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글들에서 수능친 이야기를 본 김에 제 대학 입학 시험 이야기도 올려 봅니다.
미술반을 선택한 이유는 제 블로그에 올려도 되지만 사랑하는 미술반의 순위가 좀더 상승되었으면 하는 바램에서입니다.
그리고 미술반 회장님께서 글감이 소진되었는지 아니면 개인 전시회로 바빠서인지 소홀하신 듯 하여 이곳에 글을 던지기로 했습니다.
저는 78년도에 한번 79년도에 한번 두번 대학 입학 시험을 쳤습니다.
즉 재수 했다는 이야기이죠.
제가 학교 다닐 때는 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예비고사라는 것 한번 그리고 본고사 한번 해서 두어달 간격으로 두번이나 시험을 쳐야 했습니다.
예비고사는 전과목을 객관식으로 치루는 시험으로 지금의 수능과 거의 비슷합니다.
그리고 본고사는 국어 영어 수학을 보는 데 주로 주관식이고 대학별로 따로 시험을 치는 방식이었습니다.
지금의 논술고사 쯤에 해당합니다.
당시 대학 입학은 예비고사 점수 40%, 본고사 점수 50%, 면접 점수 10%로 구성되어 있었고 따로 내신 점수는 반영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평소 학교 성적이 좋지 않았던 학생도 막판에 예비고사와 본고사만 잘 치면 원하는 대학에 갈 수도 있었으니까 지금 시스템과는 여러모로 다른 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시험이 다 그렇지만 치를 때마다 긴장되어 떨리고 각종 에피소드도 많이 생기고 하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여하튼 예비고사는 일종의 자격 시험 비슷해서 서울의 명문대학을 지원하는 학생들은 상당히 높은 점수를 얻어야 했는데 점수차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락은 보통 점수차가 많이 나는 본고사에서 결정이 되는 편이었습니다.
제가 오늘 말씀드릴 것은 재수하기 전 그러니까 78년도 예비고사와 재수 하고 나서 즉 79년도의 본고사에 대한 것입니다.
예비고사 전날은 잘 자두고 평소 먹지 않던 음식은 먹지 말고, 마음도 평온하게 가져야 하고 등등 주의 사항이 많지요.
아 근데 시험 전날 잠이 안 오는 겁니다.
평소 공부할 때는 커피를 블랙으로 큰 바가지에 타서 옆에 놓고 물 마시듯 마시면서 공부하던 것 때문인 것도 있고 원래도 잠을 늦게 자는 편인데 갑자기 일찍 자려니 잠이 올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잠이 잘 온다는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봤습니다.
줄넘기도 하고 (말 그대로 달밤에 체조이죠. ㅠㅠ) 양파를 갈아서 코 밑에도 붙여보고 별 지랄을 다 해도 잠이 오지 않고 스트레스를 받으니 설사까지 하더군요.아 그렇게 생고생을 하다가 아마 거의 밤을 꼴딱 샌 것 같습니다.
시험치러 갈 아침쯤 되니까 다리에 힘도 없고 졸음이 쏫아지더군요.
이런 망할......
그래도 시험이니까 시간을 지켜서 고사장에 도착했습니다.
막상 시험장에 도착하니까 긴장한 탓인지 그렇게 졸립지는 않더군요.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1교시가 아마 배점이 높은 국어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예비고사는 원래 난이도가 높지 않아서 저희 때는 340점 만점에 만점자도 몇명 나올 정도로 쉬운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수월하게 답을 미리 시험지에 적고 검토도 하고 한 10분 정도 시간 쯤 남겨두고는 이제 OCR 카드에 수성펜(땅콩산모님께서든가 올려 주신 그런 펜)으로 최종 답을 적어 나갔습니다.
다 적었다 했는데 이상하게 뒤로도 빈칸이 많더군요.
어찌된 일인가 봤더니 시험지 한장의 뒷면을 아예 보지 못하고 풀지를 않은 것이었습니다.
이제 시간이 5분도 안 남았는데 눈앞이 깜깜하더군요.
손을 부들부들 떨어가면서 부랴부랴 풀고 종이 울리기 직전에는 그냥 열몇개는 아무 거나 체크했습니다. ㅠㅠ
첫 시간 시험을 그리해 놓고 나니 다음 시험을 보고 싶지도 않더군요.
그냥 나와버릴까 하다가 경험이나 쌓아두자는 생각으로 또는 본고사에서 만회하자는 생각으로 시험은 끝까지 마쳤습니다.
점수는 예상대로 한심한 수준으로 나왔습니다.
원하는 대학과 학과가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성적으로 지원해 봄직한 학과는 서울대 수의학과와 연세대 식품영양학과라고 담임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시더군요.
당시만 해도 딱히 의대를 가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닌데 왠지 수의학과나 식품 영양학과는 저와 맞을 것 같지 않더군요.
지금 생각해 보면 둘다 산부인과 의사보다는 나았을 것 같습니다.
삶의 질에서든 경제적인 점에서든......
여하튼 그래서 본고사는 아예 치지도 않고 그해 시험은 포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전 예비고사만 두번 치고 본고사는 한번친 반쪽 짜리 재수생인 것이죠. ㅎㅎ
당시 서울역 뒤에 있던 종로학원에서 1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다음 해에 다시 대입 시험에 도전했습니다.
참고로 전 정규 학과 수업 외의 수업 그러니까 과외라고 하는 것을 받아본 것은 재수할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물론 그 시절에도 과외를 받는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종합반 단과반 등등 해서 학원 과외나 혹은 개인 과외, 그룹 과외를 받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는데 저는 가정 형편상 그런 것을 받을만한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ㅠㅠ
재수하고 나서의 예비고사는 마음에 흡족한 수준은 아니지만 본고사에서 원하는 대학들에 지원해 볼 만한 수준은 되었습니다.
이제는 본고사에서 승부를 걸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예비고사를 치고 두달 정도의 여유 기간 동안 본고사 과목인 국영수 3과목에 대하여 과거 시험도 분석하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당시 영어는 "성문 종합영어"를 기본으로 하여 1200제라는 책을 달달 외우기 바빴습니다.
수학은 그때는 "수학의 정석"이라는 책이 제일 널리 읽혔는데 좀 쉬운 편이라 명문대 지망생들은 보통 "해법수학"이나 "경향과 대책"이라는 동경대등 일본의 유수 대학의 기출 문제를 모아 놓은 책을 주로 보았습니다.
저는 국영수 3과목 중 수학에 가장 자신이 있어서 쓸데없는 오만이지만 수학은 누구 못지 않다고 하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수학 경시대회 같은 곳에 나가서 검증을 받은 것은 아니니까 믿거나 말거나이지만.ㅋㅋ
그래서 국어는 중간만 하고 좀 떨어지는 영어에서 잃은 점수를 수학에서 따서 원하는 결과를 얻겠다는 것이 제 본고사의 전략이었습니다. ^^
드디어 본고사 날 저희 집이 있던 동대문에서 서울대학이 있던 관악산까지 먼 거리를 시험을 치러 갔습니다.
어머니께서 날도 춥고 하니 택시 타고 가라고 차비를 쥐어 주시는 것을 뿌리치고 버스를 갈아 타고 지하철도 타고 해서 수험장소에 갔습니다.
아마 뒤에서 물끄러미 보시는 어머니 가슴이 많이 아팠을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왜 그렇게 쓸데없는데서 똥고집을 부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딴에는 별것도 아닌 일인데 무에 대단하다고 평소 타지도 않던 택시를 타나 하는 일종의 삐딱심리 아니었나 싶습니다.
본고사는 국어 영어 수학의 순으로 시험을 쳤습니다.
국어는 그럭저럭 중간은 한 것 같고 영어는 예상대로 평소에도 그리 잘 하지 못하던 과목이라 점수를 까먹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예비고사도 당시 서울의대 커트라인 점수 308점에서 8점 정도 모자랐으니 이제 수학에서 점수를 따야 했습니다.
드디어 제가 제일 좋아하고 기대를 걸었던 대망의 수학 시험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때 기분은 맛있는 음식을 기다리는 미식가의 심정과도 비슷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문제는 총 6문제가 주관식으로 나왔고 시간은 100분이 주어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제 풀이 과정이 맞으면 답이 틀렸어도 50%의 점수를 주고, 답이 맞았더라도 문제 풀이 과정이 올바르지 않으면 50% 밖에 점수를 주지 않는데 결과만 따지는 요즘 세상에 비추어 보면 상당히 합리적인 방법 같습니다.
일단 천천히 6문제 전부를 가벼운 마음으로 한번 죽 훑어 봤습니다.
일종의 간보기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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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점들은 제가 문제를 훑어 보고 나서 잠시 정신이 나갔던 시간을 표현한 것입니다.
실제로는 한 이삼분 쯤이나 될까 말까 한 시간이겠지만 저는 굉장히 길게 느껴지는 시간 동안 넋이 빠진 채로 멍하게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6문제 모두 이전에 제가 접해 보지 못했던 유형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단 한 문제도 어디서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ㅠㅠ
1번 문제를 뚫어져라 쳐다 보다가 손도 못대고 2 번 문제를 뚫어져라 쳐다 보고, 또 그렇게 3번 문제를 뚫어져라 쳐다 보다가 한 삼사십분 쯤 시간이 흐른 것 같습니다.
일본 동경대학 문제에도 이런 유형의 것이 없었는데.......
내가 헛 공부를 했나 보다. 평소 수학이라면 만만하게 생각하고 자만해 있다가 벌을 받는구나 싶었습니다.
아니면 무언가 대단히 잘못되었다 생각하면서 천장 한번 보고 문제지 한번 보고 그동안 학교 다니면서 있었던 이런 저런 일, 재수 하면서 고생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연필을 손에서 놓고 잠시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래 뭐 대학이 다는 아니니까, 그냥 시간이나 떼우다 나가자 하는 생각으로 1번 문제를 골똘히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때 문득 어슴프레하게 이렇게 접근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대로 한번 풀어 보기로 했습니다.
한 이삼분 쯤 이리 쑤시고 저리 쑤시고 하니 문제가 풀만한 것으로 나누어 지고 다행히 한 문제를 풀었습니다.
물론 그 풀이 과정과 답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는 모릅니다.
한문제 풀고 나니 시간이 한 이십여분 남았더군요.
두번째 문제도 다시 한번 봤습니다.
역시 모르겠더군요. 세번째 네번째 다섯번째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여섯번째 문제인가는 원래 문제 출제자가 의도한 방식은 아니었겠지만 답을 하나씩 일일이 대입해 보는 노가다 방식--요즘도 이런 방식으로 문제를 풀기도 하겠지만-- 으로 넣어 보았습니다.
열몇번쯤 그런 노가다를 해도 등호가 성립하지 않더군요.
시험 종료 벨이 울리기 조금 전에 마침내 등호가 성립했습니다.
답이 나온 것이죠. 풀이 과정이요?
없습니다. 달랑 답만 적었습니다. ㅋㅋ
그러니까 제 예상이 맞다면 1번은 풀이과정과 답이 맞았으니 10점을 다 받고 6번째는 답만 맞았으니 10점 중 5점을 받겠지요.
물론 그 넓은 시험지는 1번 부분 그러니까 좌측 상단이 조금 글씨가 있고 중간이 허연 백지로 있다가 우측 하단의 마지막 문제에 몇자의 답이 있었습니다.
답안지가 참 깨끗하더군요.
종료벨이 울리고 연필을 책상 위에 내려 놓고 나니 궁금해 졌습니다.
수학이라면 나름 자부심이 있었는데 다른 친구들은 어땠는지 말입니다.
시험관이 시험지를 뒤에서 부터 걷어 가고 있더군요.
고개를 세워 제 앞에 앉은 수험생의 답안지를 흘낏 보았습니다.
아주 빽빽한 것은 아닌데 그래도 반정도 면적에는 깨알 같은 글씨들로 채워져 있더군요.
그래 저게 정상이지.
문제를 받았으면 맞든 틀리든 반은 답을 적어 내야 하는 것이 맞지.
앞의 수험생의 답안지를 보고는 모든 것이 명료해졌습니다.
"그래 내가 의대는 무슨 의대냐 ,쥐 뿔 사명감이나 인간에 대한 사랑은 눈꼽만치도 없으면서....법대 가야겠다. 검사가 되서 폼 좀 잡아 보는 거야."
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시험은 전기 후기라고 해서 전기에 서울대 고대 연대 등이 있고 전기에 탈락한 학생들이 후기에 한번더 대학에 지원해 볼 수 있었는데 후기에는 한양대와 성균관대 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기에서 떨어지면 과를 아예 바꾸어 후기 시험에는 성균관대 법대를 지원해 볼까 잠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법대를 가서 사법시험으로 내 능력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시험장을 나오는데 사방에서 한숨 소리가 들리고 우는 친구도 있더군요.
그때나 지금이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의 하나가 어느 대학 어느 학과를 가느냐 하는 것이었으니까요.
12년간의 공부가 한 순간의 시험으로 결판이 나니까 아닌게 아니라 시험을 망쳤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은 속도 상하고 하늘이 꺼지는 것 같기도 할 것입니다.
저도 별로 다르지는 않았지만 12년 아니 저는 13년간의 감옥에서 나온 것 같은 해방감도 있어서 비교적 무덤덤한 느낌이었습니다.
합격자 발표는 한달 후 쯤인가 있었는데 합격자 발표 전에 신체 검사와 면접 시험이 있었습니다.
그 두가지와 이전의 예비고사 점수 그리고 본고사 점수를 합쳐서 합격자를 발표하는 방식입니다.
저는 기대하던 수학을 망쳤기 때문에 신체 검사와 면접 시험에도 별로 가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재수하지 않던 친구가 다니던 대학의 앞에서 당구를 치면서 신체 검사와 면접 시험에는 가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친구 녀석이 그래도 한번 가보는게 좋지 않겠냐고 떠밀기도 했고 무슨 기대가 생겼는지 여하튼 면접과 신체 검사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가기는 갔습니다.
합격자 발표는 관악산 서울대 운동장에 게시하고 전화로도 당락을 알려 주는데 가서 비참한 기분을 한번 더 느끼고 싶지 않아서 가지 않기로 했습니다.
합격자 발표날은 마음만 아플 것 같아 친구들과 어울려 애써 잊어 버리려 하는데 친구 녀석이 자기가 전화해 볼테니까 수험 번호를 알려 달라고 해서 가르쳐 주었습니다.
전화를 건 친구가 "너 합격했어 임마" 하길래 이 놈이 그렇지 않아도 기분 꿀꿀한 데 나를 놀리는구나 싶어 화가 났지만 거짓말 같지가 않았습니다.
아니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그랬으면 싶었습니다.
물론 결과는 친구의 전언대로 합격이었으니 지금 의사가 되서 이 글도 쓰고 있지만 당시에는 정말 믿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어떻게 수학을 거의 빵점 가까이 맞고 합격을 할 수가 있었을까?
나중에 들은 소식인데 그해 수학 시험은 난이도 조정에 실패하여 수학 시험 과락자 (즉 빵점)가 상당히 많이 나왔다고 하더군요.
수학에서 두문제를 푼 사람은 모두 합격이고 한문제 이상 푼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공대 합격자 평균이 반문제인가 한문제인가 뭐 그렇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저도 수학은 망친 것은 아니고 중간은 한 것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럼 시험지가 빽빽하던 앞의 친구는 어떻게 된 것이냐구요?
의과 대학에서 제 바로 앞번호가 된 친구인데 그해 서울대 수석을 했더군요.
젠장 괜히 엄한 걸 봐서 속만 끓인 꼴이었죠. ㅠㅠ
그래도 난 불과 한 문제만 가까스로 풀었는데 그 친구는 반 가까이 풀은 것으로 보여서 수학에 관한 제 자존심은 그때 크게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는 어디가서 수학 잘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수학을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ㅋㅋ
이상 제 대학 입시 이야기였습니다.어때요?
재미있으셨나요?
예전 방식의 시험이라 지금 보시는 분들은 별로 공감도 되지 않고, 재미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저 지루한 대신 시간 때우기에는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미술반에 글 하나 던진 것으로 이 모임의 회장이신 동네주민님께 얼마전 진 신세는 퉁치는 것으로 했으면 합니다. ㅎㅎ
그렇게 삼십여년전 가슴 졸였던 순간들은 지금 돌아보면 산부인과 의사로서 이후 제가 겪은 것들에 비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니더군요.
그러나 산부인과 의사로서의 그런 순간들은 아마 당장 글로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아직도 가슴에 상처가 아물지 않은 것도 있고 이 글을 보실 산모분들께 괜한 걱정과 두려움을 드리고 싶은 생각도 없으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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