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게
작가: 심사정
소장: 서울대학교 박물관

학창 시절에 한국 문학 전집을 다 읽고 세계 문학 전집에 도전했는데 그때 읽었던 책들의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유독 두꺼워서 다 읽는데 한참 걸렸던 책들은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아도 책의 이름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토마스 만의 "마의산" 660페이지 ,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760 페이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780 페이지다. 물론 서머셋 몸의 "인간의 굴레"가 820 페이지로 내가 아는 한 가장 두껍다.   서머셋 몸이 1915년에 쓴 "인간의 굴레"는 한쪽 다리가 절름발이인 필립이라는 남자가 주인공이다. 그는 어머니가 동생을 낳다가 사망하는 바람에 아홉 살 나이에 고아가 된다.  그는 큰 아버지의 손에 자라면서 세상살이의 고달픔을 맛본다. 미술을 배우기 위해 파리로 떠나지만 그림으로 먹고 살 정도의 재능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실망하기도 한다.

"자네에겐 손재주가 어느 정도 있네. 끈기 있게 노력하면 꼼꼼하면서도 쓸 만한 화가가 되지 말란 법은 없지. 자네보다 못한 화가들도 수백 명이 되고, 자네 정도 그리는 화가들도 수백 명은 되네. 자네가 내게 보여준 그림들에는 재능은 없네. 열성과 지성은 있어. 자넨 보통 이상의 화가는 되지 못할 거야.”

미술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그는 미술가가 되는 것은 포기한다. 그 후  그는 의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외과 실습보조원을 거쳐 의사가 되는 데 성공한다.  작가인 서머셋 몸도 의사였다가 나중에 소설가로 전업한 것에서 보듯 이 소설은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소설에는 주제나 사상은 없다. 그러나 많은 작가들이 주인공의 입이나 생각을 빌려 자신의 속 마음을 내비치는 경우가 많다. 아래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본 필립의 생각이다.

"사람은 태어나서, 고생하다, 죽는다. 인생에는 아무런 뜻이 없었다. 사람의 삶에 무슨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태어난다거나 태어나지 않는다거나, 산다는 거나 죽는다거나 하는 것은 조금도 중요한 일이 아니다. 삶도 무의미하고 죽음도 무의미하다. 필립은 벅찬 감동을 느꼈다. 소년 시절, 신을 믿어야 한다는 무거운 신앙의 짐을 벗어버렸을 때 느꼈던 것과 같은 기쁨이었다. 이제 책임이라는 마지막 짐까지도 벗어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처음으로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셈이었다. 자기 존재의 무의미함이 오히려 힘을 느끼게 해 주었다."

원래 인간의 굴레라는 제목은 스피노자의 저서 "윤리학" 중 소제목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는데 굴레의 의미는 사람이 감정의 지배를 받는 탓에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나쁜 선택을 하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그러나 굳이 스피노자의 말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누구나 굴레가 있다는 것을 안다. 위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그 굴레를 받아들이고 벗어나는 사람도 있고 굴레에 빠져 허우적 대다가 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있다.  주인공 필립은 신체적 장애라는 굴레와 밀드레드라는 여성에 대한 집착이라는 두 개의 굴레를 가졌다. 그러나 그는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어떻게 살지 선택함으로써 그 굴레를 벗어 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건 독일의 철학자인 하이데거가 1927년에 쓴 "존재와 시간"이라는 책의 주제와도 같다.
하이데거는 스스로의 의지가 없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는 뜻에서 인간 존재를 "피투성"의 존재라 불렀다. 사실 이 세상에 태어나고자 해서 태어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우리가 그런 피투성의 존재라는 점을 깨달음으로써 오히려 죽음과 불안으로 이뤄진 세계에 자신을 능동적으로 던지는 행위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이를 피투성에 대비하여 "기투성"이라고 불렀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어려워서 오래전에 도전했던 책은 다 읽지도 못했고 읽는 동안에도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불교에서 말하는 핵심 사상과도 닿아있다. 불교에서는 인간은 8가지의 고통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한다. 잘 알려진 생로병사(生老病死)의 4가지에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 고통,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고통, 식욕이나 성욕에 지배당하는 고통의 4가지가 더해져 8 사고가 된다. 이런 고통으로 인해 인생은 고해와도 같은데 이런 고해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인생은 고해라는 것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한다. 내가 진통 산모들께 종종 하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진통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아프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면 그렇게 많이 아프지 않습니다. 또한 그 아픔이 아기를 낳기 위해 꼭 필요한 통증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통증의 상당 부분이 줄어듭니다."

"존재와 시간"과 "인간의 굴레"는 출간 시기가 불과 12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으니  아마도 우연이겠지만 그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가 그렇지 않았을까 싶다. 다시 인간의 굴레로 돌아가서 필립의 연인인 노라가 필립에게 하는 말 중에 그런 말이 있다.

"당신이 다리에 그렇게 민감한 건 어리석은 일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상대방이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보고도 그녀는 말을 계속한다. 사람들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걸 의식하지 않아요. 처음 볼 땐 의식하겠지만 그다음엔 잊어버려요"
얼굴의 흉터 때문에 괴로운 학창 시절을 보낸 내게 그녀의 말은 당시 나에게 크게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당사자로서 겪어 보지 않으면 그 고통은 절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다만  다른 사람뿐 아니라 당사자도 결국 의식하지 않고 잊고 지내게 되므로 그렇게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그녀가 몰랐을 뿐이다.

영어로 캔서(cancer)는 암이라는 뜻도 있지만 게자리라는 의미도 있다. 암은 현대에 들어와서 그 발생 기전과 진단, 치료법 등이 밝혀졌고 중세 이전에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병이다. 피부에 생기는 암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암은 신체 내부의 장기에 생기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말기가 되기 전에는 알기 어렵다. 그러나 여성의 유방에 생기는 암은 피부 바로 밑에 생기기 때문에 크기가 커지면 쉽게 알 수 있다. 중세와 고대에도 유방암이 있었다. 당시에는 그것이 암이라는 것은 몰랐지만 여러 변화로 인해 유방에 무언가 이상이 생겼다는 것은 알았을 것이다. 유방암을 조기에 진단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가 유방암 자가 진단법이다. 그 안내문에는 몇 가지 지침들이 있다. 우선 유방을 손으로 꼼꼼히 만져서 몽우리가 생기는지 살펴보도록 한다. 그리고 유두에서 피가 나오는지 유방 피부가 오렌지 껍질처럼 우툴두툴 해지는지 하는 것을 확인해 보라고 한다. 옛날 그리스 사람들은 유방에 암이 생겨 피부가 불룩 솟아오르고 우툴두툴해지면서 혈관이 구불구불 해지는 모양이 흡사 게의 등딱지 같이 생겼다고 해서 유방암을 게에 비교하여 카시노스라는 말로 불렀다고 한다. 카시노스 (karcinos)는 현대에 와서 캔서(cancer)라는 말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캔서는 암을 의미하기도 하고 게를 의미하기도 한다.  

자궁은 태아에게 많은 영양을 공급하는 태반이 붙어 있는 기관이다. 따라서 임신이 진행되면서 혈관이 발달하고 출산하고 나면 꽤 많은 양의 출혈이 동반된다. 이런 출혈은 출산 직후 자궁의 수축으로 근육 사이의 혈관이 조여짐으로써 지혈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오랜 시간의 진통을 한 산모들의 경우에는 간혹 자궁 근육이 탈진되면서 자궁 무력증이라고 하는 병적 상태에  빠진다. 이렇게 되면 근육의 수축력이 약해 지혈이 되지 않고 따라서 출혈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이때는 수혈도 하고 자궁 근육의 수축을 돕는 약도 사용하지만 그렇게 해도 출혈이 조절이 되지 않을 경우  마지막에는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을 할 수밖에 없다. 자궁을 들어낸다는 것은 다음에 출산을 할 수 없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저 단순히 장기 하나를 제거하는 것 그 이상이다. 자궁은 유방과 함께  여성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이나 유방을 들어내는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면 위나 맹장을  잘라내는 것과는 다르게 의사로서도 상당히 부담스럽게 마련이다.

자궁 무력증이든 유방암이든 이럴 때의 자궁과 유방은 어쩌면 그 개인에게는 일종의 굴레가 된다. 미국의 배우 안젤리나 졸리처럼 유방암이 생기기도 전에  아예 유방을 제거한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여성성을 지킨다는 생각에서 유방이나 자궁의 수술을 미루다가  생명을 잃는 사람도 있다. 어떤 것이든 굴레는 벗어나는 것이 좋다. 내게 있어 얼굴의 흉터라는 굴레는 다행히 지금은 많이 벗어났다. 그러나 자존심이라든가 공명심이라든가 혹은 무능한 가장이라는 자책감등 다른 많은 굴레들에 쌓여있다. 그래서 굴레를 벗지 못하던 시절의 필립처럼 나는 오늘도 허우적거리면서 산다.

서양에서는 게는 그리 좋지 않은 의미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게는  좋은 의미로 쓰였다. 옛사람들은 옆으로 걷는 모습에서 여유 있고 겸손한 선비의 모습이  있다고 해서 게를  "옆으로 걷는 선비""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래서 동양화 중에는 게를 그린 그림들이 많다. 내 조상 중의 한 분인 심사정 화가의 게도 그런 것 중 하나다. 그림에는 집게발에 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참게로 보이는 게 한 마리가 갈대의 줄기를 잡고 있다. 그림의 의미는 시험을 잘 치라는 격려의 의미라고 한다. 게의 등딱지는 한자로 "갑(甲)"이라고 하는데  그 갑은 요즘 말하는 그 갑과 같은 갑이다. 최고라는 의미다. 그러니 등딱지인 갑을 가지고 있는 게를 그려준다는 것은 과거 시럼에 일등으로 통과하라는 의미이다. 얼마 전 인터넷을 보다가 "조리원의 하루"라는 일러스트를 봤는데 거기서 보니 조리원에서의 갑은 모유가 많이 나오는 산모라고 한다. 참고로 조리원의 하루라는 일러스트를 그린 분은 우리 병원에서 출산하신 분이다.

한자어에는 동물이나 곤충을 빌려와 만든 사자성어가 많은데 蟹網具失(해망구실)도 그중 하나다. 이 사자성어는 낯선 단어지만 풀이한 말은 일상에서도 많이 쓰인다. "게도 구럭도 다 잃었다"는 말이 그 말이다. 어떤 일을 하려다 목적도 이루지 못하고 가지고 있던 것조차 다 잃는다는 뜻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학교 앞에 야바위 꾼들이 많았다. 구슬을 가지고 야바위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물방개를 가지고 야바위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가장자리에 대여섯 개 정도의 칸이 나누어진 큰 물통의 가운데에 물방개를 놓아서 물방개가 들어가는 곳을 맞추면 건 돈의 10배로 돈을 주고 안 들어가면 돈을 잃는 그런 것이었다. 물론 어떻게 조작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아이들이 지정한 곳에 물방개가 들어가는 일은 거의 없다. 야바위 꾼이 통을 살짝 흔든다는 이야기도 있고 물방개가 좋아하는 것으로 유인해서 못 들어가게 한다는 말도 떠돌았다. 나를 포함해서 많은 아이들이 물방개 탓에 코 묻은 돈을 잃었다. 하교하다 말고 물방개 야바위 꾼의 판에 앉게 되면 시간은 시간대로 허비해서 집에 가서는 어머니께 혼나고 그동안 아껴 모아 두었던 돈도 잃고 만다. 그야말로  게도 구럭도 다 잃은 꼴이다. 게도 구럭도 다 잃는 일은 생기지 않는 것이 좋다. 정 어쩔 수 없다면 구럭 (그물)은 놓아두고 게만 잃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각자에게 구럭은 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구럭은 건강이다. 출산을 앞둔 임신부든 출산을 하고 난 수유부든 마찬가지다. 그러나 구럭이든 게든 굴레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굴레를 벗지 못하면 속박의 삶 밖에는 남지 않는다. 물통에 갇혀 사는 물방개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나 물방개에 소중한 시간과 돈을 빼앗기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모두 우리 자신에게 달렸다. 피가 생각나서 끔찍한 피투성보다는 기투성의 존재가 낫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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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iets [2020-06-06 23:27]  peterpan84 [2020-04-25 15:02]  brugges [2020-04-15 22:00]  daphne [2020-04-15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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