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무제 (빨강)
작가: 마크 로스코
소장: 미국 민속 미술관  

스타일이 좋다는 말을 젊은이들이 많이 쓰는데 이 말은 사실 문학 작품을 평가할 때 종종 쓰는 말이다. 우리말로는 문체라고 하는데 각 작가마다 가진 고유한 표현 양식을 말한다. 화가에게도 이런 것이 있다. 회오리치는 듯한 터치를 보면  고흐의 작품이고 목이 길고 눈동자가 없는 여성을 그린 그림이라면 모딜리아니의 작품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현대 회화로 넘어오면 이런 경향이 더 두드러진다. 칸딘스키나 잭슨 폴록 등 현대 회화의 화가들이 거의 그렇다.  추상 회화는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개성 있는 스타일로 작가를 알아내기 쉽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미국 뉴욕에서 활동한 마크 로스코의 그림도 시기별로 다르기는 하지만 그의 그림만이 가진 특징은 어느 누구보다 뚜렷하다. 그의 그림은 형태랄 것이 없다. 흔히 색면 추상의 그림이라고도 말하는데 이런 식의 그림은 누구나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다. 그럼에도 미술관에서 그의 그림을 바라보다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종종 있다고 하니 그림에서 형태가 생각만큼 중요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나는 2006년 리움 갤러리에 놀라 갔다가 우연히 그의 진품 그림을 몇 점 보게 되었다. 그해에 마침 마크 로스코 회고전이 그 미술관에서 열렸다. 그 당시는  잘 모르는 화가였고 당시 내가 보기에는 그림이 좀 섬뜩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크 로스코는 추상표현주의의 선구자로 불리며 그림 값이 비싼 화가로도 유명하다. 보통 사람 키 정도 되는 커다란 캔버스에 모호한 색면과 불분명한 경계선을 표현하는 작품을 많이 남겼다. 이전 글에서도 말했지만 르동이나 피카소 등 많은 화가들이 생애에 걸쳐 화풍의 변화가 있는 경우가 많다. 로스코의 경우도 1950년대 중반 이전에 그려진 작품들은 밝은 빨강이나 노랑 같은 색채가 주였다가 이후에는 진한 빨간색, 군청색, 갈색, 검정 같은 어두운 색상이 주가 되었다.

그의 작품을 보면 피가 생각나는 그림이 많다. 피는 의학의 거의 전 분야에 관련이 되어 있지만 특히 산부인과와 관련이 깊다. 피는 우리 몸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생명과 관련된 성분이다. 빨간색을 보면 공포감을 느끼는 것도 피의 색이 빨간색이기 때문이다. 정상 성인의 총 혈액량은 약 4~ 6L로서 체중의 6~8%에 해당한다. 여성의 생리처럼 많지 않은 양이 서서히 나오는 것이야 생명에 위협이 되지 않지만 비교적 많은 출혈이 갑작스럽게 발생하면 매우 위험하다. 이때 실혈 양도 중요하지만 실혈 되는 속도가 특히 중요하다. 출혈량이 500cc 정도로 많지 않은 경우에는 15 분 내의 급격한 출혈도 신체에 큰 변화를 초래하지는 않지만 1000cc 정도의 출혈이 15 분 내에 발생하면  맥박이 빨리지고 저혈압이 나타나면서 오심이나 무력감 등 여러 신체 증상이 나타난다. 2000cc를 넘는 출혈이 15 분 내에 발생하면 대부분 저혈압성 쇼크로 사망에 이른다. 그러나 이런 많은 출혈도 24 시간 이상에 걸쳐 서서히 나타나면 사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심지어는 총 혈액량의 반 밖에 남지 않은 경우에도 개인의 건강에 따라 다소 영향이 있을 뿐 사망하지 않는다. 진료 현장에서 보면 정상 혈색소 수치인 12 내지 13 정도의 반 정도밖에 안 되는 산모들도 아무런 증상 없이 정상 활동을 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물론 이렇게 여유가 없는 빈혈 상태에서는 양이 적더라도 출혈이 동반되면 매우 위험하다.

대학병원에서 인턴 수련할 때 만난 외과의 어느 교수님은 RBC 잡는 교수라는 별명이 있었다. RBC는 혈액을 구성하는 주요 성분의 하나로 적혈구를 말한다.  그러니까 그 별명은 수술 후 출혈이 되는 혈관의 지혈을 적혈구까지 잡아낼 정도로 철저히 한다는 의미에서 붙은 것이다. 그 교수님의 전공 분야는 갑상선 외과였다. 갑상선 절제 수술은 외과 영역의 다른 수술 즉 췌장이나 십이지장 종양 제거 수술 등에 비하여 그리 복잡하거나 어려운 수술은 아니다. 갑상선은 목 중앙부의  피부 바로 밑에 있기 때문에 절개 과정도 간단하고 제거 수술에 걸리는 시간도 적다. 그럼에도 적혈구까지 잡아가면서 지혈을 하는 이유는 수술 후 간혹 생기는 혈종 때문이다. 혈종이란 지혈이 충분히 안되어 수술이 끝난 후 수술 부위에 피 덩어리가 고이는 현상이다. 다른 부위의 혈종은 아주 크거나 계속해서 커지는 혈종만 아니라면 그리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흡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갑상선 절제 수술 후 혈종이 생기면 비록 크기가 크지 않더라도 바로 뒤에 있는 기관지가 압박되어 호흡 곤란이 초래될 수 있다. 호흡 곤란은 얼마나 빨리 대응 조치를 취했으냐에 따라 달라지지만 지체되면 사망으로 연결될 수 있는 응급 상황이다. 그래서 갑상선 수술 후의 지혈은 다른 경우의 수술보다 철저한 지혈이 필요하다. 그 교수님은 워낙 지혈을 철저하게 하는 탓에 제거 수술에 걸리는 시간보다 지혈에 걸리는 시간이 길었다. 그런 이유로 교수님의 수술을 보조하는 전공의들이 답답한 마음에 그런 별명을 붙였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철저함은 의사로서 당연한 일이었고 제자로서 배워야 할 점이었다. 다행히 나는 산부인과 의사라서 그렇게까지 철저히 지혈을 하는 수고는 겪지 않아도 된다. 산부인과 의사는 워낙 피를 자주 그리고 많이 보다 보니 피에 대하여는 어느 정도 무덤덤해지는 경향이 있다. 똥이 더럽다고 느껴지면 외과 의사를 그만둘 때가 된 것이고 피가 무서워지면 산부인과 의사를 그만둘 때가 된  것이라는 말이 있다. 외과 의사는 주로 장을 다루니 똥과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고 산부인과 의사는 정상적인 출산 과정에서도 출혈이 많이 나는 상황을 자주 보다 보니 생긴  말이다.

"내 그림 앞에서 우는 사람들은 내가 그 그림을 그릴 때 겪은 것과 똑같은 종교적 경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들을 표현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비극이나 무아경, 파멸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내 그림 앞에 설 때 힘없이 무너지고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은, 내가 그 기본적인 감정들을 전달했다는 것을 입증해 줍니다."

"관람자와 내 작품 사이에 어떤 것도 놓여서는 안 됩니다. 작품에 어떤 설명을 달아서도 안 됩니다.
그것이야말로 보는 이의 정신을 마비시킬 뿐입니다. 내 작품 앞에서 해야 할 일은 단지 침묵입니다.
나는 내 작품을 변호할 의도가 없습니다. 내 작품은 스스로를 방어하고 있습니다."

마크 로스코가 자신의 작품에 대하여 한 말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무제라고 붙은 것들이 많다. 이 그림의 제목도 무제 (빨강)이다.  그가 죽기 전날 그린 그림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는 잘 나가는 보석 디자이너인 첫 번째 아내로부터 구박과 멸시를 많이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이혼하고 다시 결혼한 두 번째 아내와도  1969년에  헤어졌다. 그 후 그는 뉴욕의 작업실에서 혼자 살면서 숙식과 작업을 함께 해결했다고 한다. 당시 그가 했다는 말을 보면 그의 마음 상태가 얼마나 처연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잘 될 리가 없다니까. 계속 생각해 왔던 건데 내가 두 사람 인생에서 빠져 주는 편이 나아."
그는 자존감이 낮아서 동료나 후배 화가들의 조언에 대하여 그리고 비평가들의 비평에 대하여 아주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외로움과 자책으로 인한 우울증에 시달리면서 항우울제를 장기간 복용했다. 죽기 2년 전 매우 위험한 병인 대동맥 박리증이 발생해서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은 의사가 말렸다고 한다. 아내와 헤어지고 1년 후인 1970년 2월 그는 작업실에서 손목을 칼로 그어 자살했다. 사인은 동맥 절단에 의한 과다 출혈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도 살면서 죽을뻔한 적이 몇 번 있다. 어릴 때 편도선염이 심해 고열에 시달린 적이 있다. 의식도 잃어서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흔히 하는 말로 임사 체험 비슷한 것도 했을 정도다. 다행히 편도선을 쩨어 고름을 짜내고 열이 떨어져서 죽지는 않았다. 대학교 1학년 때 대성리에 친구와 함께 놀러 갔다가 물에 빠져 죽을뻔한 적도 있다. 그리 깊은 강이 아니었는데 모래를 파낸 웅덩이가 군데군데 있었던 탓에 갑자기 몸이 쑥 빠져서 물을 먹고 허우적거리면서 탈진해 죽기 직전 함께 간 친구가 등을 떠밀어 주어서 살아났다.  그것 말고는 딱히 죽을 뻔한 기억은 없다. 다만 분만의사로 살면서 너무 한꺼번에 출산이 몰려 일이 힘들 때면 이러다 과로사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경우는 간혹 있다. 그래서 진담 반 농담 반 삼아 직원들에게 말해 둔다. 나는 지금 근무하는 병원이 직장이자 집이다. 365일 매일 밤에는 3층 숙직실에서 자고 아침이 되면 4층의 외래 진료실로 출근한다. 그리고 아주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비록 1분 거리의 출근 시간이지만 지각을 하는 적은 없다. 그래서 만일 내가 외래 진료시간이 되어도 아무 연락도 없이 숙직실에서 나오지 않으면 절대 혼자서 문을 열지 말고 다른 사람하고 같이 문을 열라고 말이다. 혹시 과로사로 죽어 있는 모습을 혼자서 보면 너무 놀라 충격을 받을까 봐 함께 문을 열라고 말해 두고는 한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 직원들은 끔찍한 농담은 하지 말라고 하는데 복싱 선수가 링위에서 쓰러지는 것이 제일 행복한 일인 것처럼 의사가 진료하다 과로사로 죽는다면 그리 나쁜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언젠가 죽는데 자기가 좋은 하는 일을 하다 죽는다면 행복한 일이다. 물론 내게 산부인과 의사는 아주 좋아서 하는 일은 아니지만 천직에 매진하다 죽는 것이 할 일도 없이 방구석이나 병상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것보다 못한 것도 아닐 것이다.

"채식주의자"라는 소설로 유명한 한강 작가의 작품을 몇 편 읽어 보았다. 나도 한때는 소설가가 꿈인 적도 있었는데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서 역시 나는 소설가가 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가 되었다면 벌써 굶어 죽었을 것이 틀림없다. 의사는 누구나 국가에서 발급한 의사 면허증이 있다. 면허증은 그것을 가진 사람만이 행할 수 있는 독점적 권한을 가진 증서다. 따라서 의사 면허증이 없는 사람은 어떤 의료 행위도 할 수 없다.  운전 면허증도 마찬가지다. 운전면허 시험을 통과하여 운전 면허증을 가진 사람만이 운전을 할 수 있고 운전 면허증이 없는 사람은 운전을 할 수 없다. 반면 자격증은 면허증처럼 독점적  권한을 가진 증서가 아니다.  어떤 행위에 대하여 일정한 자격 요건을 갖추고 시험을 통과하여 좀 더 잘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공인 혹은 비공인 단체에서 부여한 증서가 자격증이다. 독점적 권한이 아니기 때문에 자격증이 없다고 해서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산부인과든 내과든 성형외과든 각종 전문의는 모두 자격증이다. 국가가 아니라 해당 의사 단체에서 일정 기간의 전문의 과정을 수료하고 자격시험을 통과한 사람에게 부여한다. 따라서  산부인과 전문의 자격증은 그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부인과 진료를 하고 출산을 돕는 역할에서 잘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해 준 것이고 성형외과 전문의 자격증은 그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성형외과 진료와 수술을 하는 역할에서 잘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산부인과 전문의라도 성형외과 진료를 할 수 없는 건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 개원가에서 성형외과 진료를 하는 의사 중 많은 사람이 성형외과 전문의가 아니다. 참고로 변호사도 자격증이다. 따라서 변호사 자격증이 없는 사람도 변호를 할 수 있다. 다만 변호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변호를 잘한다고 단체에서 인정해 준 것뿐이다.
그러나 소설가는 다르다. 소설을 쓰는 데 있어서 면허증이나 자격증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등단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다른 동료들의 인정을 받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있지만 그것이 없다고 해서 소설을 쓰지 못하거나 책을 출간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한마디로 문턱이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경쟁하는 치열한 투쟁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문턱이 높아 의사 면허증이 있는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좁은 시장에서도 제대로 된 경영을 못하는 처지에 무한 경쟁인 문학 영역에서 재미있는 소설로 독자들의 선택을 받는다는 것은 내게 있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아래는 한강 작가가 소설을 쓰기 전에 쓴 시를 담은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 실린 시다.  제목은 "마크 로스코와 나--2월의 죽음"이다.

미리 밝혀둘 것도 없이
마크 로스코와 나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는 1903년 9월 25일에 태어나
1970년 2월 25일에 죽었고
나는 1970년 11월 27일에 태어나
아직 살아 있다
그의 죽음과 내 출생 사이에 그어진
9개월여의 시간을
다만
가끔 생각한다

작업실에 딸린 부엌에서
그가 양쪽 손목을 칼로 긋던 새벽
의 며칠 안팎에
내 부모는 몸을 섞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점 생명이
따뜻한 자궁에 맺혔을 것이다
늦겨울 뉴욕의 묘지에서
그의 몸이 아직 썩지 않았을 때

신기한 일이 아니라
쓸쓸한 일

나는 아직 심장도 뛰지 않는
점 하나로
언어를 모르고
빛도 모르고
눈물도 모르며
연붉은 자궁 속에
맺혀 있었을 것이다

죽음과 생명 사이
벌어진 틈 같은 2월이
버티고
버텨 마침내 아물어갈 무렵

반 녹아 더 차가운 흙 속
그의 손이 아직 썩지 않았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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