일"하지는 않다. 이데올로기가 "어떤" 역할을 했다. 그러나 모든 기술 사회에서는 살아남기 위해서 대부분은 "거의" 같은 궤도를 따라 선회한다.
(문단 123) 그저 무책임한 유전 공학자가 수많은 테러리스트를 만들어 낼 것을 생각해보라.
(문단 124) 의학적 진보의 바람지하지 않는 결과에 대한 다른 예로서 암에대한 확실한 치료법이 발견되었다고 가정해보자. 치료 비용이 너무 비싸서 엘리트 이외의 사람들은 이용할 수 없다고 할 지라도 발암 물질을 유출시키는 것을 막아야 할 동기를 크게 줄일 것이다.
(문단 128) 많은 사람들은 수많은 좋은 것들이 모여 하나의 나쁜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역설적인 개념을 발견할 것이므로 우리는 동일한 예를 들어보이겠다. A씨가 B씨와 체스를 두고 있다고 가정하자. 단장인 C씨는 A씨의 어깨너머로 보고 있다. A씨는 물론 개임을 이기기를 원하기 때문에 만약에 C씨가 좋은 한수를 훈수해 준다면 그는 A씨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C씨가 A씨에게 그에게 모든 수를 훈수해 준다고 가정해 보자. 매순간마다 그는 A씨에게 최선의 수를 보여줌으로써 도움을 주지만 그의 모든 수를 훈수함으로써 게임을 망치게 되는데 왜냐하면 만약 다른 누군가가 그의 모든 수를 훈수한다면 A씨가 하는 게임에서는 전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의 상황은 A씨의 상황과 동일하다. 체제가 셀수없이 많은 방법으로 개인의 생활을 편하게 해주지만 그렇게 하는 와중에 그에게서 그 자신의 운명에 대한 통제권을 뺏어가버린다.
(문단 137) 여기서 우리는 주류들 사이의 가치 충돌만을 고려하고 있다. 간결함을 위해서 우리는 야생의 자연이 인간의 경제적 복지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과 같은 "outsider"들이 가치있게 여기는 상은 제외하였다.
(문단 137) 이기주의는 반드시 '물질적인' 이기주의는 아니다. 그것은 예를 들어 자신의 이데올로기나 종교를 고양하는 것과 같은 어떤 정신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에 존재할 수도 있다.
(문단 139) 제한 : 몇몇 영역에서 어떤 규정된 정도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은 체제에 이로운 것이다. 예를 들어, 경제적 자유(적당한 제한을 가한)는 경제성장을 촉진시키는데 효과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오직 계획되고, 한정된 자유만이 체제에 이로운 것이다. 때로는 끈이 길지라도 개인은 항상 묶여있어야 한다. (문단 94, 97을 보라)
(문단 143) 우리는 사회의 효율이나 지속 가능성이 항상 사회가 사람들에게 가하는 압력이나 고통의 양에 반비례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분명 사실이 아니다. 많은 원시 사회들이 유럽 사회보다 사람들에게 압력을 덜 가했지만 유럽 사회는 어떤 원시 사회보다도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것이 입증되었으며 기술이 제공한 이점때문에 항상 그런 사회들과의 충돌에서 승리했다.
(문단 147) 만약 보다 효율적인 법집행이 범죄를 억제할 수 있기 때문에 명백히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체제에 의해 정의된 범죄는 반드시 당신이 범죄라고 부르는 그런 것은 아님을 명심하라. 오늘날, 마리화나를 피는 것은 "범죄"이고 미국의 어떤 곳에서는 신고되지 않은 권총 소지또한 그렇다. 장래에, '어떠한' 무기류 소지도, 신고되었든 되지 않았든, 범죄가 될 것이고 같은 일이 엉덩이를 찰싹 때리는 것과 같은 자녀 양육에 있어서의 승인되지 않은 방법에서도 일어날 것이다. 어떤 나라에서는 정치적인 반대 의견의 표현은 범죄이고 헌법이나 정지제도가 영원한 것은 아니므로 이것이 미국에서도 일어나지 말라는 보장도 없다. 만약 사회가 큰 강력한 법집행의 수립을 필요로 한다면, 그 사회에는 중대하게 잘못된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 법률을 따르기를 거부하거나 혹은 강제되기 때문에 따를 뿐이라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과도한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 과거의 많은 사회들은 어떤 정식의 법집행 없이도 잘지내 왔다.
(문단 151) 확실히, 고거의 사회들도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들은 지금 개발되고 있는 기술적인 수단에 비하자면 원시적이고 효율이 낮은 것이었다.
(문단 152) 그러나, 어떤 심리학자들은 공식적으로 인간의 자유에 대한 그들의 경멸을 나타내는 의견을 밝히곤 했다. 그리고 수학자 Claude Shannon은 Omni(1987년 8월)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우리와 로봇의 관계가 개와 인간의 관계와 같은 그런 때를 형상화하고 있으며 나는 기계를 응원하고 있다."
(문단 154) 이것은 공상 과학 소설이 아니다. 문단 154를 쓴 후에 우리는 Scientific American지에서 과학자들이 가능한 미래 범죄자를 식별하고 생물학과 심리학적인 수단의 조합을 통해 그들을 치료하는 기술을 열심히 개발하고 있다는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어떤 과학자들은 가까운 미래에 이용가능할 그 치료의 강제적인 적용을 주장한다. (Scientific American 1995년 3월에 실린 W. Wayt Gibbs가 쓴 "범죄 요소 찾기"를 보라.) 아마도 당신은 그 치료가 폭력적인 범죄자가 될 사람들에게 적용될 것이므로 괜찮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물론 그것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다음에는 치료법은 음주 운전자가 될 사람들(그들 역시 인간의 삶을 위협한다.)에게 적용될 것이다. 그 다음엔 아마 자녀의 엉덩이를 때리는 사람들에게, 다음엔 벌채기를 파손시키는 환경주의자들에게, 결국에는 행동이 체제를 성가시게 하는 모든이들에게 적용될 것이다.
(문단 184) 기술에 대한 대안적 이상으로서의 자연의 또다른 이점은 많은 사람들에게 자연은 종교와 관련된 일종의 외경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은 아마 종교적인 바탕위에서 이상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사회에 있어서 종교가 이미 수립된 질서를 지지하고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것을 사실이지만 종교가 종종 반란의 기반을 제공했던 것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기술에 대항한 반란에 종교적 요소를 도입하는 것도 유익할 것인데 더욱이 오늘날 서구 사회는 어떤 강력한 종교 단체도 없기 때문이다. 요즘의 종교는 좁고, 근시안적인 이기주의를 위한 쉽고 투명한 지원책으로 사용되거나 (몇몇 보수주의자들이 이 방법을 사용한다.) 또는 시니컬하게도 쉽게 돈을 버는데에 이용되거나 (많은 복음 전도사들에 의해) 또는 조잡한 비합리주의(근본주의 청교도 비국교도, "사교")로 타락하거나 단순히 침체되어 있거나 (카톨릭, 정통 청교도)중의 하나이다. 최근까지 서방에 존재했던 강력하고 광범위하며 역동적인 종교에 가장 가까운 것은 좌파의 의사종교이지만 오늘날 좌파는 분열되어 어떤 명확하고 통합된 진취적인 목표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사회에는 아마도 기술에 반대하여 자연에 초점을 맞춘 종교로 채워질지도 모르는 종교적 공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할을 채우기 위해 어떤 종교를 인공적으로 꾸며내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그러한 고안된 종교는 아마도 실패할 것이다. "가이아"종교를 예로 들어보자. 그 추종자들은 '진정' 그것을 믿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인가? 만약 그들이 그저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들의 종교는 결국에는 주저앉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진정' 그 종교를 믿고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깊고 강력하며 순수한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자연과 기술의 충돌에 종교를 끌어들이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문단 189) 그러한 마지막 투쟁이 일어난다고 가정해보자. 필시 산업 시스템은 다소 점진적이거나 조각조각으로 제거될 것이다. (문단 4, 167, 그리고 Note 4를 보라)
(문단 193) 혁명이 오직 상대적으로 점진적이고 고통없이 산업 시스템을 해체시키는 기술적인 부문에서의 거대한 변화만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만약 이대로 일어난다면 우리는 매우 운이 좋을 것이다. 비기술적인 사회로의 이행은 매우 어렵고 혼란과 재앙으로 가득찰 것이라고 보는게 훨씬 더 가능성 있다.
(문단 195) 일반인들의 사는 방법을 결정짓는데 있어서 사회의 경제적 기술적 구조는 정치적 구조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문단 95, 119 그리고 Note 16, 18을 보라)
(문단 215) 이 말은 아나키즘 중에서 우리의 특별한 종류를 가리키는 것이다. 다양한 사회적 태도들이 "아나키스트"라 불리어 왔고 자신들을 아나키스트라 여기는 많은 사람들은 문단 215의 우리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마도 FC를 아나키스트로 받아들이지 않고 분명히 FC의 폭력적인 방법을 인정하지 않을 그런 비폭력적인 아나키스트 운동도 존재한다는 사실은 언급되어야 한다.
(문단 219) 많은 좌파주의자들은 적대감에 의해서도 고취되는데 그 적대감은 아마 부분적으로는 권력에 대한 좌절된 욕구로 부터 생긴 것일 것이다.
(문단 229) 우리는 우리 사회에 오늘날 존재하는 이러한 운동들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성, 동성애자 등이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믿는 이가 반드시 좌파인 것은 아니다. 페미니즘이나 동서애 권리 등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운동은 좌파로 규정되는 특정한 이데올로기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고 만약 누군가가 예를 들어 여성이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고 해서 오늘날 존재하는 페미니즘 운동에 반드시 공감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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