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어느 신문사 기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요즘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병실과 분만실 등 병원 내부 투어를 한다고 대대적으로 홍보 하는 산부인과들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 의견을 묻는 전화였다. 일반인들이 병원 시설을 견학하다가 진통 중인 산모가 있는 분만실에도 불쑥 들어 가게 되어 산모가 깜짝 놀라는 사태도 생겼다고 한다. 내 의견을 간단히 말해 주었는데 기사가 나갔는지 어땠는지는 확인해 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그때 내가 기자에게 전화로 두서없이 말해 주었던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가. 산전 진찰을 다니는 산모와 가족들에게 병원의 내부와 시설을 둘러 볼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은 병원이나 의료에 관한 정보가 부족한 현실에서 그리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불특정 다수인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홍보의 차원에서 병원의 시설을 공개하는 것은 불법 행위에 속한다. 의료는 현재 영리 행위로 규정되어 있지 않아 아주 제한적으로만 광고를 하게 되어 있으며 전단지를 나누어 주는 것이나 시설이나 장비를 홍보하는 것, 의사의 경력이나 학력을 대외적으로든 홈페이지를 통해서든 광고하는 것 등이 모두 금지되어 있다. 말씀하신 사례처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홍보 행위는 의료법 위반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나. 그런 식의 홍보를 할 수 있는 것은 시설이 잘된 대형 병원들이다. 규모가 작은 동네 의원들은 시설이 아주 고급스럽거나 화려하지 않으며 홍보를 담당할 전문 인력도 없다. 따라서 소규모 의원들은 설사 합법이 되어 가능한 때가 오더라도 그렇게 홍보를 할 수가 없다. 의료 전달 체계도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고 보험 급여로 대부분 진료비를 낼 수 있는 상황이라 비용의 측면에서도 대형 병원과 동네 의원 간에 차이가 많이 줄었다. 이런 이유로 이미 점점 동네 의원의 경쟁력은 떨어지고 있다. 대학 병원 혹은 대형 병원과 소규모 의원 간의 의료 양극화가 더 악화될 위험이 있어 그런 행위는 바람직하지 않다.
다. 내부 시설과 장비도 아예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의료에 있어 더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다. 즉 산부인과의 경우 제왕절개를 피하고 자연분만을 돕고자 노력하는지, 의사의 편의를 위해 필요없는 유도분만을 하지는 않는지, 불법의 낙태 수술은 하지 않는지, 성실한 진료를 하는지, 과잉의 검사나 치료를 자제 하는지 여부가 중요하다. 사람의 경우 외모 지상 주의는 바람직하지 않으며 인품을 다듬는 것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처럼 분만실 견학과 같은 외부 홍보에 시간과 인력을 투자하는 것보다는 의사들이 의료의 본질적인 서비스에 좀더 관심을 두고 노력하기를 바란다.
이상이 기자에게 내가 말했던 부분이다. 그런 긴 내용을 기사에 담았을리는 없고 아마 기사로 다루어지지도 않았을 가능성이 높지만 의사들이 의사의 본래의 모습과 역할에 충실하지 않고 좀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장사꾼처럼 머리만 굴리는 사람이 된 것 같아 서글펐다.
나는 문구점이나 서점에 나들이 가는 것을 좋아한다. 가서 꼭 사야 할 책이나 문구가 있는 것이 아니라도 책이며 문구를 구경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학창 시절에는 취미란에 독서라고 적었는데 지금 와 생각해 보니 내 취미는 독서가 아니었다. 책 구경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독서와 책 구경은 책이라는 대상은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전혀 다르다. 독서는 책의 내용을 읽는 것이지만 책 구경은 책의 내용보다는 책의 표지와 디자인, 책의 크기, 심지어는 종이질 등 그저 책 그 자체를 보는 것이다. 독서가 책이라는 것의 소프트웨어를 보는 것이라면 책 구경은 책의 하드웨어를 보는 것이다. 덕분에 책을 구입하는데 든 돈이 적지 않았다. 문구점에 놀러 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펜이나 연필을 사서 글을 쓰려는 목적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목적보다는 필기구의 디자인과 글씨의 색깔, 굵기, 점도 등 그런 것들이 궁금했다. 역시 펜의 본래의 목적보다는 펜이 주는 느낌을 즐긴다고 하는 편이 적당하다.
오늘 마을 버스를 타고 아내와 망원 시장에 갔다. 내가 서점과 문구점 구경을 좋아하는 것처럼 아내는 시장을 좋아한다. 시장 중에서도 재래 시장을 좋아한다. 딱히 시장 볼 거리가 있어서 간 것은 아니었고 산모의 식사를 준비하고 남는 자투리 시간 동안 무료함을 달래고자 간 것이었지만 가서는 나물과 채소 등 찬거리를 잔뜩 사고 말았다. 그러나 충동 구매라고 아내에게 잔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내가 문구점에 들러 생각지도 않던 필기구를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안다. 다만 어느 정도 자제력이 발휘되기를 바랄 뿐이다. 돈 계산은 아내의 몫이지만 무거운 짐은 나의 몫이니까. ㅠㅠ. 책을 좋아하는 내가 읽지도 않는 책으로 서가를 꽉 채우는 것처럼 아내의 시장 사랑은 냉장고를 꽉 채운다. 지금은 떨어져 사는 탓에 냉장고를 들여다 볼 일이 없지만 전에 냉장고를 들여다 보면 유통 기한이 지난 음식들이 숨박꼭질하듯 안쪽 깊숙이 빼곡이 숨어 있었다. 그렇게 걸린 애들은 냉장고 밖으로 퇴출되어야 하는데 아내는 자기 살림이라고 손도 못 대게 한다. 치워도 자기가 치운다고 성을 낸다. 그 마음도 나는 안다. 내가 오래전에 사서는 읽지 않는 책, 대학 시절의 노트조차 버리지 않고 집안 구석 구석 쌓아두었을 때 버리라고 하는 아내에게 내가 한 말이었으니까. 그것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낭비를 인정하는 것이 된다. 더군다나 그것을 남에게 지적 받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다행히 아내는 요즘 미니멀리즘에 빠졌다. 그래서 내가 뭐라 하지 않아도 알아서 버린다. 멕시멀리즘 (방금 내가 만든 말이다. 미니멀리즘의 반대로 능력이 닿는 한 많이 사다 모으는 것을 의미한다. ^^)에 빠지는 것보다 여러모로 다행이다. 다 큰 아들이 온갖 쓰잘데기 없는 만화책으로 사방 벽을 도배하고, 학업에 열중해야 할 막내 딸이 쓰잘데기 없는 온갖 상자들로 방을 잔뜩 채우는 꼴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시장 천장에 보니 축구장 32개 크기의 대형 롯데 쇼핑몰이 상암동에 들어 오는 것을 반대한다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시장 상인들은 생존권이 걸린 문제라 결사 반대한다는데 약하기 짝이 없는 시장 상인회의 힘으로 대형 쇼핑 센터가 들어오는 것을 막기는 어려울 것이다. 동네의 작은 가게와 재래 시장이 사라지고 24시간 편의점과 대형 쇼핑센터가 들어오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변화처럼 보인다. 나아가 소형이든 대형이든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는 사람들보다 인터넷으로 물건을 사는 사람이 더 많아지고도 있다. 일부 개성있는 동네 서점이 조금씩 생겨나고는 있다고 하지만 동네 서점도 거의 전멸 상태다. 대형 서점 몇 곳만이 서점 시장을 차지하고 있다. 내가 있는 이 동네만 해도 교보문고와 영풍문고, 알라딘과 예스24 등 대형 4대 서점이 모두 들어 오면서 오래전부터 있던 동남문고는 2,3 년전에 문을 닫았다. 종이책도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이미 많은 출판사들이 쓰러지고 대신 네이버나 다음과 같은 거대 포탈과 유튜브나 넷플릭스 같은 영상 제공 업체들이 나날이 세력을 키워 가고 있다. 노트에 글을 쓰는 사람이나 편지를 쓰는 사람보다는 스마트폰에서 글을 쓰거나 이메일을 보내는 사람이 대다수가 된 것도 이미 한참 된 일이다. 시대는 소형에서 대형으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화하고 있다. 지금 내가 운영하는 동네 산부인과도 운영이 쉽지 않으며 의사 한두명이서 분만을 담당하는 소규모 병원도 그리 오래지 않아 모두 사라질 것 같다. 병원이든 시장이든 서점이든 소형 업체가 대형 업체를 이기기는 어렵다. 가격이나 규모에서 경쟁이 되지 않는다. 유일하게 소형이 대형보다 앞설 수 있는 것은 질 밖에는 없는데 이제는 질보다 양이, 내용보다는 껍데기가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맛있는 대구 사과는 맛 없지만 색깔이 이쁜 후지 사과에게 졌다. 혹시 이런 추세에 예외가 있는지 궁금하기는 하다. 앞으로 소규모 동네 책방의 미래는 어떤지도 궁금하다. 망원동인가 상수동 어디쯤 있다는 김소영 아나운서가 차렸다는 서점도 궁금하다. 그런 유명인이 하는 곳이야 당연히 사라질 위험이 거의 없겠지만.
나는 서점을 좋아 하고 아내는 재래 시장을 좋아한다. 그리고 나는 동네 산부인과를 운영하고 있다. 과연 언제까지 이것이 가능할까?
맨 위 영상은 오늘 간 망원 시장의 모습이다. 아래 사진은 내가 좋아하는 철판 구이 감자를 찍은 것인데 값은 한 컵에 2천원으로 역시 망원 시장답게 저렴했다. 아내도 앞으로는 망원 시장을 자주 이용할 생각인 듯 하다. 가까이 현대 백화점도 있고 농협 하나로 마트도 있지만 아내는 망원 시장이 더 마음에 드는 눈치다. 철판 구이 감자는 십여년 전쯤 강원도로 놀러 가면서 한계령에서 먹고는 처음인데 알이 굵어서인지 맛은 그저 그랬다. 아니면 아내의 눈치를 보느라 내가 좋아하는 설탕을 충분히 못 뿌린 탓일지도...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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