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엄마
작가: 호아킨 소로야
소장: 스페인 소로야 미술관
"96번 올빼미 준비되었습니까?"
"녜. 96번 올빼미 하강 준비 끝"
"하강"
"엄마~~~~"
오래전에 경험한 일이지만 지금도 생각하면 오금이 저리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올빼미라는 호칭은 군대에 갔다 온 남자라면 들어 보았을 단어일 텐데 유격 훈련 때 훈련생들을 부르는 말이다. 유격 훈련 중에는 막타오 훈련이라는 것이 있다. 지상에서부터 11미터 높이로 사람들이 가장 공포심을 크게 느낀다는 높이에 설치한 구조물에서 몸에 밧줄 하나 감고 뛰어내리는 훈련이다. 위 대화는 막타오에서 뛰어내리기 위해 구조물의 끝단에 섰을 때 빨간 모자를 쓴 유격 교관과 훈련생인 내가 나눈 대화다.
의과대학을 졸업하면 군대를 면제받는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선 부대로 배치되어 3년간 군 복무를 받던가 아니면 대체 복무로 3년간 지방의 병원이나 보건소에 배치된다. 배치되기 전에 누구나 예외 없이 12주간의 군사 훈련을 받아야 하는데 그 기간 동안에는 힘들기로 유명한 유격 훈련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군의관이 되기 위한 훈련이라 유격 훈련은 일반 사병보다 기간이 더 길고 강도가 세다. 훈련장에서는 훈련병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각자에게 부여된 2자리 혹은 3자리의 번호로만 불린다. 이렇게 자신의 이름이 아닌 의미 없는 숫자로 된 호칭으로 불리는 곳은 군대와 교도소가 같다.
이름을 부르지 않고 번호로만 불린다는 것은 개개인의 고유한 개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인격을 가진 대상이라기보다 훈련이나 교정이 필요한 대상물로만 본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자신의 이름이 박탈된다는 것이 주는 상징적인 의미는 적지 않다.
조선 시대, 남성보다 인권이 열악했던 여성들에게는 아예 이름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5만 원짜리 지폐에까지 얼굴을 올린 신사임당은 이름이 무엇인지도 명확하지 않은 채 그저 그분이 살았던 집의 이름인 당호로만 알려져 있다. 사임당이라는 이름은 요즘으로 치면 부산댁, 목포댁 하고 부르는 호칭에 해당할 뿐 고유의 이름이 아니다. 반면에 양반들은 특히 학자들이나 관직에 있는 남자들은 자신의 이름 외에 자나 호까지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추사 김정희가 그렇고 명필 한석봉으로 알고 있는 분의 이름은 사실 호이고 석봉은 호다.
태어나서 가장 빨리 배우는 말은 엄마이거나 젖을 뜻하는 맘마다. 태어나 얼마 되지 않은 아기의 말은 부정확하기 때문에 아기의 첫말이 엄마라는 말인지 맘마라는 말인지 구분하기는 어렵다. 여하튼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엄마라는 말인 반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자신의 이름이다. 가장 많이 듣다시피 가장 중요한 단어이기도 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과거의 인물에 대하여 그의 사상이나 업적을 기억할 수 있는 것도 이름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도 있다시피 사람이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자신의 이름을 짓는 일이다. 이름은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부모나 조부모로부터 부여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름 때문에 일 년에 개명하는 사람이 십수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내 동생의 이름은 영자다. 글에서 가족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지만 오빠가 글에 재미를 더하기 위해 동생의 과거 이름을 공개하는 정도는 용서해 줄 것이라고 믿어 본다. 물론 그 이름은 과거의 이름이고 그 이름 때문에 놀림도 많이 받다가 다 큰 성인이 되어서 이름을 바꾸었다. 이름을 바꾸는 것은 지금은 비교적 수월해졌다고 들었는데 과거에는 생각보다 쉽지 않아서 사유가 타당해야 법원의 개명 결정을 받을 수 있었다. 바꿀 수는 있다고 해도 태어나면서 받은 이름을 바꾸는 일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고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다. 해서 SNS 가 발달한 요즘은 마음에 드는 의미를 담아서 자신의 실명보다는 아이디를 주로 자신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한다. 내가 직접 지을 수 있는 이름이 과거에는 호였다면 지금은 아이디다.
인터넷 상의 나의 아이디는 팔랑심이다. 팔랑귀라는 말은 귀가 가벼워 팔랑거린다는 의미로 남의 말에 쉽게 흔들리고 진중하지 못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나는 귀는 그렇지 않지만 손과 입이 가벼워 글과 말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적이 많았다. 공중 보건의사로 지방 의료원에 근무할 때 직원들과 함께 내 차로 카풀해서 함께 출근한 적이 있다. 그때 결혼하여 어린아이가 있는 원무 직원에게 "아침에 출근하려면 아이가 잘 안 떨어지려고 하지 않아요?" 하고 말한 적이 있다. 나로서는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운전해서 가기에는 너무 분위기가 무거워 그냥 가볍게 던진 말이었는데 잠시 동안 침묵이 흐르더니 그 직원이 눈물을 보이면서 우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린아이를 떼어 놓고 출근하는 발걸음이 무거웠을 텐데 그 말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것도 농담도 잘하지 않는 산부인과 과장으로부터 들었으니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미안하다고 사과하기는 했지만 그런 식으로 별생각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한 적이 수도 없이 많다. 물론 나로서는 상처를 주려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상대방의 처지나 입장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말하다 보면 실언이 생기게 마련이다. 내가 진중하지 못하고 팔랑거리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입으로 하는 말이나 손으로 쓰는 글이나 항상 조심해서 쓰고 신중하게 말하자는 의미로 팔랑손이라고 하는 아이디를 썼다. 그 후 내 성이 심 가이니 성을 붙여서 팔랑심으로 바꾸어 지금까지 십여 년 동안 사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타고 난 성격이 부드럽지 못해서 여전히 주변 사람들 한테 상처를 주면서 살고 있다.
이름의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 평생, 아이디의 경우도 마음이 변해 바꾸기 전에는 거의 대부분 수년 이상 사용한다. 사용 기간에 제한이 없다. 반면 사용 기간에 제한이 있는 호칭들이 있는데 요즘은 별로 쓰이지 않지만 아이 들 때 부르는 아명이 그렇고 임신한 동안에 부르는 태명이 그렇다. 태명을 정하지 않는 부모들도 있기는 하지만 요즘 보면 거의 대부분 부모들이 태명을 지어주는 경우가 많다. 그저 단순히 아가야라고 하는 것보다는 특정한 이름을 지어 부르는 것이 더 정서적 교감이 잘 되는 점 때문 아닐까 싶다. 상대방을 너 혹은 당신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는 것처럼 배속의 태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태명의 유래에 대하여는 잘 모르겠다. 일본이나 중국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외국에서 이렇게 뱃속의 아기를 위해 태명을 쓴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태어나면서 1살이 되는 것도 우리나라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임신하고 있는 10개월을 한 생명의 시작으로 보기 때문일 터이다. 그만큼 우리 민족은 태아에게도 인격을 부여하고 존중해 주는 문화가 있다.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먹고 즐거운 생각만 하도록 하는 태교도 이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우리나라 만의 고유한 문화다.
출산한 지 날짜가 좀 지나면 얼굴은 잊어버려도 임신부의 아이디나 태명은 기억이 오래 남는다. 제일 많이 들어본 태명은 사랑이라는 태명이고 기쁨이라는 태명도 많다. 그 외에 특이한 태명들도 있는데 그중에는 나중에 의미를 알게 된 것도 있고 영원히 모르는 채로 있는 것들도 적지 않다. 밤의 속껍질이라는 의미로 그렇게 밤톨처럼 잘 자라는 의미의 보늬, 바르게 자라라는 의미의 바름이, 아들이면 대통령 시키겠다는 의미로 통령이, 그리고 의미를 잘 모르는 것이지만 랑이, 당첨이, 봄봄이, 세븐이, 소울이, 바다사자 등등. 물론 이름을 흔하고 천한 것으로 지어야 귀신이 스쳐 지나가 일찍 안 데려간다는 뜻으로 흔한 개똥에 비겨 개똥이라고 지은 분도 있다. 이런 태명은 진료하면서 물어보아서 아는 것은 아니고 병원에서 발부한 산모 수첩에 태명을 적어 놓아서 알게 된 것도 있고 산후 맘 모임에서 알려주어서 알게 된 경우도 있다. 어쨌거나 태명이 없는 아기보다는 태명이 있는 아기가 기억하기 더 쉽다. 그런 점에서 나는 태명을 짓는 것을 장려하는 의사다. 물론 태명이야 출산과 관련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순산 체조를 강조하는 것처럼 의지를 가지고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세 아이를 두었다. 아이들은 위의 두 아이 중 큰 딸은 외할아버지께서 이름을 지으셨고 둘째 아들은 친할아버지가 지었지만 막내딸은 내가 직접 이름을 지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막내딸의 출산을 내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직접 받아서인지 알 수는 없지만 더 정이 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연유 때문인지 지금도 막내딸이 내 말을 제일 안 듣고 우습게 생각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 아이한테서 제일 많이 들은 말도 "됐거든"이라는 말이다. 다른 집들을 보면 딸과 아빠는 사이가 좋다던데. 아무래도 내가 정이 없는 것이 아이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한 듯하여 미안하고 후회스럽다. 그런 점에서 요즘의 젊은 아빠들은 정말 자상해 보인다. 물론 자상함은 타고나는 것이지 시대와 관련 있는 건 아닐 것이다. 1863년에 태어난 스페인의 화가 호아킨 소로야처럼 화가들 중에는 자상한 아빠들이 많다. 예술가는 아무래도 감성적인 경향이라 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 좀 더 낫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전적으로 내 변명이다.
호아킨 소로야는 두 살 때 부모가 콜레라로 사망해 이모네 집에서 자랐다. 처음에는 사실주의 화풍이다가 나중에 인상주의 화풍으로 바뀌었다. 화가들마다 그림의 소재로 좋아하는 대상이 있다. 세잔처럼 사과를 좋아한 화가도 있고 터너처럼 구름을 주로 그린 화가도 있다. 소로야는 고향 발렌시아의 바닷가의 밝은 모습을 많이 담았지만 자신의 아이들을 포함해 아이들의 모습을 많이 그렸다. 소로야는 세 아이를 두었다. 나처럼 첫째는 딸이고 둘째는 아들 그리고 막내는 딸이다. 여기 소개한 그림은 그의 막내딸이 태어났을 때의 모습이라고 한다. 그의 아들이 어떤 연극배우를 짝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그녀의 초상을 그리게 되었을 때 두 점을 그려 한 점은 아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의 그림들에서도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런 사례만 봐도 따스한 마음을 가진 아버지가 틀림없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 중 하나다.
어떤 사람이 괜찮은 사람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알기는 어렵다. 원칙과 기준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산부인과 의사인지 아닌지 알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한 가지 잣대를 가지고 판단해야 한다면 나는 그 의사가 임신 32주가 되기 한참 전 즉 임신 4개월이나 5개월쯤에 아기 성별을 알려주는지 하는 것으로 판단해 보라고 할 것이다. 임신 32주는 법적으로 태아 성별을 알려줄 수 있도록 허용된 시기다. 물론 그 점 하나만으로 어떤 의사에 대하여 평가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런 원칙을 지켰다고 해서 모든 점에서 원칙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의사라고 할 수도 없다. 다만 법에서 정한 그런 최소한의 기본 원칙조차 지키지 못한다면 지켜보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는 본인의 편의를 위해 혹은 산모의 요구에 의해 교과서에서 정한 권고 사항도 얼마든지 어기는 의사일 가능성이 높다.
어떤 의사가 정이 많고 따스한 의사인지 판단하는 것도 원칙을 지키는 의사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렵다. 다만 역시 한 가지 잣대를 가지고 그것을 판단하라고 하면 섣부른 판단일 수 있겠지만 임신부의 얼굴을 기억하고 일일이 이름으로 부르고 아기의 태명을 불러주는 의사인지 살펴보라고 할 것이다. 그렇게 이름을 불러주면서 대화를 나누는 의사라면 정도 많고 상대방에 대하여 관심도 많은 의사일 가능성이 높다. 나는 그렇지 못한 의사다. 사람들의 이름을 잘 부르지 않고 태명도 거의 불러본 적이 없다. 정도 없지만 기억력이 나빠서 기억을 하지 못한 점도 있다. 따스한 정이 없는 의사라는 사실이 여기 밝혀도 좋을 만큼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굳이 나라는 의사를 멋진 의사로 포장하여 괜한 오해를 사고 싶은 생각은 없다.
여하튼 어떤 사람에 대하여 그 대상이 산모이든 아이이든 혹은 뱃속의 태아이든 이름을 불러주고 기억해 준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물론 그러기 전에 이름부터 있어야겠지만.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은 너무 많이 알려진 시이니 내가 굳이 여기 그 시의 전부를 올리지는 않겠다. 대신 일부만 올리면서 단어 2 개만 바꾸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핏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생명이 되었다.
시인의 시에 있듯이 어떤 것에 이름을 부여하는 순간 그것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사람의 이름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그렇다. 날도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 의미도 없는 날이 생일이 되고 결혼기념일이 되고 의미 있는 하루가 된다. 그런 의미는 많이 만들면 만들수록 좋다. 그렇게 한다면 의미 없이 흩어졌을 숱한 날들이 모두 인생의 소중한 하루하루가 된다. 의미가 있는 것들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아내와 함께 10여 년전에 서삼릉도 가 본 적이 있고 5년 전쯤에는 전기 구이 통닭도 먹었지만 2020.04.26일 오늘은 아내와 함께 서삼릉 갔다가 오는 길에 모래내 영양센터에서 전기 구이 통닭을 처음 먹은 날이다. 너무 길어서 조금 줄여보면 [2020.04.26 서삼전기] 라고 이름을 붙여본다. 다만 내 기억력의 수준으로 봤을 때 분명 몇 년 아니 몇 달만 지나도 무슨 날인지 잊어버리고 서삼전기라는 이름의 전기 수리 가게에 무언가 부탁한 날인가 하고 착각할 것이다. 그래도 며칠만 기억이 유지되는 것과 몇달간 유지되는 것은 엄청난 차이다. 한달 쯤 지난 후에 아내에게 그때 "4월26일 말이야, 우리가 서삼전기에 간 날, 아니 서삼릉 갔다가 전기 구이 통닭집 간 날 말이야."하고 운을 떼면 "어머 왠일? 이이가 그런 사소한 것까지 기억하고 있네?" 하고 감동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