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스트레스에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취하는 반응은 세가지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첫째는 도피입니다.
그런 스트레스가 주어진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둘째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대개 도피를 할 수 없으면 인간은 묵묵히 스트레스를 받아들여 안으로 삭이려고 하게 됩니다.
결국은 무의식에 쌓여 자신에게 공격의 화살을 돌려 자신을 파괴하게 만들지만.
셋째는 공격입니다.
스트레스가 오면 상대방이나 다른 대상을 공격함으로써 스트레스를 잊으려고 하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
그림을 포함한 예술 활동을 단순히 이런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의 한 방법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그림을 그리는 것 등 다양한 창작 행위는 이중 도피에 해당하는 행위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이는 불가능한 일이며 어떤 경험만을 골라서 하거나 어떤 사물의 보고 싶은 면만을 취할 수는 없습니다.
보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고 경험해 보고 싶지 않은 다양한 경험을 겪으면서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그림과 같은 창작의 세계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이런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화가들이나 작가들이 그렇게 피를 말리는 것과 같이 고통스럽고 어렵지만 창작 행위에 몰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고통의 정도가 심할수록 도피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할 수 밖에 없고 당연하게도 많은 작품 혹은 감동을 주는 명작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오랜 기간의 힘든 참선을 겪은 고승의 몸에서 나오는 사리와 같이 예술가의 작품은 그런 고통을 벗어나고자 발버둥친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고통의 강도라는 측면에서 볼 적에 이탈리아의 화가 카라바조도 남부럽지 않을 것입니다.
카라바조는 초기 바로크의 대표적인 화가이며 본명은 미켈란젤로 메리시였지만 조각가 미켈란젤로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태어난 곳인 카라바조를 이름으로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방랑생활을 하다가 37 세에 말라리아에 걸려 요절하게 되는 데 공교롭게도 툴루즈 로트렉이나 빈센트 반 고호가 사망한 나이와 같습니다.
그리고 로트렉과 고흐처럼 카라바조도 인간적으로 매우 불행한 삶을 살다 간 화가 중 하나입니다.
그는 쉽게 격분하여 상대방과 싸우는 일이 잦았다고 하며 17세기의 경찰 기록에 남아있는 그의 범죄 행위는 명예훼손, 상해,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1606 년에는 동료와 테니스 시합을 하다가 살인까지 저지르고 맙니다.
그후 그는 여기저기 도피하면서 매우 험난한 인생을 살다가 인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카라바조의 그림들은 거의 검은 색 배경에 주제가 되는 인물이 부분적으로 강조되어 빛을 받게 묘사된 것이 많습니다.
이렇게 배경을 어둡게 처리하는 특징 때문에 그의 작풍을 일 테네브로소 (암흑의 양식)이라고 부르며 그 이후 그를 추종하여 어두운 색조와 빛의 효과를 따르는 화가들이 생겨 났는 데 이들을 암흑파라고 합니다.
이런 어두운 배경을 택하는 이유는 배경에 있는 것들을 어둡게 하여 가리려고 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배경을 죽여서 주제가 되는 인물이나 정물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그의 본심을 알 수 없어 추측일 뿐이지만 아마도 그가 그림의 배경을 어둡게 한 것은 그는 인생이란 원래 이렇게 어두운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일 지도 모릅니다.
또한 그는 그의 주위의 많은 것들을 그렇게 가려 버리고 잊고 싶은 마음 깊은 곳의 욕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불우한 어린 시절과 인정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세상의 평판과 눈길, 범죄자로서 사람들을 피해 여기저기 쫓겨 다녀야 하는 신세등.
그가 보고 싶지 않고 경험하고 싶지 않은 많은 것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그려졌으며 인물의 인상도 편안하고 행복해 보이는 인상을 하고 있는 것들이 거의 없습니다.
배경을 검게 하여 없애는 것이나 인물을 강조하는 것은 지금은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작법이지만 사물과 인물을 사실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그 당시는 이런 왜곡이 상당한 파격으로 보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는 성서 속의 인물도 많이 그렸지만 그들에게서는 인위적인 장엄함이나 성스러움 같은 것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의 모습에 항상 따라다니는 후광조차도 그려 넣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카라바조에게 제단화를 주문했던 많은 후원자들은 완성작이 너무 천박하다는 이유로 매입을 거절하곤 했다고 합니다.
대신 그는 삶의 진실과 자기 느낌에 충실하였으며 세속적이고 현실감 넘치는 인물을 창조함으로써 사실주의의 새 지평을 열었습니다.
또한 분명한 명암을 사용하여 명암법을 새로이 확립한 화가로도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대상을 적나라하게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과 명암을 통하여 부분을 강조 하거나 혹은 왜곡하는 것이 그가 아웃사이더로써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하게 만든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랬기는 하지만 그런 점으로 하여 나중에 그의 그림을 감상하는 우리와 같은 후세 사람들은 오히려 그의 그림을 통하여 어떤 감동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 그렇게 말하기도 했지만 그의 그림은 진짜와 같다라고 했다는 데 그의 그림에서는 아름답게 치장된 가식이 아니라 솔직한 인간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지만 솔직한 모습을 보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을 받게 하는 작용이 있습니다.
그것이 비록 아름다운 모습이나 바람직한 모습이 아닐지라도......
아래 그림은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라는 그림으로 그의 자화상이라고 알려진 그림입니다.
그 당시는 거울이 보편화된 시기가 아니어서 그랬겠지만 화가들이 자화상을 그린 것이 별로 없었으며 그 점은 카라바조도 마찬가지여서 한 두점 정도인가 밖에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원래도 화가의 자화상은 단순히 화가의 모습이 아니라 화가의 내면의 심리를 보여 준다고 하는데 고흐가 귀가 잘린 초상을 그려 내면의 표현을 가감없이 드러내었다고 하지만 카라바조만큼 자신의 모습을 리얼하게 그린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은 그가 자신의 동료 라누치오를 살인하고 도망 다니던 때에 제작된 것이며, 따라서 처참한 모습으로 그려진 골리앗의 모습은 화가 자신의 모습으로 그의 죄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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