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희망
작가: 조지 프레데릭 워츠
소장: 영국 런던 테이트 국립 미술관

전문의가 되기 위해 대학병원에서 받는 전문의 수련 과정 기간은 4년이다. 그중  첫해인 1년 차 때는 환자나 산모의 진료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주치의를 맡는다. 주치의는  수술 준비를 하고 교수님의 회진을  대비하여 검사 결과와 병력을 파악해 두고 산모들의 분만을 돕는다. 당직 근무도 서야 해서 전공의 시절 중  가장 바쁜 때다. 2년 차는  1년 차를 도와서 수술을 하며 학생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스케줄이 들어가기도 한다.  3년 차는 주로 연구나 기타 업무를 맡는 경우가 많고 진료나 수술팀에 소속되지는 않는다. 가장 높은 연차인 4년 차는 수석의라고도 하며 특진이 아닌 일반 환자의 수술을 집도하고  특진 교수님의 수술 시에는 일차 보조 역할을 맡는다. 따라서 대학 병원에서는 인턴 1명, 주치의 1년 차 1명, 2년 차 한 명, 4년 차 수석의 1명이 한 팀을 이룬다. 이런 팀은 한 달 단위 혹은 두 달 단위로 교대로 산과 병동을 맡기도 하고 부인과 병동을 번갈아 가며 맡기도 한다. 따라서 1년 내내 같은 1년 차와 2년 차, 4년 차가 근무하지는 않는다. 1년 차들은 누구나 다 마음씨 좋고 잘 지도해 주는 천사 같은 4년 차를 만나기를 바란다.

4월쯤 어느 날, 1년 차 초반이라 아직 경험도 많지 않고 일도 서툴 때였다. 수술을 마치고 오후 늦게 병동으로 올라와서 저녁 회진 준비를 했다. 어제 나간 검사물의 결과지도 확인하고 아까 수술한 산모의 수술 기록지도 작성해야 하는 데다가 그날따라 새로 입원한 신환도 많아 정리할 일이 밀려 있었다. 내가 주치의로 있는 팀의 4년 차 수석의 선생님이 저녁 7시쯤 회진을 위해 스테이션에 나타났다. 내일 수술할 환자의 서약서도 받지 못했고 낮동안에 입원한 신환 산모의 초진 기록지도 다 마무리를 못했다. 빨리 회진이 끝나면 좋겠는데 오늘 회진은 한 시간을 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회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수석의 선생님은 차트 정리와 서약서 작성 등 일을 오늘 내로 다 마무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나로서는 시간이 빠듯하여 시간 내에 일을 마무리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내 예상으로는 밤 1시나 2시쯤 되어야 마무리할 수 있을 듯했다.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수석의: "심선생, 12시까지 차트랑 모두 정리해 둬."
나: "알겠습니다. 그런데 일이 많아서 12시 내로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1시든 2시든 최대한 오늘 밤 안으로 끝내 놓겠습니다."
수석의: "아니 오늘 밤이 아니라 12시까지 끝내 놓도록 해"
나: "예 알겠습니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수석의: "아니 노력이 아니라 무조건 12시까지 끝내 놓으라고."
나: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수석의: "아니 이 새끼가. 노력이 아니라 12까지 해 놓으라고. 알겠어?"
나: "......."

욕까지 들으니 더 이상 대답하고 싶지 않아 가만히 있었다. 그때  갑자기 얼굴로 주먹이 날아왔다. 주변에 있던 2년 차와 스테이션을 지키던 간호사들이 놀라 눈이 휘둥그레져  쳐다본다. 정통으로 눈두덩을 맞고 잠시 휘청거려 쓰러질 뻔했지만 몸을 가누고 서 있었다. 다시 주먹이 날아왔고 발길질이 시작되었다. 결국 바닥에 쓰려진 채 두들겨 맞았다. 나는 별 다른 대응을 하진 않았다. 지금은 많이 좋아져서 그런 일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때만 해도 대학의 수련 과정은 군대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4년 차 선배는 병원에서 하늘 같은 존재라서 대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런 분위기는 그때 내가 근무하던 병원만 그런 것은 아니고 다른 병원들도 대체로 비슷했다. 특히 외과 계열이 군기가 셌다. 물론 신체에 위해를 가하는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는 흔한 편은 아니었고  언어폭력이 대부분이었다. 다만 그때 내가 만난 4년 차 선생님이 성격이 과격하기로 유명한 사람이고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때 나로서는 하겠다고 거짓으로 말해도 되었을 텐데 내게도 융통성이 없었다고는 생각한다.  주변에 있던 다른 의사들이나 스테이션의 간호사들도 아무도 말리지 못하고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4년 차 수석의 선생님의 별명은 미친개였을 정도로 성격이 아주 험해 함부로 끼어들었다가는 사태가 더 악화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10분 정도 이어진 구타로 눈에는 시퍼런 멍이 들고 입술은 터져 피가 흘렀다. 이가 부러지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원래도 못생기고 부정 교합이 심한 이가 그나마 부러지기라도 했다면 보기가 영 좋지 않았을 것이다. 한참 두들겨 패던 4년 차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나가고 나와 우리 팀 인턴이 스테이션 탁자에 앉아 있었다. 얼굴의 피는 물수건으로 닦았다. 멍든 눈과 찢어진 입술은  봉합할 정도는 아니라  간호사의 도움으로 대충 반창고를 붙여 두었다. 맞은 건 맞은 거고 할 일이 많아 일을 빨리 서둘러야 했다.  너무 늦은 시간에는 환자와 보호자도 자야 하니까 너무 늦기 전에 다음날의 수술을 위한 수술 동의서부터 받기로 했다. 병실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저녁 근무를 하던 젊은 간호사가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두들겨 맞은 나도 울지 않는데 왜 갑자기 우나 싶었다. 나중에 들으니 두들겨 맞고 병실로 가겠다는 내 모습이 너무 처량하고 불쌍해 보여서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고 한다. 당시 간호사들과는 야식도 사서 함께 먹고 한밤중의  콜 (환자에게 이상이 있거나 하여 담당 주치의에게 연락하는 일)에도 내가 귀찮은 내색 없이 즉시 응대를 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날은 어찌어찌 보내고 다음날 날이 밝고 나서  산부인과 전공의를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에 사직서를 들고 산부인과 과장님께 찾아가려고 당직실을 나섰다. 그때 함께 수련을 하던 동료 1년 차 선생님들이 나를 말리면서 조금만 참으라고 했다.  그동안 고생하면서 수련을 잘하다가 그만두고 가면 너무 손해가 크다고, 앞으로 좋은 날이 올 것이니 한 번만 참으라고 말려서 결국 사직서는 내지 못했다.

그 후 4년의 전문의 수련 시절이 지나고 나는 지금 산부인과 전문의가 되어서 진료를 하고 있다. 비록 한때였지만 두들겨 맞아가면서까지 수련을 마쳤는데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인지, 잘한 선택인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수련 과정 때 힘들어하는 레지던트에게 친한 간호사들은 그렇게 말하곤 했다. "선생님은 지금은 힘들지만 수련 마치고 나가시면 월급에 동그라미 하나 더 붙잖아요."라고 말해 주면서 격려를 했다. 그때 전공의 월급이 50만 원 언저리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나가서 취직하면 500만 원쯤 되던 시절이라서 하는 말이었다. 지금도 산부인과 의사 평균 수입이 6000만 원이라고 하니 그때와 별반 차이는 없다. 물론 산부인과 의사 중에는 연봉 천만 원 이상인 사람도 있고 나처럼 그보다 훨씬  적은 사람도 있으니 천차만별이다.

그때로부터 30년 가까이 흐른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렇게  주먹이나 발로 두들겨 맞는 것은 그리 아픈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몸이야 좀 아프고 멍도 들고 마음도 상처를 입지만 몸이나 마음의 상처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는 때가 있지만 그저 사건으로서의 기억일 뿐이지 그 당시의 감정이 그대로 남아 있지는 않다. 장작이 타고나서의 검은 재를 보는 기분과도 같다. 열기가 없는 재는 더 이상 상처를 주지 않으며 위험하지도 않다. 물론 그때의 4년 차 선배를 그 이후 몇 번 스쳐 지나가면서 보기는 했지만 세미나 등에서 만나도 굳이 아는 척하면서 만나 보려고 하지는 않았다.  재는 비록 뜨겁지는 않지만 검댕이가 묻어 더러워질 수 있는데 일부러 검댕을 묻혀 내 감정을 더러워지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때 두들겨 맞고 과장님 방으로 가서 사표를 제출하고 그만두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힘든 일이 생겨 밤 깊이 잠을 못 이루는 날에 가끔씩 생각이 난다. 지금처럼 많은 빚과 아직도 밤낮을 가리지 않는 출산 산모를 보아야 하는 불규칙한 생활을 하지는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귀여운 아기의 출산을 도우면서 얻는 보람도 없겠지만 과연 어느 삶이 더 행복한 삶이었을지는 모르겠다.

그때 두들겨 맞고 나서 힘들 때 나를 붙들어준 힘 중 하나는 동료들의 지원과 위로였다. 그 후 의료 분쟁으로 힘든 시절에 나를 견디게 해 준 힘은 운명이 아니면 다른 어떤 힘이 었어서였을 것이다. 그 힘은 지금처럼 경영이 별로 좋지 않아 빚만 늘어가는 상황에서 나를 산부인과 의사로 붙들어주는 힘과 같은 것이다. 별달리 할 줄 아는 다른 것도 없는 처지이니 선택의 여지가 없기는 하지만 나를 붙들어준 힘은 "앞으로 언젠가는 좋아지겠지" 하는 희망이다. 서정주 시인은 자신의 시 "자화상"에서 스물 세 해 동안 자신을 만들어준 것은 팔 할이 바람이라고 하였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의 울음과 천둥과 무서리가 필요했듯이 어떤 인간이든 버티고 설 수 있도록 하는 힘이 있게 마련이다.
아내는 내가 품은 그것을 미련이고 집착이라고 이야기하지만 희망이라고 부르던 미련이라고 부르던  붙들 것이 있으니 다행이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 비록 생명을 구하는 것이 되지 못하더라도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노력하면서 죽는 순간까지  헤엄을 치고  희망을 품다가 죽는 것과 지푸라기조차 잡지 않고 그저 손 놓고 절망 가운데서 죽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지푸라기처럼 보였던 것이 동아줄일 수도 있고 동아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지푸라기일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이다. 아일랜드의 동화 중에 "구덩이의 흙을 다지고 올라온 당나귀"라는 동화를 옮겨 본다.

한 당나귀가 가난한 농부를 주인으로 섬기며 열심히 농사일을 거들었다. 그러는 사이에 세월은 빨리 흘러 농부도 당나귀도 늙어 일을 하기 힘들게 되었다. 농부는 이제 농사를 그만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그동안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늙은 당나귀가 걱정이었다. 내다 팔자니 쉽게 사갈 사람이 없을 것 같고, 그저 준다 해도 선뜻 받아갈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냥 내쫓으면 이리저리 떠돌다가 굶어 죽거나, 운이 좋아 새 주인을 만난다 해도 늙어서 일을 못한다고 구박이나 받을 게 뻔한 일이었다.
농부는 급기야 ‘농사도 짓지 못하는 늙고 병든 몸이 더 이상 살아서 뭐하겠느냐, 아예 당나귀를 매장하고 나도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 죽기로 결심하고 먼저 당나귀의 무덤을 팠다. 우물을 파듯 구덩이를 깊게 판 다음, 당나귀를 줄에 매달아 구덩이 아래로 조심스럽게 내려 보내고 울먹이면서 흙으로 구덩이를 메우기 시작했다. 구덩이 아래 있던 당나귀는 갑자기 자신의 몸 위로 쏟아지는 흙더미를 받으며 생각했다.
'주인이 우물을 팠는데 물이 안 나오니까 다시 메우려고 흙을 퍼붓는 것이다. 나는 그 흙을 단단히 다지기 위해 구덩이 속으로 내려 보내진 것이다.'
당나귀는 그렇게 생각하고 열심히 구덩이 속으로 쏟아지는 흙을 발로 다지고 또 다졌다. 농부는 당나귀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자꾸 울먹이며 구덩이에 흙을 퍼부었다.
다음날, 농부는 찬란한 아침햇살을 받으며 지상으로 올라와 이빨을 드러내고 크게 웃는 당나귀를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흙더미에 파묻혀 죽은 줄 알았던 당나귀가 멀쩡하게 살아 있었던 것이다. 농부는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고, 열심히 살아가야 할 때라고, 당나귀가 내게 힘과 희망을 주었다고. 농부는 죽는 날까지 농사를 짓기로 결심하고 기쁜 마음으로 다시 밭에 나가 일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화가이자 조각가인 조지 프레드릭 워츠는 "영국의 미켈란젤로"라는 찬사를 받은 적도 있지만  지극히 내성적인데다가 타협을 모르는 성격 탓에  다른 사람들과는 척을 지면서 살았다고 한다. 더군다나 그는 세속적인 명예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살았다고 하니 고단한 삶이었을 것 같다. 그의  대표작 "희망"은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가 26년간 옥살이를 할 때  감방 벽에 걸어 놓고 매일 보았다고 하는 그림이다. 한 여성이 지구를 상징하는 커다란 원 위에 앉아 리라라는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녀의 두 눈은 붕대로 가려져 있고  리라의 7개 줄 중에 6줄은 이미 끊어지고 오직 한 줄만 남아 있다. 그림의 모델인 여인은 도로시 딘이라는 이름으로 "화가의 신혼"을 그린 프레드릭 레이턴이 딸처럼 키우면서 모델로 삼았던 여인이라고 한다.
이 그림이 아니라도  화가 클림트도 그렇고 많은 화가들이 희망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희망을 노래한 시인도 많다. 희망을 노래한 시 중에는 나는 정채봉 시인의 "희망에 곰팡이 슬 때"를 가장 좋아한다.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행동하는 양심처럼 행동하는 희망이라서 좋다.

풀 섶 위에 하루살이 형제가 날고 있었다.
풀 섶 속에는 개구리 형제가 졸고 있었다.

한낮에 졸고 있는 개구리 형제를 내려다보며
아우 하루살이가 말했다.

"형 우리도 조금만 쉬었다 날아요"
그러나 형 하루살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우리는 쉬고 있을 틈이 없다.
우리에게는 지금이 곧 희망의 그 순간이다. "

아우 하루살이가 물었다.
"지금이 희망의 그 순간이라는 것은 무슨 말이에요?"
형 하루살이가 대답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지금 이루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의 명이 짧기 때문에 그러는가요?"
"아니다. 삶은 짧거나 긴 기간만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주어진 생에 얼마나 열심이었냐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 저기 저 개구리들은 그러한 것을 모르고 있는가요?"
"알고 있겠지. 그런데 저 개구리들은 약도 없는 죽을병에 걸린 거 같다"

"그 병이 무엇인데요?"
"알고 있으나 움직이지 않는 것, 바로 그 병이다"

형 하루살이가 아우와 어깨동무를 하고서 날며 말했다.
"아우야, 희망은 움직이지 않으면 곰팡이 덩어리로 변하고 만다.
이 말을 명심하거라!"

풀 섶 속에 잠들어 있는 개구리 형제를 향해
뱀이 소리 없이 다가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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