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읽은 "의학의 법칙들"이라는 책 덕분에 의학이란 것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이 책은 싯다르타 무케르지라는 의사가 썼다. 저자는 내과 의사이자 종양학을 다루는 전문의다. 책은 총 109 페이지에 불과하다.
이 책은  "의학의 법칙들"이라는 그 제목 때문에 내 손에 잡혀 집에까지 끌려왔다. 그러나 내 집에까지 끌려온 책이라고 해서 모두 끝까지 읽히는 영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제목의 강렬함과 두께의 경박함으로 하여 아주 드문 목록에 들어갔다. 그 목록이란 내가 추천하는 인생책 50권 뭐 그런 것은 아니다. 단지 공백기 없이  며칠 만에 읽힌 책들의 목록일 뿐이다.


의학에 법칙이라는 것이 있냐고 누가 묻는다면 30여년의 의사 생활 동안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답을 모른다고 대답할 것이다. 책의 저자는 2001년에 내과 레지던트를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1987년에 산부인과 레지던트 생활을 한 나보다 오히려 의사 경력이 짧은데도 불구하고 상당한 지혜와 경험을 가진 의사임이 분명하다. 이런 책도 내고 TED 무대에서 감동적인 연설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역시 책의 내용을 보니 내 예상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다.  다음 문장은 서문 쯤에 해당하는 문장이다.
[의학이란 분야가 이렇게 원칙도 없이 불확실하리라고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설소대, 중이염, 해당 반응 등 신체 부위와 질병과 화학 반응의 명칭을 달달 외우는 것도 알고 보면 의사들이 광대한 지식 영역을 대부분 알지 못한다는 사실로부터 스스로 방어하기 위해 개발한 장치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사실이 너무 많으면 보다 깊고 중요한 문제가 가려진다. 지식과 임상적 지혜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 이러한 두가지 영역을 조화롭게 통합하는 길을 찾고자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이 책에서 '의학의 법칙'이란 그야말로 불확실성, 부정확성, 불완전성의 법칙들이다.]

의사가 아닌 일반 사람들은 의학이 그렇게 불확실하고 불완전하고 오류 투성이라고 하면 의아해하고 불안해 하겠지만 의학 분야에 오래 몸담은 사람이면 사람일수록 그런 점을 절절히 느낀다. 의학을 수행하는 의사가 완벽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토록 오랜 기간의 학습과 수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최선을 다함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수많은 오진과 악결과로 하여 의료 분쟁이 발생한다. 어떤 분야에서 10년을 열심히 노력하면 혹은 만 시간을 투자하면 달인의 경지에 다다른다고 한다. 그러나 의학에서는 10년이 아니라 20년 혹은 30년 이상을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했다고 해도 달인은 될 수가 없다. 명의니 뭐니 하는 것은 그저 경험이 조금 많은 의사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그 이유는 의학이 과학이나 수학과 같은 종류의 학문 영역에 있기보다 경험의 기록인 역사나 혹은 영감과 감성의 영역인 예술에 가깝기 때문이다. 역사 학자 중에 달인은 없다. 모짜르트도 피아노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쳐서 유명해진 것이 아니다.  

이렇게 의학을 예술의 영역에 놓았다고 해서 의학을 조롱한 것도 아니고 예술을 확대 해석한 것도 아니다. 원래부터도 의학은 예술과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의학은 주술에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주술사는 과학자적인 측면도 있고 천문학자적인 능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난 예술가였다. 주술 행위에 동반된 노래와 춤, 그림이 지금의 예술의 기원인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음악 치료나 미술 치료는 지금도 그 역할이 적지 않다.
Obstetrics is art and science combined.
이 문장은  모든 산부인과 의사들이 배우는 산과학 교과서인 "윌리암스 옵스테트릭스"라는 책에 나오는 첫 문장이다. 말 그대로 산과학은 예술과 과학의 복합이라는 뜻인데 이는 꼭 산과학만 그런 것은 아니다.  모든 의학 분야가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과학인 science보다 예술이 더 앞에 나왔다. 더 중요하다는 의미라고 나는 생각한다.

의학의 불확실성에 대한 강조가 의료 분쟁에 대한 면피를 위한 사전 포석이나 변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사실 의료 분쟁의 경우 그런 주장은 오히려 환자 가족들의 감정만 더 악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그렇게 밖에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팩트 체크라고 하는 말처럼 그것이 팩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의학 혹은 의술의 존재 의미를 과소 평가할 필요는 없다. 음악과 미술이 아직 그 힘을 잃지 않고 오히려 갈수록 더 강력한 힘을 가지는 것처럼 어떤 것의 존재 의미가 수학처럼 모든 경우에 항상 일정한 답을 분명하게 보여 주어야 생기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음악이 이 사람에게는 감명적이지만 저 사람에게는 소음에 불과하다고 해서 그 음악이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같은 치료 방법이라도 효과를 보는 환자가 있고 그렇지 못한 환자도 있다.
[의학은 머리 위에 불확실성이 드리워진 채 지식을 다루는 학문이다. 소독용 알콜과 표백제 냄새를 걷어 내고 등받이가 조절되는 침대와 병동 표지판과 반짝이는 대리석이 깔린 병원 로비를 지워버리고 파란색 면 가운을 입은 환자가 병실에서 견뎌야 하는 수 많은 신체적 수모와 그를 낫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의사의 모습을 잠깐 한편에 밀어 놓고 나면, 아직도 순수한 지식과 현실 속의 지식을 조화시키는 법을 배우느라 애쓰는 학문의 모습이 드러난다.  가장 젊은 과학은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과학이기도 하다. 실로 의학은 인간의 일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섬세한 것이다.]
위는 '의학의 법칙들'의 마지막 문장이다.

확실히 의학은 불확실한 학문이고 의사는 그런 학문을 대단한 종교처럼 떠받드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런 점 때문에 의학이 대단한 학문이고 그런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존경까지는 몰라도 인정해 줄 필요는 있다. 어떤 위험이 중간에 놓여 있는지 그 끝은 과연 어떤 것인지도 모르면서 함께 길을 나서주는 사람이 든 희미한 초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든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그건 중요하지 않다. 물론 옆의 가이드가 든 초가 밝아서 위험을 좀더 분명하게 미리 알려주고 대비할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 세월이 가면서 그 빛이 더 밝아지고 더 멀리 비추기는 하겠지만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듯이 그  빛은 아픈 이들이, 더 건강해지고자 하는 이들이 기대하는 것만큼 충분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함께 떠나 준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의학은 그런 학문이고 의사는 그런 사람들이다. 물론 그 댓가는 돈이기도 하고 명예이기도 하고, 때로 존경이기도 하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종교가들이 한 말이나 성경 혹은 불경의 구절은 좋아하는 것이 많다. 인생의 지혜를 주기 때문이다. 카톨릭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가 한 말 "알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며 알기 위해서는 먼저 믿어야 한다."는 말을 좋아한다.  나는 그걸 낫기 위해 믿으라는 말로 바꾸어서 들려주고 싶다. 나을 것이 확실하니까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의사의 조언을 따르므로 나아지는 것이다. 결국은 의학은 과학이면서 예술이고 동시에 종교이기도 하다. 영화가 종합 예술이라고 하듯 의학도 종합 학문이다. 영화는 참여하는 사람이 각종 직능의 사람이라 종합 예술이라고 하지만 의학은 그 역할이 종합적이라 종합 학문이다. 물론 그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믿음이고 그 다음이 예술적 기여이고 마지막이 과학이다.  그래서 내가 산부인과 교과서를 쓰는 불상사는 없겠지만 쓴다면 나는 그렇게 쓰겠다.
Obstretrics is religion, art and science combined.

[사족]
지난 토요일 첫회로 시작한 저희 병원의 [임산부 요가 교실]에 참여한 산모분들께 체조가 끝나고 분만실을  보여드리면서 제가 잠깐 보탠 말도 같은 맥락의 말이었습니다.
"저희 병원에서 제가 출산을 도운 분들은 거의 대부분 자연 분만을 하셨습니다. 수술하신 분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 오신 여러분들도 당연히 자연 분만을 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분만실에서 힘주기 하면서 보내는 힘든 시간을 조금 줄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의지나 마음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며 육체적 노력에도 달려 있습니다. 그 노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러니 [제 말을 믿고] 열심히 순산 체조를 하고 호흡법을 익히십시요."

여기서 빨간 표시한 부분은 제 마음 속으로만 한 말입니다. ^^

댓글

저도 손윗동서와 진오비 요가교실 이야길했습니다. 우리때도 생겼더라면 엄청 편했을 건데말이야 하고요. 배뭉침있는데 한번 더.. 하며 흔들리는 문센버스를 탔던 제가 미련한엄마였어요 ㅜㅜ 아아 진오비는 도보가  등록시간 2019-06-04 23:08
의학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고 완전할 것 같았는데... 예술, 종교에 가깝다니! 그나저나 임산부 요가도 생겼군요. 얼른 둘째를 임신해야겠... ㅎㅎㅎ  등록시간 2019-06-04 17:33

이 글에 좋아요를 표시한 회원

zoomooni [2019-09-08 03:28]  happybud19 [2019-06-04 23:06]  podragon [2019-06-04 21:04]  hanalakoo [2019-06-04 17:31]  순산♡ [2019-06-04 00:43]  daphne [2019-06-03 06:35]  

스마트폰 모드|진오비 산부인과

© 2005-2024 gynob clinic

빠른 답글 맨위로 목록으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