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의 딸과 결혼해서 부유하게 살았으며 당시에 가장 유명한 초상화가로 제자만 수십명을 거느렸을 정도로 명망이 있는 화가.
사후에 영어권 국가에서는 아주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을 보고 You are a real Rembrandt.라고 한다고 할 정도로 성공한 화가.
빛의 화가 또는 색조의 화가.
성서 화가.
누굴까요 ?

아주 볼품없이 생겨서 값싼 시장터 얼굴을 하고 있는 화가.
결혼을 두번 했고 두 아내 모두 젊어서 사망했으며 아이들 셋은 아주 어린 나이나 또는 젊은 나이에 먼저 죽은 인간적으로 불행한 화가.
인생의 후반기는 가난과 질병 속에서 살았으며 살아 생전 제자들보다 오히려 인정을 받지 못한 화가.
이 사람은 또 누굴까요 ?

위 글들은 모두 램브란트를 묘사한 글 중의 하나입니다.
혹시 당신은 램브란트를 어떤 화가로 알고 있습니까 ?

어느 부부가  어린 아들을 안고 있는 모습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화가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화가는 그림을 고치고 또 고치느라고 아무리 날짜가 지나도 완성된 그림을 보내 주지 않았습니다.
그림을 부탁한 손님이 언제쯤 그림이 완성 되는 거냐고 물어 보았을 때  화가는 아버지의 모습은 거의 완성 되었는데 아드님의 모습은 아직 조금 더 그려야 하니 모델을  더 서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그때 손님은 "나는 그러고 싶지만 그때 어린 아이였던 내 아들은 지금은 군대에 가 있어서 장성했는 데 어떻게 내가 품에 안고 몇시간씩이나 있을 수 있단 말이요" 하고 항의했다는 우스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 에피소드가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있다면 아마 그 화가는 램브란트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램브란트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하려면 그 앞에서 2 ~3개월은 앉아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더 이상 손볼 곳이 없을 때까지 다듬고 고쳐야 직성이 풀리는 화가로 유명했으니까요.
그는 하나의 얼굴을 캔버스에 그리기 위해 판본을 열 개 정도 만들었으며 그가 가장 만족스러운 터번의 위치를 잡기 위해서는 하루 종일, 때에 따라서는 이틀이 걸렸다고 하는데 이러한 것이 소문이 나면서 초상화 주문이 뚝 끊어지고 낭비벽도 영향을 주기는 했지만 말년에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된 원인이 됩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부를 위하여 램브란트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으며 또한 스스로가 만든 고통 속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지도 않았습니다.
램브란트의 제자들로 생전에 램브란트 보다 더 인기를 누렸다고 하는 초상 화가들로 야콥 바커나 호퍼르트 플링크라고 하는 이름을 우리는 거의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역시 많은 자화상을 남기고 여러 면에서 비슷한 고호처럼 번민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술가는 특히 더하겠지만 인간이 살아 간다는 것은 양끝을 가진 외줄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곡예사와도 흡사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산다는 것은 배가 고프지만 마음이 편한 이상과 배는 부르지만 마음이 불편한 현실 사이의 경계를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그렇게 왔다 갔다 하다가 어떤 사람은 균형이 허물어 져서 아래로 떨어져 버리기도 하겠지요.
램브란트는 화가로써는 신이나 도달할 수 있는 이상 쪽에 거의 가까이 다가갔지만 그러면서도 고흐처럼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꿋꿋히 지조를 지키면서 살아 남은 화가 중의 한 사람입니다.

지금 스타급 연예인들의 사진을 찍고 많은 CF를 담당한다는 일류 사진 작가들에게 자신이 죽은 후에나 인정을 받을 지도 모르는 예술적 가치가 있는 작품을 찍으면서 대신 당장의 경제적인 부나 현실적인 안락함을 완전히 포기하라고 하면 아무도 그렇게 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듯이 별 다른 능력이 없어서 유혹의 손길이 닿아 본 자가 아니라 얼마든지 그럴 능력이 있는 자가 유혹을 견디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천재적인 능력을 가진 화가가 비록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바라 하더라도 미치지도 않으면서 사회적 명성과 경제적인 부를 포기하기란 아마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 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램브란트는 그렇게 했습니다. 

램브란트를 빛의 화가라고도 하고 영혼의 화가라고도 합니다.
빛의 화가라고 하는 것은 그의 그림이 강렬한 색조 대비를 사용하고 빛을 화면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로서 사용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겠지만 영혼의 화가라고 하는 것은 나중에 인간적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면서도 끊임없이 영혼의 숭고함을 그림의 가치로 추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빛의 화가라고 하면 그의 그림이 가진 수단적인 특징을 말하는 것이며 영혼의 화가라고 하는 것은 그의 그림의 내면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는 초기에는 현란한 의상과 금은 장식으로 꾸며진 그림을 주로 그렸지만 후기로 가면서 단조롭고 아무 장식도 없이 화려하지 않은 그림을 주로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던 아내가 죽고 주문이 끊어져서 가난해 지고 사회로부터의 인정도 줄어 들고 여러가지로 굉장히 고통스러웠을 텐데 그는 비록 종교라고 하는 지지대를 통한 것이었기는 하지만 굴하지 않고 오히려 내면을 가만히 응시하면서 인생의 내적 가치를 바라다 보고 표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알려진 대부분의 작품도 이 후기 시기에  탄생한 것입니다.

결국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그림도 인간에게 감동을 주는 불후의 명작은 한결같이 창조자의 고통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램브란트의 그림도 그저 잘 그린 그림에서 느끼는 편안함보다는 그림으로써라도 내면적 고통을 털어 내보려 했던 한 인간의 고뇌가 느껴집니다.
오늘은 그의 다른 그림도 대부분 그렇다시피 오직 흰색과 갈색 두가지 색조로만 구성되고 다른 아무런 장식도 없는 그의 자화상을 감상해 봅니다.
참고로 고흐 다음으로 자화상을 제일 많이그린 화가가 렘브란트입니다. 
이유는 ? 역시 고흐와 같은 이유이겠지요.
경제적인 이유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 싶은 마음.....
















#2 땅콩산모 등록시간 2014-05-07 15:52 |이 글쓴이 글만 보기
발레리노 강민우님을 보면 렘브란트 그림에서 쏙 튀어나온 것 같다 느꼈는데... 어떤가요?^^
(여자보다 아름답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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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오우 세상에! 나도 모르게 모니터에 손댈뻔 ㅋㅋㅋㅋㅋㅋ  등록시간 2014-05-07 22:53
그렇군요. 역시 발레리나나 발레리노나 몸매는 아주 멋있네요.타고나야 하는거죠? 제 조카는 어릴때 발레 배우다 체격이 너무 커져서 발레를 포기하고 그림쪽으로 전향했음다.  등록시간 2014-05-07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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