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제비꽃 장식을 한 베르트 모리조
작가: 에두아르 마네
소장: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
"어떻게 할 거야?"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러게 내가 피임 확실히 하라고 했잖아."
"미안해."
"어쨌든 이제 어떻게 책임질 거야?"
"나야 뭐......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 나는 따라갈게."
"그래? 그럼 알았어. 낳아야지 어떻게 하겠어. 대신 나랑 한 가지는 약속 해."
이상의 대화는 아직 결혼 전인 커플이 계획에 없던 임신을 해서 나눈 가상의 대화가 아니다. 오래전 셋째를 임신했을 때 아내와 내가 나눈 대화 내용이다.
둘째 아들이 8살이던 어느 날 아내가 갑자기 물국수를 먹고 싶다고 말했다. 아내는 원래 국수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웬일로 입맛이 변했나 싶었는데 검사를 해 보니 셋째를 임신해서 나타난 입덧이었다. 검사 결과를 보자 그 무렵에 내가 꾸었던 꿈이 생각났다. 어느 날 갑자기 진료실에 분홍빛 돼지가 새끼 몇 마리와 함께 들이닥쳤다. 나는 진료실에 돼지라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급하게 진료실 문을 닫고 돼지가 못 나가게 막았다. 왜 쫓아내지 않고 막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꿈이 깨고 나서도 너무 생생하게 기억이 나서 다음날 아침에 아내에게 말했다. 아내는 돼지꿈이니 빨리 주택 복권을 사자고 했다. 지금은 로또가 있지만 그 당시는 주택 복권이 로또와 같은 것이었다. 그날은 마침 금요일이었는데 주택 복권은 토요일에 발표가 나기 때문에 오늘 밖에 살 시간이 없었다. 복권 가게가 문을 닫을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그날따라 진료가 밀려서 가지 못하고 있었다. 간신히 진료를 마치고 가게가 문을 닫기 직전에 대략 만원 어치 정도로 꽤 많은 액수의 복권을 구입했다. 다음날 설레는 마음으로 추첨을 기다렸지만 아무것도 당첨되지 않았다. 개꿈이었다. 그랬는데 나중에 아내의 임신 소식과 함께 꿈 이야기를 장모님께 말씀드리니 개꿈이 아니라 심 서방이 태몽을 대신 꾸었구먼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색깔이 분홍빛 돼지이니 아마 딸일 것이라고 하였고 장모님 예상대로 아내는 딸을 낳았다. 막내는 내가 일하는 병원에서 내 손으로 직접 받았다. 두 아이의 출산 때 가보지 못한 미안함을 나는 그것으로 퉁쳤으면 하고 바랬다. 물론 아내에게는 그런 내 바람은 택도 없는 것이었지만.
막내딸의 임신 덕분에 그 해에 응암동 시장에 있는 국숫집에서 아내와 나는 물국수를 엄청 많이 먹었다. 서정주 시인의 시 "자화상"에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라는 문장이 있다. 아내는 비만은 아니라도 조금 뚱뚱(아니 통통으로 정정하자 혹시 아내가 볼지도 모르니)한 체격에 해당하는 몸무게인데 특히 복부 지방이 만만치가 않다. 아내의 복부 지방이 늘어난 원인 중 팔 할은 아마 그때의 물국수가 차지할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듯싶다. 이미 오래전 이야기가 되었지만 당시 위로 딸과 아들 두 아이가 있어서 더 낳을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 계획에도 없던 셋째를 임신하고 출산할지 말지 고민이 많이 되었다. 결국 낳기로 결정하면서 아내가 나에게 다짐받은 내용은 두 가지였다.
첫째. 병원 경영을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쪽으로 책임지고 잘할 것.
둘째. 흡입기는 내다 버릴 것.
당시 개원해서 운영하던 병원은 그럭저럭 운영은 되었지만 자녀 교육과 노후를 생각해 넉넉히 저축할 정도로 그리 좋다고 할 수도 없는 사정이었다. 세 아이를 키워야 하는 입장에서 양육비나 교육비를 생각하면 아내는 현재의 경영 태도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두 번째 조건에 있는 흡입기는 흡입 분만에 사용하는 기구로 의사들 사이에서는 의료 분쟁 유발기로 알려져 있었다. 흡사 오토바이가 과부 틀이라고 불리는 것과 비슷했다. 오토바이는 워낙 위험해 자동차 보험도 못 든다고 알고 있다. 남자들이 오토바이 타다가 사고로 다치거나 죽는 경우가 많아서 내가 젊었던 시절에는 오토바이를 과부를 만드는 기계라고 해서 과부 틀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흡입기를 이용한 분만은 성공하고 아무 문제가 없으면 다행이지만 흡입기 때문이든 다른 이유 때문이든 결과가 나빠 아기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기라도 하면 분쟁으로 연결되기 십상이었다. 요즘도 그렇지만 그때도 의료 분쟁이 발생하면 산모나 가족에게도 비극이지만 의사에게도 심각한 문제였다. 많은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거나 폐원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래서 산부인과 의사는 흡입기를 사용하는 것을 꺼린다. 아내의 요구처럼 아예 내다 버린 의사도 많다. 흡입기를 사용하여 병원이 얻는 득은 거의 없는데 비하여 감수하여야 할 잠재적 위험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흡입기를 고려해서 출산을 해야 할 상황이라면 아예 시도조차 하지 말고 제왕절개 수술을 하라는 조언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동안 흡입기를 이용한 분만을 필요에 따라 사용하고 있었다. 제왕절개 수술을 피하고 산모가 자연 분만을 할 수 있도록 최대한 돕기 위해서였다. 그런 내 모습을 병원에서 함께 일하면서 보는 아내로서는 많이 걱정스러워했다. 그래서 셋째를 출산할 무렵 내게 그런 다짐을 받으려 한 것이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항상 하게 되는 고민이 있다. 언제 이 그림을 그만두고 완성작으로 사인을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다. 그림이라는 것이 수학처럼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서 끝내야 하는 지점이 정해져 있지 않다. 화가에 따라서는 평생을 두고 못 끝내는 그림도 있는 반면 어떤 화가는 그리다 만 상태가 분명해 보이는 상태로 끝내기도 한다. 특히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랬다. 대충 그렸다는 느낌을 준다. 후기 인상주의 화가인 모네의 작품 "인상, 해돋이"는 어떤 기자는 원숭이도 그릴 수 있는 그림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누가 봐도 그리다 만 것이 분명했다. 사실 모네의 그 그림은 끝까지 그릴 수가 없다. 해가 뜨는 잠시의 시간 동안 그림을 완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림을 화실로 들고 가서 마무리를 천천히 할 수 있지만 평론가들도 나중에 화실에서 완성한 작품보다 야외에서 급하게 그린 그림들이 오히려 더 생동감이 있어서 좋다고 평가했다. 모네 말고도 세잔, 드가, 마네 등등 우리가 학교 다니면서 들은 많은 화가들이 인상주의 화가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그중 큰 형님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세잔은 야외에서 한 순간을 포착하는 그림을 그리는 데서 오는 시간 부족 때문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그림의 완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마무리가 덜 된 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상을 할 수 있는 그림 쪽으로 나아갔다. 세세한 묘사로 보는 사람의 상상과 해석의 여지를 없애기보다 오히려 다양한 시각으로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 세잔의 생각이었다. 이런 작품 형식을 오픈 워크 즉 열려있는 작품이라고 부른다. 흔히 영화에서 열린 결말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도 덜 마무리된 느낌을 주었는데 마네도 예외가 아니었다. 마네는 "풀밭 위의 점심 식사"나 "올랭피아", "옷을 입은 마하와 "옷을 벗은 마하" 등 파격적인 작품으로도 유명한 화가다. 그에게는 그림만큼이나 파격적인 이야기가 있다. 역시 인상주의 화가인 베르트 모리조와의 연애사가 유명하며 영화로도 만들어졌을 정도다.
베르트 모리조는 아름다운 데다가 미술적 재능도 뛰어나서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었던 촉망받는 여성 화가로 알려져 있다. 마네는 모리조보다 9살이나 많았지만 역시 미남인 데다가 화풍도 비슷해서 둘은 연인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마네는 당시 이미 유부남이라 드러내 놓고 연애를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모리조가 마네의 동생 외젠과 결혼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서로 가까이 보고 싶었던 것이라고 전기 작가들은 분석하였다.
베르트 모리조는 여성 화가로서 몇몇의 작품을 남겼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의 작품으로 보다는 마네가 그린 초상으로 이름이 더 널리 알려졌다. 마네가 그린 "제비꽃 장식을 한 베르트 모리조"가 그것인데 내가 아주 좋아하는 그림 중 하나다. 이 그림도 인상주의 화가의 그림답게 무채색 계열인 흰색과 검은색의 강렬한 대비와 섬세한 묘사를 생략함으로써 오는 단순함, 그리고 모리조의 청순한 미모가 더해져 현재까지 최고의 초상화 중 하나라는 찬사를 듣고 있다. 그림에서 모리조가 단 장식의 제비꽃은 흰색, 노란색도 있지만 제일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보라색이다. 제비꽃의 꽃말은 색에 따라 다르며 보라색 제비꽃의 꽃말은 진실한 사랑이다. 내가 좋아하는 말이다. 가짜 사랑이란 것이 있지는 않지만 왠지 진실한 이라는 형용사를 붙이니 무언가 더 애절해 보인다.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에게 그런 제비꽃을 선물했다면 그 의미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마네는 화가이기 때문에 실물의 꽃을 선물한 것이 아니라 그림으로써 선물을 했다.
모네의 "인상, 해돋이"나 "제비꽃 장식을 한 베르트 모리조"나 모두 가장 적절한 순간에 화가가 더 이상 그리기를 중단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산부인과 의사도 출산 과정 중에 그런 고민을 하는 때가 있다. 난산이 되어 흡입 분만을 시도하는 경우다. 흡입 분만이란 자연적인 힘만으로는 아기가 산도를 빠져나오지 못할 경우 진공 흡착기를 아기 머리에 붙여서 질 밖으로 꺼내는 분만법이다. 어느 진공 청소기 선전에 청소기를 고층 건물 벽에 붙여서 올라가는 장면이 있던데 그와 같은 이치라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벽이 아니라 아기의 머리라는 것과 아주 강력한 흡착력이 아니라는 점이 분만 흡입기와 진공 청소기의 차이다. 아주 강력한 흡인력은 아니라도 흡입기를 지나치게 오래 사용하면 아기에게 위험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그래서 흡입 분만을 언제 중단할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교과서에서는 흡입기 사용의 중단 시점을 아래와 같이 정해두고 있다.
• 3번의 연속된 흡입이 실패하였을 때
• 태아 두피 손상이 있을 때
• 흡입기가 3번 이상 태아 머리에서 떨어졌을 때
그러나 막상 흡입 분만을 시도하게 되면 중간에 중단하기가 쉽지 않다. 흡입 분만을 시도하다가 중단하고 제왕절개 수술을 하게 되면 그 또한 시간 지체로 위험할 뿐 아니라 이중으로 고생하게 된 산모나 가족으로부터 원망을 들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조금 다른 예이지만 젊은 사람의 심폐 소생술을 하는 경우에도 비슷한 고민을 한다. 젊은 나이의 자녀를 갑자기 잃게 된 부모들은 안타까움에 심폐 소생술로 살려 내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 심폐 소생술의 중단 시점은 가족들이 그만해도 좋다고 포기를 선언하는 순간이다. 그전까지는 최선을 다해 심폐 소생술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흡입 분만은 중간에 그만해도 좋다고 포기하는 가족이 없다. 언제 중단해야 하는지 전문가가 아닌 가족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의사가 판단을 해야 하는데 의사도 중단 결정을 내리기가 솔직히 쉽지 않다. 중단 시점이 정해져 있지만 일말의 희망을 놓을 수가 없어서 심폐 소생술을 포기하지 못하는 가족처럼 의사도 그런 마음이 된다.
그럴 경우 인상주의 화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열린 결말로 두는 것처럼 산부인과 의사도 그렇게 둘 수 있으면 좋겠지만 출산은 그렇게 열린 결말로 둘 수가 없다. 자연 분만을 하던 흡입 분만을 하던 혹은 제왕절개를 하던 분만은 반드시 아기의 탄생으로 끝을 내야 한다. 그리고 해피 엔딩이어야 한다. 끝에 마무리 음악과 춤이 들어가지 않으면 영화가 성공하지 못한다는 인도 영화처럼 출산의 엔딩도 항상 정해진 결말이 있다.
내가 지켜할 조건이 달리기는 했지만 우리 부부는 셋째를 출산했다. 주택 복권 1등 당첨 대신 우리에게 온 막내는 내게 하는 말 중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됐거든. 아빠는 몰라도 돼"라는 말일 정도로 다 큰 숙녀가 되었다. 그리고 나를 닮아 엄청 까칠하다. 셋째를 낳았으니 그렇다면 나는 흡입기를 내다 버리고 병원 수입을 올리는 방안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한다는 아내와의 약속을 지켰을까? 그 대답은 알려드리지 않겠다. 말하자면 열린 결말로 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