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어가는 육신과는 달리 천진난만한 정신으로 “언젠가는 낳겠지”하고 멍 때리며 살던 중에 감사하게도 덜컥 임신이 되었습니다.

남편이 심사숙고해서 골라 준 병원인 진오비. 원장님 이야기가 담긴 다큐도 함께 보며 “우리 꼭 저기서 애 낳자”고 다짐했어요. 다큐 속 원장님의 담백함이 좋았습니다. 그때까지는 “자연주의 출산” 지향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자연이나 유기농 같은 단어 들어가면 다 좋은 거니 좋은거겠지라고 생각하며....열심히 만든 질문 리스트를 들고 병원을 찾았습니다. 원장님 실물 영접할 생각에 조금 설레기까지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진료가 몇 분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습니다. 원장님은 비록 겉으로는 무뚝뚝하지만 건네는 말 한마디에 따뜻함이 느껴지는, K-드라마 속 츤데레 남주인공같은 캐릭터가 아니었습니다. 원장님의 무뚝뚝함은 찐이었습니다. 제 마지막 월경일이 3개월 전이라 정확한 추산이 어려워 정상 임신 여부는 2주 뒤에 알 수 있고, 유산 가능성도 있다는 말씀을 어찌나 차갑게 하시는지..잔뜩 설레며 병원을 갔던 마음이 괜스레 위축되며 내가 너무 설레발쳤구나 싶고, 눈물이 나려고 하더라고요. 직접 만드신 핑크색 산모 수첩도 받고 싶었는데 나라에서 제공해주는 기성 산모 수첩 주시고..다시 생각해봐도 진오비에서의 제 첫 기억은 어쩐지 서러움이 가득했네요. 원장님은 잘못하신게 없고 아마 제가 벌써 호르몬의 영향을 잔뜩 받고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예민한걸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나랑은 좀 안 맞는 것 같은데 다른 병원을 가볼까..고민도 했지만, 함께 간 남편은 군더더기 없는 원장님의 진료 스타일이 너무 좋은데 왜 그러냐며 초음파실에서 원장님이 보여주신 전문성에 이미 신뢰가 가득했어요.

그러다 2차 방문을 하게 되었고 정상 임신 판정과 함께 갖고 싶었던 산모 수첩을 품에 안았습니다. 정기검진이 거듭되어도 원장님의 진료 스타일은 쉽사리 적응되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제공해주시는 초음파 영상과 사진부터 시작해서 진오비는 불편한 게 없는, 매끄러운 시스템을 갖춘 병원이었어요. 원장님 혼자서 많은걸 감당하고 관리하시려면 불필요한 감정이나 시간을 쓰실 여유가 없겠다는 것을 나중엔 알겠더라고요. 바쁘신 원장님께 미처 하지 못한 질문은 간호사 선생님들께 여쭤보면 상세히 응대해주셨고 진오비 홈페이지를 알게 된 이후로는 게시판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저기 검색할 필요 없이 진오비산부인과 홈페이지에 있는 내용과 후기, 원장님 답변들로 임신 기간에 가질 수 있는 궁금증과 걱정들을 다 덜어낼 수 있었어요.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는 원장님이 쓰신 수필을 읽으며 임신과 출산이라는 과정의 신성함과 가치에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임신이 여자 혼자서 모든 짐을 짊어지는 것이 아닌, 여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더 소중한 마음으로 아기와 교감할 수 있었습니다. 원장님 수필과 함께 보는 그림들이 너무 좋았어요. 미술사를 전공하고 관련된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예술과 거리가 먼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일하며 사는 게 지겨웠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미술관에 가서 그림들을 보며 고즈넉한 시간을 갖고싶더라고요. 호야킨 소로야의 <엄마>는 원장님 덕분에 저도 참 좋아하게 된 그림인데, 막상 애를 낳아보니 그림 속 우아하게 잠든 엄마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겠다 싶어요. 제 자는 모습은 추노가 따로 없습니다..<엄마>는 언젠가 아가랑 스페인 가서 꼭 함께 보고 싶은 그림입니다 :) 모유수유는 엄마만의 특권이라는 원장님의 표현 또한 수유하는게 힘들때마다 되새기고 있습니다.

막달엔 체중 조절에 실패한 엄마와 아기의 체중이 나란히 훅훅 늘었고, 마지막 초음파에서 이미 3.9kg을 달성한 아기 덕분에 원장님은 자연분만 실패로 이어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들을 설명해 주시며 제 의견을 물으셨습니다. 그래도 해보겠냐고 하셔서 해보겠다고 했습니다. 해본다면 돕겠지만, 출산 시기를 더 늦추는 건 의사로서 추천하지 않는다 하셔서 유도 분만 날짜를 잡았습니다.

분만 당일, 촉진제가 들어가고 한 시간 뒤엔 간호사 선생님과 농담을 나눴고, 두 시간 뒤엔 남편이 점심 타령을 하길래 속으로 욕할 정신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 시간 뒤엔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네 시간 뒤엔 원장님 왜 안오시냐고 엉엉 소리내 울었고, 내진 후 고작 20% 정도 진행된거라는 원장님 말씀에 눈앞이 하얘졌습니다. 너무 아파 더 못할 것 같다고 그만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때 원장님께서 “자연분만하려고 오신 거 아니었어요? 아파야 골반이 열려요. 안 아프고 어떻게 애가 나오겠어요. 조금만 더 참아보시고 호흡을 잘 해보세요”라며 별일 아닌 듯이 말씀하셔서 정말 그 와중에도 주먹이 꽉 쥐어지더군요...아마 다섯 시간쯤 경과한 후에 다시 오셔서 얼마나 아프냐 물으셨고 내진 하시더니 분만실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선배들이 내진이 정말 아프고 무섭다고 했는데 저는 진통이 너무 힘들어서 내진은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였어요.

분만실에서도 견디기 힘든, 기약 없는 고통이 이어졌습니다. 정기검진때마다 뵈었던 간호사 선생님이 많이 힘들어하던 저의 무릎을 지긋이 잡으시며, 읊조리듯 말씀하셨어요. “엄마, 많이 힘들죠? 엄마가 자꾸 소리 지르고 울면 아이가 다 들어요. 엄마가 힘들어하면 애는 그 열 배로 힘들어해요. 그러니 조금만 더 힘내보세요”...간호사 선생님의 그 말씀에 수술해달라는 말이 턱까지 차올랐던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남편이 그때 이후로 제 표정이 비장해졌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따뜻하게 격려해 주셔서 많이 감사했습니다. 목소리가 고우신 간호사 선생님. (유튜브 “원장의 갑질-”에서 환자 역 송ㅇㅇ을 맡으신 선생님이셔요. 성함을 몰라 죄송해요 ㅠ ㅠ)

역시나 애가 커서 나오기 힘들어하니 마지막 시도로 흡입기를 써보겠냐는 원장님 말씀에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빨리 끝내고 싶기도 했고, 원장님 글에서 흡입기와 관련된 내용을 워낙 많이 읽었기에 오히려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잘 진행해 주실 거라는 믿음도 있었고요. 그렇게 무사히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아이를 만난 감격보다는 끝났다는 안도감과 아이가 건강해보여 다행이라는 마음뿐이었습니다.

모자동실 중엔 병원 지시 없이 아이를 안으면 안 되는 줄 알고 우는 아이를 한참 내버려뒀더니 원장님이 오셔서 애를 안아주고, 젖도 물리고 기저귀도 살펴보고하라고 하셔서 그제서야 후다닥 아이를 살폈습니다. 세상에 막 나와 낯설고 서러웠을 아이를 안아주지 않고 내버려 두었던 것이 지금도 많이 미안해요. 출산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시간에 아이를 맞이할 준비를, 공부를 더 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남아있습니다. 2박 3일 모자동실은 서투름 그 자체였지만…그때의 서투름을 만회하고자 매일매일 더 많이 안아주고, 육아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아이가 너무 소중하고 예뻐요. 더불어 정자 제공부터 전 과정을 함께한 아이 아빠, 남편의 소중함도 매일매일 느끼는 중입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이벤트를 무사히 치를 수 있었던 것은 늘 제 정신줄을 잘 잡아준 남편, 그리고 진오비 산부인과 덕분입니다. 진오비 산부인과 덕분에 어려움과 의심, 걱정 없이 10개월을 무사히 버틸 수 있었어요. 제가 다 알 수는 없지만 원장님이 살아오신 인생이, 걸어오신 길이, 지탱해오신 오랜 철학이 저에게도 영향을 미친거겠죠. 특히 원장님의 수필이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 언젠가 꼭 책으로 만나고싶어요.

아마 둘째를 낳게 된다면 전 또 진오비를 찾을것 같아요. 비록 무통 주사를 맞는 출산이 어떨지 궁금하긴 하지만요 ㅎㅎ 원장님을 비롯해 간호사 선생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한 마음 전하며, 늘 응원하겠습니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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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nny117 [2021-03-08 03:34]  심상덕 [2021-01-26 15:51]  

본 글은 아래 보관함에서 추천하였습니다.

#2 심상덕 등록시간 2021-03-08 09:19 |이 글쓴이 글만 보기
출산 후기 본 중에서 제가 가진 모습에 대하여 가장 근접하게 표현해 주신 것 같습니다.
저는 말 그대로 무뚝뚝한 의사가 맞습니다. 무뚝뚝을 가장한 자상함 그런 것은 없습니다.
다만 무뚝뚝하다는 것이 무성의하다거나 무책임하다는 말과 동의어는 아니라는 점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힘들게 낳으신 만큼 조리 잘 하시고 즐거운 육아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제가 글을 길게 썼는데 다 안올라가고 "원장님의 무뚝뚝함은 정말 찐찐 K-무뚝뚝"만 올라갔어요.오해의 소지가 있어 해명합니다.ㅎㅎㅎ 제가 하고싶은 말들은 늘상 들으실 말씀이니 애껴둘게요!!!!!  등록시간 2021-08-22 14:14
원장님의 무뚝뚝함은 정말 찐찐 K-무뚝뚝  등록시간 2021-08-22 02:19
우와, 아기 키우느라 넘나 오랜만에 진오비 홈페이지에 접속했는데 원장님의 답글이!!! 팬레터 보내고 답장받은 기분입니다 ㅎㅎㅎ제가 원장님과의 첫만남 기억을 너무 리얼하게 썼나요..?   등록시간 2021-08-22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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