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억력이 뛰어 나지 않고,  창의적인 성격도 아니고, 번뜩이는 지혜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공간 감각은 거의 빵점이라 지하철에서 내려 엉뚱한 출구로 나온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ㅠㅠ. 그렇게 타고난 재주가 너무 없어서 어릴 때부터 불만이 많았다. 다만 없는 재주 중에  그저 지구력 혹은 끈기 하나는 남들보다 그리 모자라지 않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으면서 살았다. 학창 시절에 외워도 외워도 외워지지 않는 단어와 공식 앞에서 내가 마음 속에 되뇌인 말도 그런 것이었다. "나는 돌대가X다. (글 심의 규정에 걸릴까봐. )  그러나 돌에는 한번 새기기는 어렵지만 일단 한번 새기면 잘 지워지지 않고 평생 간다." 그런 마음으로 고집스럽게 교과서를 읽고 또 읽고 참고서에 밑줄을 긋고 또 그었다.  

나이가 들면서 많은 것들이 바뀌어서 시력 1.5였던 눈은 돋보기를 껴야 하고 팔뚝의 혈관은 지렁이처럼 두드러지고 몸뚱아리 중에서 그나마 덜 부끄럽던 손은 거칠기 짝이 없어졌다. 그런 육체적인 변화 외에도 정신적으로 온 변화들도 있다. 유일한 장점이었던 끈기, 지구력이 사라진 것이다. 작은 일에도 쉽게 흥분하고 화를 잘 못참는 불같은 성격은 젊을 때나 나이든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데 있었으면 하는 것들은 왜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지금은 책 한권도 다 읽는데 몇날 며칠이 걸릴지 기약을 할 수 없다. 심지어는 읽다 지쳐 앞 부분의 내용을 잊어버려 결국 손에서 내려 놓아야 하는 책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젊은 시절에 읽었던 "마의 산 "과 같은 책처럼 천 페이지 넘어가는 책들은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불과 200여쪽 밖에 안되는 얇은 책조차 그런 일이 부지기수니 문제다. 그런 내가 다행히 며칠 전 산 책  하나는 두번 만에 다 읽어서 그나마 위로가 좀 되었다. 물론 그것은 젊은 날의 내 끈기가 되돌아 왔기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책을 쓴 저자의 힘이다. 그런 힘 덕분에 그 책이 전세계 27개국에서 번역 출간될 수 있었을 것이다.

책의 제목은 "세 갈래 길"이다. 세 여성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불가촉 천민인 달리트로 맨손으로 남의 똥을 치우는 것이 천직인 인도 여자, 몸 안의 귤과 맞서 싸우는 캐나다 로펌  변호사, 망해가는 가발 공장 사장의 딸인 이탈리아 여자.
페미니즘 책이라고 느껴지지는 않지만 읽고 나면 여성들의 처지에 대한 공감이 더 가지기는 한다. 레티샤 콜롱바니라는 프랑스 영화 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가 처음으로 쓴 장편 소설이라고 한다. 처음 쓴 장편 소설이 이 정도라고 기 죽을 것은 없다. 원래 문학이나 예술 작품 중에는 처음 것이 제일 명작인 경우도 적지 않다. 소포모어 징크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ㅎㅎ. 책의 중간 중간마다에는 시인지 산문인지 구분하기 애매한 패이지가 끼워 넣어져 있다. 그 단락 중 맨 마지막 단락의 글에 저자가 이 책을 쓴 동기를 밝혀 놓았다.
"사랑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소망하고,
수없이 쓰러졌다 다시 일어나는,
굽힐지언정 굴복하지 않는 여자들에게 바친다.
그들이 벌이는 전투를 나는 안다.
그들의 눈물과 기쁨을 나도 함께 나눈다.
그들 한사람 한사람이 얼마간 나이기도 하므로."

이런 책은 남자가 썼다면 그리고 남자 역자가 번역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뭐 어떻겠는가?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상대의 입장을 100% 이해하거나 공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 내가 여성의 출산을 돕는 산부인과 의사를 이십여년째 하고 있지만 임신부가 겪는 통증과 불안함을 가슴으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진통 중의 통증이든, 아기를 안을 때의 기쁨이든 그럴 것 같다고 머리로  이해하는 것 이상을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내가 공감력이 매우 낮은 사람이라서기보다는 리처드 도킨스가 지적한 그대로 인간은 태생적으로 이기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타인의 감각 또는 감정을 가슴으로부터 이해하는 것,  직접 피부 세포 하나 하나를 통해 느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완전한  공감은 어렵더라도 어느 정도의 공감은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이 책은  소설적 재미도 있지만 여성 아니 우연히 여성인 것 뿐 여성이라기 보다는 사회적 약자 혹은 소외자들이 겪는 여러움에 한번 주의를 환기시키는 점도 있다.  책의 내용과 짜임새도 상당히 좋다고 느꼈지만 저자가 비유로 드는 문장들이 상당히 참신해서 기억에 남는다. 책의 내용을 다 퍼다 싣는 스포일링은 하지 않을 작정이지만 문장에 대한 설명 때문에  몇가지 스포일링은 어쩔 수 없다. 그런 것이 싫은 분은 지금 이하 문장에는 눈을 감고 홈페이지 창을 닫기 바란다.  아직도 창을 닫지 않은 분들을 위해 특별히 더 내 마음에 들었던 몇 문장을 간단한 부연 설명과 함께 아래에 옮겨 본다.

"자전거가 아니라 자기 영혼이  전복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차마 말하지 못했다."--카말을 만나 설레고 살짝 흥분된 마음으로 공방으로 돌아온 줄리아가 공방의 직원인 노나에게 자전거 타이어가 구멍이 나서 늦었다고 거짓말을 할 때.

"귤은 암호명 K로 부르기로 하자. 지금부터 나는 귤과 사라 코헨의 소송 사건에 뛰어 들어 사라 코헨의 편에 선다. 비열한 방법도 서슴지 않을 것이다. K는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사라 코헨이 유방암을 진단받고 자신에게 마음 속으로 한 다짐. 참고로 유방암 종괴가 귤만한 정도면 이미 초기 단계는 지나서 3기 정도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완치율도 그만큼 낮고 치료 과정도 힘들다.

"옥에 갖힌 자에게 도망치려면 간수의 허가를 받으라고 하는 셈이 아닌가"--카스트 제도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힌두교를 버리고 타 종교로 개종하려는 천민들이 개종하지 못하도록 인도 정부가 만든 반개종법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스미타가 하는 생각.

그래도 역시 제일 마음에 드는 문장은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나오는 다음 문장이다.
"한 생명을 구하는 자가 온세상을 구한다." --탈무드의 한 구절이라고 하며 사라가 앞으로 놓인 험난한 여정에 당당히 맞서기로 하면서 마음 속으로 품는 생각.

분만 산부인과 의사는  외과 의사처럼 악성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여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것도 아니고, 뇌출혈로 생사가 경각에 달린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산부인과 의사가 온세상을 구할 일은 없다. 그래도  한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 함께 동참할 수는 있으니 그리 무의미한 직업은 아니다. 다만 그 댓가로 작은 아주 작은 (^^) 몇가지는 감수해야 한다. 때때로 달콤한 숙면을 중간에 접고 한밤중에 출근해야 한다던가, 볼일을 보다 말고 중간에 끊고 뛰어 나와야 한다든가, 사자 가슴으로 태어난 사람이라도 전화 벨소리에 깜짝 깜짝 놀라는 토끼 가슴으로 바뀐 채 살아야 한다든가, 의료계에는 두가지 부류의 직업이 있는데  하나는 의사이고 다른 하나는 산부인과 의사라는 비아냥 정도는 들어야 한다. 그리고 "어머 남자 의사네 !!" 하면서 황급히 진료를 취소하고 병원을 나가는 환자를 보면서 남자로 태어난 것을 후회하는 순간들도 간혹 만나는 덤 하나까지. ㅎㅎ (이건 남자 산부인과 의사에게만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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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omooni [2018-02-13 23:32]  hanalakoo [2018-01-23 15:58]  satieeun [2018-01-20 20:13]  daphne [2018-01-19 22:21]  podragon [2018-01-19 16:49]  동민 [2018-01-19 00:22]  
#2 동민 등록시간 2018-01-20 22:09 |이 글쓴이 글만 보기
이 책 마침 도서관에 있어서 빌려오려다가 말았는데. 얇아서 금방 읽을것 같았지만 우선 봐야할게 밀려 있어서요. ㅠㅠ 나중에 볼께요~

댓글

옷. 반전이 있다고요? 대강 넘겨보고 내용 고구마 일까봐 잠시 미뤘는데..빠른시일내 봐야겠군요^^  등록시간 2018-01-21 01:22
한번 손에 잡으면 금방 읽으시게 될 것입니다. 끝 부분의 반전이랄까 약간의 서스펜스가 있습니다. 잘 짜여진 소설입니다. ^^  등록시간 2018-01-21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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