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의 첫 식사라고 해서 오붓하게 둘만 먹는 식사자리는 아니었다.
그녀가 병원에 온지 1주일쯤 지났을 때였다.
마침 예정된 수술도 일찍 끝나고 병실 환자들도 안정적인 상태라서 그녀의 환영회를 겸하여 병원 근처의 낙산 가든에서 팀원 모두가 함께 저녁을 먹기로 하였다.
불고기가 맛있는 것으로 소문난 그 집은 평일임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체코에도 한국 음식점이 있기는 하겠지만 아마 서울식 불고기는 처음 먹어보는 것일텐데도 그녀의 젓가락 놀림은 다소곳하지는 않았다.
음식을 시켜 놓고 점잖을 떨지 않고 맛있게 먹어주는 것은 음식을 함께 먹는 사람으로서의 기본 예의일터이다.
"나탈리 킴 선생. 어때요? 먹을만한가요? 이쪽에서는 나름 맛집으로 유명한 집인데....."
"예 맛있어요"
의례적으로 한마디 건넨 후에는 딱히 더 물어볼 말이 없어서 팀원들끼리 지난 주의 수술 케이스에 대한 토론이 오고 갔다.
"저 치프 선생님. 지난 주에 수술한 B 교수님의 마이오마(myoma. 자궁 근종) 환자는 좀 심한 것 아닌가요?"
"무슨 말이죠? 백선생."
"그러니까 수요일날 수술한 A환자 말입니다. 마이오마가 사이즈 5cm정도 밖에 안되는 스몰 사이즈인데다가 환자가 별 증상도 없는데 굳이 히스테렉토미(hysterectomy. 전자궁적출술. 자궁을 전부 제거하는 수술)가 필요한가 해서요."
"음. 그 A환자는 증상이 심하지는 않았지만 여러가지를 고려하여 B교수님께서는 수술하는 것이 좋겠다 판단하셨을 겁니다."
"그 분의 증상은 생리양이 조금 많은 정도뿐이었는데 환자 나이가 45세시니 이제 곧 폐경이 되면 생리과다 문제는 해결이 되는 것 아닌가요?"
"폐경이 되려면 아직도 5년 정도 더 남아 있으니까 아마 그렇게 판단하신 게 아닐까요?"
"아무리 그래도 오피 인디케이션(op. indication. 수술 적응증)에는 좀 벗어나는 것 같은데요."
"꼭 앱설류트 인디케이션(absolute indication. 절대적 수술 적응증. 꼭 수술해야는 경우들을 말함)에 따라서만 수술하는 것은 아니고 때로는 렐라티브 인디케이션(relative indication. 상대적 수술 적응증. 때로 수술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경우들)에 따라 할 때도 있는 것이죠."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B교수님의 수술 욕심은 좀 심한 편이었다.
굳이 수술이 필요하지 않고 경과 관찰을 해도 될만한 근종이나 난소 낭종도 수술을 권유하는 것으로 의국내에서는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B교수님은 스스로도 눈치가 보였는지 그런 수술을 할 때면 항상 하는 말이 있었다.
"야 마이오마 크다. 크다. 이봐 이봐" 하면서 근종이 불거진 자궁을 들어 올려서 강조하고는 했다.
그런 경우 아부를 잘하는 수석의(치프)는 "어우 굉장히 큰 데요?" 하면서 교수님의 말에 맞장구를 쳤지만 나는 차마 얼굴이 화끈 거려서 그런 맞장구를 치지는 못했다. 그런 아부를 적절히 하지 못해서 의국 생활이 고달펐을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개인의원이 아닌 대학병원에 근무하는 교수도 진료 실적이나 수술 실적에 대하여는 태연할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진료 실적에 따라 병원내 보직이 결정되기도 하고 특진 수당 등 보수에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교수들 간에도 실적에 따른 보이지 않는 기싸움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에 때로는 이번 수술과 같은 과도한 사례들이 생기고는 하였다.
그런 무리한 수술이 꼭 맞는 일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교육 과정에 있는 우리들로서는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그리고 보니 의과대학 동기인 K가 생각이 난다.
K가  심장 질환으로 군 면제를 받게 된 것도 마찬가지였다.
K는 사실 뚜렷한 심장 질환이 있는 것은 아니고 애매한 심전도 소견을 보여서 군 면제가 확실하게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친구의 외삼촌인 심장내과 S교수님께서 그 친구의 심전도 소견을 보고 심근 경색의 우려가 의심되는 소견으로 군 생활 불가하다는 판단을 내렸었다.
의학에서 많은 부분이 그렇지만 심전도나 심장 초음파를 보고 심장 질환에 대하여 판정을 내리는 것도 수학처럼 분명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심장에 대하여 국내 최고 권위자인 S교수님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심장 질환에 대하여 심전도를 판단하여 병역 면제 여부를 판단하는 병무청의 군의관들도 S교수님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는 바일 것이다.
그런 교수님이 그렇다 하면 설사 애매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맞는 것이다.
의료란 그런 것이었다.
따라서 B교수님이 수술을 해야 할 환자라면 수술을 해야 할 사람이 맞는 것이다.
최소한 그 밑에서 교수님으로부터 이것저것을 배우기로 한 수련의들은 묵묵히 받아들이고 배울 의무가 있었다.
그렇다해도 교과서를 통해 배운 것과 좀 다른 것들을 보게 될 경우에는 혈기 왕성한 젊은 의사로서는 아무래도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 가만히 듣고만 있던 그녀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 치프 선생님. 마이오마의 오피 인디케이션(myoma op. indication. 자증 근종의 수술 적응증)은 뭐예요?"
보통 항간에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몰라도 아는 척 가만히 있어야 할 때도 있고 알아도 모르는 척 가만히 있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못했는데 아마 체코에는 그런 속담이 없거나 아니면 그녀의 성격이 궁금한 것은 물어서 답을 듣지 않으면 못 참는 성격이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의학에서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지 않고 아는 척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녀의 질문은 그리 문제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장려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잠시하면서 그녀를 쳐다 보았다.
정말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배우려고 온 사람이니 가르쳐  주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가르쳐준 들 기억에 그리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탈리 킴 선생. 배우려고 왔잖아요. 배운다는 것의 의미는 그저 편하게 남이 떠주는 밥을 먹는 것과 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직접 책을 찾아 봐요. 노박(Novak's gynecology. 부인과학에 있어 교과서로 통하는 책) 읽어 봐요. 읽어 보고 내일 저녁 회진 시간에 내게 보고하세요."
그녀는 괜히 말 한마디 꺼냈다가 숙제만 안게 되어 다소 당황하는 눈치였지만 꿔다 놓은 보리자루처럼 그동안 별로 말도 안 붙이고 이것저것 가르쳐 주지도 않던 내가 무언가 숙제를 내 준 것이 그리 싫지는 않아 보였다.
"예. 치프 선생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를 포함하여 2년차와 1년차 주치의, 그리고 세컨드 주치의라 할 수 있는 그녀, 그리고 인턴까지 5명이 아마 불고기 10인분은 먹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양을 해치웠다.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다음으로 들르는 곳은 항상 일정했는데  동숭동 샘터 화랑 옆에 있는 독일식 호프집이었다.
값도 저렴한 편이었지만 생맥주의 맛이 다른 곳보다 깊은 맛이 있었고 안주로 나오는 소세지도 수제 소세지라서 인지 맛이 좋았다.
배부르게 먹고 2차로 맥주라니 가능할까 싶지만 수술 때문에 끼니를 제때 못 먹고 폭식을 하다보니 위가 많이들 늘어나서 그런지 한번에 많은 양을 먹는 재주들은 자연스레 생기게 되었다.
물론 나야 술을 잘못 먹기도 하지만 온콜(대기 상태로 있으면서 야간 응급 수술시 집도를 맡는 수석의)을 받아야 하는 처지라 술자리의 분위기만 즐길 수 밖에 없었다.
원래 우리팀의 1년차 백선생은 술을 잘 먹는 편이기는 했지만 그녀도 만만치는 않았다.
술이 좀 들어가서 그런 것인지 그녀는 그동안 보기보다는 활달한 성격처럼 보였다.
어차피 친하게 지내야 하는 같은 주치의라서 그런지 백선생과는 건배도 해 가면서 잔을 비워 나갔다.
며칠 되지는 않았지만 다소곳하게 새침때기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당차게 백선생을 당해내고 있었다.
백선생도 나름 술이 센 편이었는데 그녀가 한수 위인듯 싶었다.
결국 백선생이 백기를 들고 말았는데 그건 백선생이 술이 약한 탓이라기보다는 이미 먹은 그 많은 양의 술을 감당해낼 위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퍼지게 먹고 오프(off duty. 비번)였던 백선생과 인턴등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퇴근하였고 나는 온콜이라 병원으로 들어와야 했는데 그때까지 딱히 숙소가 없었던 그녀도 여의사 당직실로 가기 위해 함께 병원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얼추 밤 11시가 넘었을 즈음이었다.
호프집이야 병원 정문에서 그리 많이 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병원 정문을 지나서도 당직실이 있는 본관까지는 꽤 긴 거리였다.
그렇다고 택시를 타고 갈 만한 거리도 아니었다.
날씨는 그리 춥지도 덥지도 않았다.
걷기에 적당한 날이라 술과 음식 냄새도 날릴 겸 라일락과 마로니에 나무로 단장된 길을 나란히 걸었다.
상당한 양의 알콜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별로 취한 기색은 없었기 때문에 내가 부축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은 안 해도 되었다.
아마 체코가 북구이다 보니 보드카와 같은 쎈 술에 이미 단련이 되어서 그런 모양이다.
하기사 요즘이야 맥주는 술 축에도 못 들어갈 정도로 약한 술이 되기는 했지만.
"나탈리 킴 선생. 괜찮아요?"
"예 괜찮아요. 이 정도쯤은 아무 것도 아니예요. 저 학교 다닐때나 인턴 때는 정말 술 많이 먹었거든요. 이 정도쯤은 뭐 아무 것도 아니예요. ㅎㅎ"
"술을 왜 그렇게 많이 먹었어요?"
"음.....남자 친구가 속을 썪여서요. ㅎㅎ"
웃음이 많아지면서 약간 높은 톤으로 대답을 해서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하기는 어려웠지만  여하튼 전혀 예상하지 않던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고 어떤 남자 친구인지, 왜 속을 썩였는지 하는 것을시시콜콜 물어볼 만큼 허물없는 사이도 아니라서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치프 선생님은 여자 친구 있으세요?"
외국도 그리 다르지 않겠지만 그런 질문은 함부로 던질 수 있는 질문이 아닐 것이다.
대답을 하자니 그렇고 안 하자니 너무 예민하고 심각하게 반응하는 것 같고 우물쭈물하고 있을때 그녀가 다시 물었다.
"남자 친구와는 헤어졌어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기도 전에 또 묻지도 않은 대답을 했다.
그녀의 말이 독백의 수준으로 가고 있었다.
지나친 사적 대화를 나눌만한 관계도 아니어서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다가 다행스럽게도 본관에 거의 도착했기 때문에 당돌한 질문과 어색한 침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나탈리 킴 선생. 오늘은 술을 좀 많이 마신 것 같은데 그만 들어가서 쉬어요. 내일 아침 수술에 지장 없으려면 빨리 가서 자야 할 듯 싶군요. 그럼 이만"
"예. 안녕히 주무세요. 치프 선생님."
그녀가 고개를 꾸벅하고 여자 당직실 쪽으로 몸을 돌려 들어갔다.
하루 종일 수술에 지쳐 몸은 피곤했지만 비록 몇시간 되지 않는 오래간만의 여유가 그동안 찌든 몸과 정신을 조금은 회복시켜 주는 듯 싶었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요즘 하늘을 올려다 본 적이 있었나 싶어 생소한 검은 하늘이 병원 건물들 사이로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믐이라도 별도 그리 많지 않고 하늘을 찌르는 높은 건물들에 가려 그저 한뙈기 정도의 좁은 밭만큼 밖에 보이지 않는 하늘이었지만 그래도 하늘이 있어서 다행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응급 환자가 없이 푹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직실 침대에 되는대로 몸을 누이고 잠시 내일 수술에 대하여 생각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나 싶게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휴대폰을 눌러 시간을 보니 5시 10분이었다.
아직 수술장에서 콜할 시간도 아니었는데 응급 환자가 온 모양이었다.전화를 받으니 당직 주치의였다.
"저기 치프 선생님. 나탈리 킴 선생이 배가 많이 아프다고 해서 좀 전에 외과에 가서 진찰했는데 외과 당직의 샘께서 아무래도 서지칼 아브도멘(surgical abdomen.  수술이 필요한 외과적 복강 질환. 반대는 medical abdomen으로 수술이 필요하지 않은 내과적 복강 질환)으로 판단된다고 빨리 수술해야 할 것 같다고 합니다."
외과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갑자기 왜요?  임프레션(impression. 추정 진단명)은 뭐라고 합니까?"
"외과에서는 아빼(appe. appendicite. 급성 충수돌기염. 소위 맹장염)가 의심된다고 합니다."
"아뻬요?"
"예."
어제 밤에 무리하게 과식을 한 것이 문제였을까 싶었다.
괜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 수술을 준비하고 있는 외과 수술장으로 내려가 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TBCOTE.
#2 로로맘 등록시간 2014-07-28 10:51 |이 글쓴이 글만 보기


일단 이거 먼저 댓글쓰고... ㅋㅋㅋ
점심먹고 와서 제대로 읽고 써야겠어요.

댓글

점심먹고와서 1편부터 제대로 읽고 할라고요. 그래도 1등으로 댓글 달고 싶어서 일단 까만하트로 댓글 선점이랄까요? ㅎㅎㅎㅎ내심 밀푀유나베같은 것을 저도 모르게 기대했는데 이번엔 없군요.. ㅎㅎ 근데 이번에도 나탈리가 혁에게 작업거는거 같아요.혁빠는 늘 은근히 작업에 약한거 같아요.-.- 남자들이 원래 다 그런건가..???  등록시간 2014-07-28 13:34
아니 읽지도 않으시고 내용도 모르는 채로 검은 하트는 무슨 의미인지요? 빨리 다음편 써달라는 일종의 뇌물인가요? ㅋㅋ  등록시간 2014-07-28 11:14
#3 bella 등록시간 2014-07-28 21:52 |이 글쓴이 글만 보기
기다리던 3편이 올라왔네요 ㅎㅎ 이번글을 읽으니 왠지 다음편 에서는 큰 썸씽이 있을것같은....잔잔한 파도가 느껴진달까요?  잘 읽었습니다~~

댓글

예리하시군요. 뭔가 일이 생기기는 생깁니다. 기대하시는 그런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ㅋㅋ. 재미도 없이 딱딱한 글을 읽어 주시어 감사합니다. ㅎㅎ  등록시간 2014-07-28 22:01
#4 이연경 등록시간 2014-07-29 08:37 |이 글쓴이 글만 보기
맹장으로 죽이시려는건 아니시죠??ㅡㅡ
ㅋㅋㅋㅋㅋ 죽으면 아니되옵니다 ㅋㅋㅋ
썸을 쫌 타야 아! 심장님이 쓰신소설이로구나 요러지요 ㅋㅋㅋ 담편 기대합니다!!! ㅋㅋ

댓글

이번에도 여주가 죽어요? 혁씨가 사랑하는 여자는 다 죽습니까? 무셔버라 저승사자 신가보다 ㄷ ㄷ ㄷ~~~  등록시간 2014-07-29 20:43
당근 여주가 벌써 죽으면 안되죠. 여주 없이 남주 혼자 어찌 스토리를 채우겠습니까? 근데 그러고 보니 당장은 아니지만 여주가 결국 죽는 쪽으로 스토리를 꾸며볼까 하는 생각은 드네요. ㅎㅎ  등록시간 2014-07-29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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